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31화 (131/150)

131화.

지금보다 더 나아질 테니까

“라엔 형, 약은 정말 안 먹을 거예요? 벌써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차라리 아무것도 안 먹는 게 나아요. 뱃멀미는 약도 안 듣더라고요. 체질적인 문제라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견딜 만은 해요.”

“이제 들어가서 쉬어, 라엔아. 어느 정도 도착했다 싶으면 부를게.”

“…부탁할게요.”

라엔은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선실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뱃멀미로 인해서 상태가 나쁜 건 내가 시스템의 힘을 이용해 치료한다고 해도 계속 원점으로 돌아올 터였다. 계속 배를 타고 있을 테니까.

“괜찮을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 상태가 많이 안 좋다 싶으면 텔레포트로 돌아가도록 할 거니까.”

그건 다행이었다. 라엔이 순순히 돌아가지는 않을 테지만 박율도 이런 데서는 잘 물러나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돌려보낼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나요?”

“그런 건 아니야. 지금은 살펴봐야 할 범위가 넓어서 텔레포트로 이동하는 건 비효율적인데, 균열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면 웬만한 거리는 텔레포트로 이동 가능할 거야.”

도시에서 적당히 거리가 있으면서도 그 도시의 영역으로 인정되는 부근까지 살펴볼 거라고 했다. 박율이 짚어 주는 지도의 범위를 보니 생각보다 넓었다.

“그래도 감지 마법을 쓸 수 있다니 다행이네요. 마법이 닿을 수 있도록 몇 군데만 돌아다니면 되니까요.”

“맞아. 그동안 균열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을 더 연구했거든. 여기는 방해물도 없고 소음도 없어서 감지 마법을 사용하기에 좋은 조건이기도 해.”

박율의 말처럼 여기는 뒤틀린 장소라서 바다에서 들릴 법한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와 간간이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뱃머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지도를 보며 얘기하고 있는 송하견과 민주혁이 보였다.

“키는 누가 잡아요?”

“아, 키는 잡을 필요 없어. 원래는 키를 수동으로 조작해야 하는데 살짝 손봐서 원하는 방향으로 자동 조종되도록 바꿔 뒀거든.”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응. 마나를 이용해서 좌표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나중에 원래대로 돌려놓는 조건으로 허가받은 사항이야.”

마나 회로를 설계하는 건 박율과 라엔이, 좌표를 설정하는 건 송하견과 민주혁이 맡았다고 한다. 며칠 만에 그걸 다 했다니 새삼 대단했다.

“처음부터 자동 조종이 가능하도록 설계하지 않는 걸 보니까 마나가 많이 들어가는 방식인가 봐요.”

“맞아. 그래서 보통 그렇게는 안 하는데, 우리는 항해에 능숙하지 않기도 하고 그 정도의 마나를 소모하는 건 큰 타격이 없기도 하니까. 텔레포트보다는 마나가 훨씬 적게 들기도 하고. …아.”

“왜요?”

박율의 얼굴에 잠깐 곤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배에 마나를 지속적으로 주입하기 위한 펜던트를 만들었거든. 출발하기 전에 내가 차려고 했는데 받아 온다는 걸 잊었네.”

“지금 누구한테 있는데요?”

“라엔이 계속 차고 있을 텐데. 잠깐만 다녀올게, 이한아.”

라엔이 들어갔던 선실에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들어갔던 박율은 잠시 후에 빈손으로 다시 나왔다.

“잠든 것 같길래 안 깨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냥 뒀어.”

“멀미할 때는 자는 게 낫죠. 잠들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펜던트를 차고 있어도 마나가 그렇게 많이 소모되는 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 크게 부담되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마나가 계속 빠져나가는 거니까 신경은 좀 쓰이겠지. 라엔이 상태가 안 좋으니까 이런 것까지 맡기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런 거라면 이따가 라엔 형이 일어났을 때 받아 오면 되죠. 괜찮아요.”

박율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갛게 웃었다. 뭐 때문에 웃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좋았다.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서 입꼬리를 올려 웃자 그가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너를 처음 봤을 때보다 네가 많이 나아졌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

“그런가요?”

