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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32화 (132/150)

132화.

늘 그 모습 그대로

“으…. 우웩….”

뭔가 마물 같은 것이 나타나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주저앉아서 난간을 잡고 바다를 향해 속을 게워 내는 라엔의 옆으로 앉았다. 아무것도 안 먹는 게 낫다더니 약뿐만 아니라 정말 먹은 게 아무것도 없는지 위액만 뱉었다.

평소 깔끔하게 주변을 관리하는 편이니까 선실에서 토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렇더라도 클린 마법이 있으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지금 상태를 보니 어쩌면 그런 것을 따질 정신도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가요. 보지 마….”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1시간 15분쯤. 라엔, 괜찮겠어?”

따라온 송하견이 옆에서 가만히 라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라엔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눈을 질끈 감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하긴 출발하기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오래 버티긴 한 거였다.

라엔의 등을 두들겨 주다가 치료하기 게이지를 흘끗 올려다봤다. 남은 면적이 꽤 되긴 했지만 게이지가 차는 속도를 생각해 봤을 때 계속해서 치료하기를 사용하는 건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아.”

“나한테 기대고 있어요. 몇 분 간격으로 치료해 볼게요.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지금보다는 나을 거예요.”

라엔의 몸을 내게 끌어당겨 기대게 했다. 그는 저항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이마를 내 어깨에 묻었다. 조금 진정되고 나서 선실로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잠깐만요. 물 가져올게요.”

“여기.”

송하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다시 앉히고 물병을 소환해서 내게 건넸다. 내가 고맙다고 말하자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네 몸도 신경 써.”

“당연하죠. 형 아까 율이 형이랑 민주혁이랑 얘기하던 거 있지 않았어요? 내가 여기 있을 테니까 다시 가 봐요.”

송하견이 자리를 뜨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내게 기대 있는 라엔을 조심스레 일으켜 세웠다. 치료했는데도 많이 안 좋은가.

“물이라도 조금 마셔 볼래요? …울어요?”

라엔이 우는 건 몇 번 본 적 있긴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늘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분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건 처음 봤다. 방금까지 틀어쥐고 있어서 옷의 앞쪽이 흐트러진 채로 가늘게 숨을 헐떡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이 크게 뜨였다.

“치료가 소용이 없었어요? 아직 많이 안 좋은가요?”

“…이런 모습 보여 주기 싫었어요.”

응? 예상외의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를 멀거니 바라봤다.

라엔이 손을 살짝 튕겼다. 연한 바람이 불더니 그의 체취와 비슷한 달콤한 향기가 주변을 감쌌다. 조금 구겨졌던 그의 옷도 다린 것처럼 말끔하게 펴진 채였다.

“나한테 실망했나요?”

“내가 실망할 일이 있었나요?”

“뭐든 잘하고 싶었어요. 이한한테는 특히 더 완벽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맙소사,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내가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내자 라엔이 몸을 잠깐 굳혔다. 그러면서도 뒤로 몸을 물리지는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뭐든 잘할 필요 없어요. 완벽한 모습일 필요도 없고요. 형한테 실망한 적 한 번도 없어요. 형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이제 형만 알면 될 텐데. 늘 그 모습 그대로 좋아해요, 형.”

라엔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창백하게 질렸던 그의 뺨이 연하게 붉어지며 혈색이 돌았다. 그가 돌연 고개를 푹 숙이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봐요. 이한이 그러니까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아는데도.”

희미한 목소리였기에 라엔이 뭐라고 말했는지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그가 울먹이는 것 같았다. 라엔은 내가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치료는 더 해 줄 필요 없어요. 괜히 무리하지 말아요. 들어갈까요? 아니면 여기 있을래요?”

“당장 내 손 잡아요.”

아까 그 고생을 하고서도 어떻게 치료는 필요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벌써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듯한데.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몇 번 거절하던 라엔도 포기하고는 손을 맞잡아 왔다.

난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적당한 주기로 그를 치료했다. 걱정했던 대로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치료하기 게이지의 남은 면적이 위태로웠다.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는 비상시를 위해서 항상 남겨 두는 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힐러가 도울게요!> 가져오기, 성공!」

생각 없이 행동한 건 아니었다. 라엔은 여기서 감지 마법을 쓰면서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고, 나는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라엔의 컨디션을 관리하는 게 더 현명했다. 그리고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민주혁이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피부가 흰 편이니까 안색이 질려도 그다지 표가 안 날 듯싶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정도는 이전의 메스꺼움 페널티로 단련되었기도 하고.

물론 가져오기를 쓰고 나서는 생각보다 더한 메스꺼움의 강도에 조금 아차 싶었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가져오기를 서너 번쯤 쓰고 나서 배가 멈췄다.

“같이 갈까요?”

“네. 하견 형 옆에 있을게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다른 용사들이 감지 마법을 쓰면 송하견이 그 정보를 한데 모아 기록하기를 반복했다. 나도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송하견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옆에서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불시에 말을 건넸다.

“앉아.”

“네? 갑자기요?”

“앉아 있든가 들어가서 누워 있든가.”

지금 완전히 괜찮아 보일 텐데. 이번에는 티 내지 않고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에 동요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네 몸 상태도 생각하라고 했지.”

“멀쩡해요.”

송하견은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내 어깨를 눌러 난간에 기대앉게 했다.

다시 하던 일에만 집중하는 듯하던 송하견은 중간중간 내게 시선을 흘끗 돌렸다.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내 안색을 계속해서 살폈다. 정말 그럴 필요 없는데. 물론 그가 건네준 시원한 물은 감사히 마셨다.