그의 앞에서 말 한마디를 겨우 내뱉으면서 펑펑 울었던 내 모습을 문득 떠올리고는 빠르게 납득했다.

“형 덕분이에요.”

“이런 말에서도. 네가 따뜻하고 여린 사람이 아니라, 따뜻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게 느껴져. 그래서 좋아. 정말 다행이고.”

이제는 내 뺨에 닦아 낼 눈물이 없을 텐데도 그는 눈물을 닦아 내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 손길이 어딘가 애달프고 간절해서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아니었다. 박율은 나를 바라보며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율이 형….”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용사 임기가 끝나는 날에 대해서는 미리 겁부터 먹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불안함이 있었다. 방법을 찾으려고 하고는 있으나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빨랐다.

박율이 이렇게 의미심장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니까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나도 박율 못지않게 간절하게 보였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더 나아질게요. 지금보다 더요. 그러니까 계속 옆에서 지켜봐 주세요.”

“…그래.”

이렇게 금방 나오는 대답이 지금만큼 미웠던 적이 없다. 잠깐의 망설임은 이 대답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말임을 여과 없이 보여 줬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착했습니다. 첫 번째 구역입니다.”

앞쪽에서 들리는 민주혁의 목소리와 함께 배가 멈췄다. 박율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서 옆으로 쏠리는 내 몸을 지탱했다. 정말이지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나오는 거짓 섞인 대답은 미워해도 그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이한이는 뱃멀미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하견이처럼 멀미약이 잘 듣는 걸 수도 있겠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안 좋은 것 같다 싶으면 형한테 꼭 말해 줘.”

“…알았어요.”

“형은 하견이랑 주혁이한테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라엔이 깨워서 와 줄래? 너무 안 좋아 보이면 그냥 누워 있게 둬도 괜찮아.”

“네.”

“고마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정신 차려야 했다. 다 괜찮았다. 박율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포기한 적 없으니까.

노크도 없이 선실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갔다. 선실 안은 바깥보다 좀 더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라엔은 푹신한 벨벳 소재의 소파에 몸을 웅크려 누은 채였다. 그가 늘 걸치고 있는 로브가 오늘따라 그를 짓누르는 것처럼 묵직해 보였다.

소파 옆에 쪼그려 앉아서 식은땀에 젖은 라엔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평소의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 누그러져서 부드러워 보였다. 파리한 안색임에도 조각처럼 단정하고 반듯했다.

새삼 참 잘생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내 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떴다.

“…이한?”

“방금 도착했는데 일어날 수 있겠어요? 율이 형이 많이 안 좋으면 더 누워 있으래요.”

“아니에요. 나도 나가서 살펴봐야 할 게 있어서요.”

그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다시 앉아선 입가를 가린 채 몸을 숙여 이마를 무릎에 가져다 댔다. 이 정도로 멀미하는 거라면 약이 안 들을 만했다. 그의 옆에 앉아서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괜찮아요…. 잠시만 있으면 돼요. 먼저 가 있어요.”

“내가 형을 이 상태로 두고 어떻게 가요.”

라엔은 이런 일에서도 무리하는구나 싶었다. 해야 한다는 일이 그에게 꼭 필요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태를 본다면 무조건 쉬는 게 맞았다. 그를 어떻게 다시 눕혀 놓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뇌리를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치료하기를 써 볼까.’

아까 치료하기가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계속 항해하는 중이기에 멀미가 나아졌다가 다시 심해지는 걸 반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배가 멈춰선 지금은 괜찮을 듯싶었다. 이걸 이제야 생각해 내다니. 빠르게 라엔의 손을 잡았다.

시스템이 마물에 당한 상처가 아니라 일반적인 상태 불량도 치료할 수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지만,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조금 나아요?”

라엔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직 안색이 조금 창백한 것 같기는 했으나 식은땀도 안 나는 듯했고 아까보다는 훨씬 혈색이 돌아 보였다. 그는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하다가 무방비하게 슬며시 웃었다.

“…항상 도움만 받네.”

나직한 혼잣말이었다. 그럼에도 선실 안이 조용해서인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라엔에게서 들어 본 적 없었던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어쩐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라엔은 미끄러지듯이 내 허리에 팔을 둘러 나를 안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그의 달콤한 체취가 선명하게 느껴져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게 기대 있는 라엔의 등으로 가만히 손을 올렸다.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먼저 손 내미는 건 항상 이한이었던 것 같아요.”

곧바로 이어지는 목소리에 몸이 덜컥 굳었다. 그는 나를 점점 깊숙이 끌어당겨 제 품에 안으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내미는 손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항상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고….”

‘내가 언제 못 알아챘어요?’ 하고 묻고 싶었다. 지금도 그가 손 내밀어서 안는 대로 나는 가만히 안겨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입을 떼는 것보다 라엔이 고개를 들어서 내 귓가에 스치듯이 속삭이는 게 더 빨랐다.

“그래도 좋아해요.”

그의 숨결이 간지러워서 등이 꼿꼿하게 펴졌다. 라엔은 ‘좋아하니까 뭐든 좋아할 수밖에 없나 봐요.’ 하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내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게 손을 뻗었다.

“고마워요. 이제 나갈까요?”

“…네.”

멍하게 대답하며 라엔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라엔은 마나 주입용 펜던트를 가져가겠다는 박율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치료해 줬으니 상태도 괜찮고, 상태가 나쁘더라도 그 정도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건 자기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으며, 박율은 박율대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으냐. 그렇게 빈틈없이 쏟아 내듯 말하는 태도가 아주 강경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고 감지 마법을 사용해서 살펴볼 구역을 나눈 후 송하견이 모눈종이처럼 칸칸이 나누어진 지도를 허공에 펼쳐 뒀다.

“감지 마법 쓴 결과를 각자 말해 주면 바로 정리할게.”

“A3부터 14구역까지 이상 없어요.”

“C2부터 15구역까지도 특별한 건 없어.”

“B7 구역에는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직접 다녀와 보겠습니다.”

“내가 A16 구역 다녀오는 김에 같이 가 볼게요. 주혁은 다른 곳 살펴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송하견이 지도 위에 뭔가를 바쁘게 메모하며 어떤 구역을 아직 살펴보지 않았는지도 빠르게 전달했다. 전체적으로 팀워크가 잘 맞아서 삐걱거리는 곳 없이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다들 같이 지낸 지 몇 년이나 됐다는 게 이럴 때 실감이 나네.’

물론 나도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하긴 했지만 그들은 나보다 몇 년은 일찍 함께 지내 왔으니까.

비록 나는 지금 하릴없이 있지만 원래 힐러는 할 일이 없는 게 좋은 거였다. 다들 안 다친다는 뜻이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내 역할을 해낼 거고.

“선이한.”

“네?”

“지금은 이쪽을 살펴보는 중이야. 앞으로 여기 표시한 것처럼 네 군데 더 돌아보면 돼.”

송하견은 모두가 말하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쁘게 메모하면서도 내게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 줬다. 생각해 보면 그는 말수가 적은 듯하면서도 내가 궁금해할 법한 것들을 나서서 설명해 줬던 것 같다.

“고마워요.”

“응.”

감사 인사를 바로 받아 주는 것도 좋았다. 지난번에 송하견의 최종 퀘스트를 성공한 이후로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약간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시선이 내게 더 오래 머물고 나를 더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내 행동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내가 계속 그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귀가 달아오른 듯이 보이기도 하고.

“여기에는 E13 구역에 균열이 열려 있어. 이곳에서 감지 마법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은 모두 확인했고, 다른 곳은 이상 없어.”

“다들 고생했어. 그러면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겠다. 라엔아, 들어가 있을래?”

“이따가 찾아갈게요. 좀 자고 있어요, 형.”

그렇게 한 장소만을 남겨 두고 다른 곳들은 모두 살펴봤다. 지금까지 발견한 균열은 총 두 곳이었다. 마지막 장소를 향해서 배를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아, 라엔이 들어가 있던 선실 문이 세차게 열리고 라엔이 다급하게 배 뒤편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