마지막 구역을 돌아본 민주혁이 복귀하고 나서 송하견이 동그라미가 세 개 그려진 지도를 허공에 띄웠다.

“균열이 열린 곳은 이렇게 세 군데야. 규모로 봤을 때 가운데 있는 곳부터 먼저 처리해야 돼.”

“그게 낫겠다. 남은 두 군데는 규모가 엇비슷하니까 상황 봐서 결정하면 될 것 같고. 이제 여기서 확인할 건 더 없지? 나머지는 돌아가서 얘기하자.”

뱃머리가 육지 쪽으로 돌아갔다. 박율은 라엔에게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하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서 펜던트를 풀어내 자기 목에 걸었다.

“내가 하고 있을게요. 마나도 아직 한참 남았어요.”

“마나가 충분하다니 다행이네. 그러면 이거 말고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박율이 돌아가는 건 좌표를 명확하게 짚을 수 있으니까 라엔에게 텔레포트로 여관에 먼저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다. 펜던트라는 매개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먼 거리로 마나를 보내는 건 부담되니까 펜던트는 자기가 차고 있겠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뒷일을 다 맡기고 나 혼자 돌아갈 수는 없어요. 다들 고생했잖아요.”

“너 혼자만 가라는 게 아니야. 두 사람 몫의 텔레포트를 할 마나가 남아 있다면 이한이도 같이 데려가 줄래?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박율은 또 언제 눈치챈 걸까.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라엔은 허리를 숙여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다가 자기 품에 나를 끌어안았다. 바다의 짠 내음을 덮을 만큼 그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이 선명했다.

“먼저 가 있을게요. 남은 일을 맡겨서 미안해요.”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서 푹 쉬고 있어. 이한아, 너도.”

아까까지만 해도 고민하는 기색이 짙더니 라엔은 이런 때만 결정이 빨랐다. 순식간에 도시 입구 쪽으로 텔레포트한 라엔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내려 주세요. 걸어갈 수 있어요.”

“금방 다시 텔레포트할 거라서요.”

도시의 입구를 걸어서 통과한 라엔은 여관방 안으로 곧바로 텔레포트했다. 보안상 도시 너머에서 안쪽으로 한 번에 텔레포트하는 건 안 되는 것 같았다.

“괜찮아 보였는데, 참고 있었던 거예요?”

“아깐 정말 괜찮았어요.”

“뭐 때문이에요? 혹시 신력을 지나치게 사용해서 그런 건가요?”

“아니요. 나도 뒤늦게 좀 멀미한 것 같아요.”

라엔이 나를 침대에 비스듬히 앉혀 두고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누워 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게 나을 거예요. 이한은 나를 치료해 줬는데 나는 이한한테 더 해 줄 수 있는 게 없네요.”

“옆에 있어 주세요. 그거면 돼요.”

“…나한테 그것보다 더한 걸 바라 줬으면 좋겠어요.”

“어떤걸요?”

“글쎄요. 그냥 자꾸 욕심이 나네요.”

가볍게 웃으며 내 옆에 앉아서 눈 위로 손을 덮는 손길이 다정했다.

“이대로 자요. 잠들면 눕혀 줄게요.”

사실 정말 괜찮았다. 이 상태로 배를 더 탔을 때도 괜찮았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육지를 바로 밟았기에 가져오기 스킬을 썼음에도 라엔처럼 심하게 앓지는 않았다.

별로 잠들 생각은 없었는데도 눈을 감고 있으니 몸에 나른하게 힘이 풀리고 잠이 쏟아졌다.

내가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얼마 안 잔 게 아니라 하루를 내리 잔 것이다.

“갑자기 배를 탔으니까 많이 피로했을 거야.”

“그래도 자느라 하루가 다 갈 줄은 몰랐어요. 율이 형은 안 피곤해요?”

“형은 괜찮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니까 네가 아무리 바다에 가고 싶어 했더라도 이번엔 우리끼리 갈 걸 그랬다. 따로 시간을 내서 배를 타고 나가 보는 방법도 있었는데.”

“아니요, 좋았어요. 형들이랑 가서 더 좋았고요. 안 데려갔으면 속상했을 거예요.”

박율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정을 내린 듯한 눈치였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기에 나도 묻지 않고 넘어갔다.

나는 지금 박율과 함께 해변을 걷는 중이었다. 그는 하루가 통째로 지나갔다는 사실에 충격받아서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는 나를 일으켜서는 점심을 먹였다. 그러고는 근육통은 없는지 물어본 후에 산책하자며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아, 찾았다. 잠깐 눈 감아 봐.”

박율이 내 한쪽 귀를 손으로 감싸고 다른 쪽 귀에 뭔가를 가져다 댔다. 귓가에 딱딱한 게 닿았다. 동시에 묘한 소리가 났다. 쏴아, 하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물소리 같기도 한 시원한 소리.

“마음에 들어? 소라 껍데기를 귀에 가져다 대면 파도 소리랑 비슷해.”

“…네, 좋아요.”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봤다. 물장구치는 소리랑 비슷할 줄 알았지만 그것보다 더 커다랗고 묵직하고 거대한 느낌이었다. 손을 바닷물에 넣어서 휘적여 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햇빛이 비치는 투명한 바닷물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소라 껍데기를 손에서 놓지 않자 그가 목걸이 형태로 만들어서 목에 걸어 줬다. 마음에 들었다.

전부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 내가 일어났을 때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균열을 살펴보러 나갔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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