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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28화 (128/150)
  • 128화.

    소리 없는 바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라엔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 먼저였다.

    “…이한. 리더 형.”

    라엔은 박율의 마나를 감지해서 우리가 균열을 빠져나왔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듯했다. 그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안에서 무슨 일은 없었나요? 리더 형은 왜 갑자기 균열 안으로…. 아니, 이건 나중에 물어볼게요. 일단 마물부터 처리하고요.”

    “그래. 그건 나중에 천천히 말해 줄게.”

    박율은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민주혁이 묶어 놓은 마물의 핵을 검으로 찔러서 마물을 처리해 나갔다.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네. 그렇지?”

    “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야, 선이한. 너는 괜찮아?”

    “형은 괜찮아. 이한이는 상태를 좀 더 지켜보는 게 낫겠다. 주혁이는 이한이한테 방어 마법을 더 신경 써서 둘러 줘.”

    “알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나왔어?”

    송하견의 물음에 박율이 웃었다.

    “얼마 안 걸린다니까. 그렇지, 이한아?”

    박율이 말을 맞춰 달라는 암묵적인 눈빛을 보냈다. 안에서 무슨 상황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생각이구나.

    “…….”

    박율의 일이기 때문에 당사자인 그가 말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나도 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그렇다고 저을 수도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끝이 차게 식었다.

    ‘내가 박율을 따라 균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나도 영영 알지 못했겠구나.’

    그가 저 안에서 몇 날을 지내든 여기서는 고작 몇 시간쯤이었을 테니까, 박율이 먼저 말해 주지 않는다면 균열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낸 건지 짐작할 수조차 없을 일이었다.

    내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기라도 했는지 라엔이 내게 신경 쓰며 안색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어 보이고 그들을 치료하는 데 집중했다. 균열을 빠져나오니 시스템과 정상적으로 다시 연결되어서 다행이었다.

    “됐다. 이게 마지막이야.”

    박율이 이곳에 있는 마물의 핵에 검을 다 박아 넣어서 처리하자 그제야 큼지막하게 열려 있던 균열이 얼기설기 닫혔다. 다들 한숨 돌리는 사이 마지막으로 그들을 치료했다. 전투하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라엔은 그제야 아까 하지 못했던 질문을 쏟아 냈다.

    균열 너머로는 갑자기 왜 넘어갔는지, 균열을 넘어가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등에 대해서 박율에게 그럴싸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라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조금 석연찮은 표정이긴 했지만.

    “어차피 같이 가지는 못했을 거고, 당시에 상황 설명이라도 자세하게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건 미안해. 미리 말했다면 너희가 충분히 이해했을 텐데 마음이 앞서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급하게 행동했네. 걱정했겠구나. 앞으로는 주의할게.”

    “사과를 들으려고 한 얘기는 아니었어요. 형이 무작정 무모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그래도 걱정되니까 앞으로는 미리 설명해 달라는 뜻이었어요. 그리고 이한.”

    라엔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한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몸을 바짝 굳힌 채 그를 바라봤다.

    “에이, 형님. 그렇게 날 세우고 말하면 애 웁니다. 지금 안색도 파리한데요.”

    “내가 언제 날을 세웠나요. …이한, 혹시 내가 놀라게 했나요?”“아니요, 전혀요.”

    걱정스러운 라엔의 목소리에 재빨리 대답했다. 내 어깨를 감싼 민주혁의 손을 살짝 꼬집으며 그에게 눈을 가늘게 떴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민주혁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라엔은 아까보다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나에게서 앞으로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민주혁 덕분에 열 마디 들을 것을 여덟 마디 정도 들은 것 같긴 했다.

    “아무 일도 없던 건 맞죠?”

    “네에….”

    말끝이 나도 모르게 늘어졌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 박율과 그렇고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건 치료를 위한 거였으니까 논외였다.

    “야, 너 얼굴은 왜 빨개지는데.”

    “…뭐가?”

    “거짓말 하나도 못 하면서. 됐다, 됐어.”

    민주혁은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다.

    “너한테 보여 줘야 할 걸 찾았거든. 하견 형님이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해 뒀어.”

    “응. 네가 저번에 비틀린 공간을 복구할 때 비석 같은 것에 손을 댔던 게 기억나서. 아까 전투하면서 비슷한 걸 찾았어.”

    “고마워요. 혹시 지금 갈 수 있을까요?”

    송하견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무뿌리 쪽에 작고 매끈하고 각진 돌이 박혀 있었다. 보자마자 이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쪼그려 앉아서 그 위로 손을 대며 속삭였다.

    “살아갈게요.”

    파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에게만 들린 소리인 듯 다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눅진한 공기가 밀려왔다.

    나를 안아 든 라엔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말라붙었던 늪이 이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고생했어요.”

    “형, 아까 그게 이곳에 남은 마지막 균열이라고 했죠.”

    “맞아요. 원래는 다음 장소로 바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괜찮을 것 같아요? 아니면 조금 쉬었다가 출발할까요?”

    “나는 괜찮아요.”

    “그래요. 가면 마을이 있을 테니까 이동하자마자 쉴 수 있을 거예요.”

    “마을….”

    마을에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었다. 지난번에 태어나서 처음 가 본 마을에서 민주혁이 크게 다칠 뻔했으니까. 내가 가만히 생각에 잠긴 걸 눈치챘는지 라엔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 상시 거주하는 인원이 많지는 않아요. 마을이라고 하긴 하지만 도시에 가까워요. 항구 도시요. 그러니까 지난번에 갔던 마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를 거예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맞아. 그때는 타지와의 교류가 거의 없는 고립된 마을이나 마찬가지였고, 지금 갈 곳은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거든. 활기찬 곳이야.”

    박율이 나를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불안하면 형이랑 떨어지지 마.”

    “형이 두고 가지 않으면 떨어질 일 없어요.”

    “그래, 그래.”

    나는 나름 진심이었음에도 박율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가볍게 대답했다. 내가 진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게 틀림없었다. 입술을 삐죽 내민 사이에 송하견이 얇은 겉옷 하나를 소환해서 내 어깨에 걸쳐 줬다.

    “가서 필요하면 입어.”

    가을이 다가오고 있긴 했지만 아직 날이 추워지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지금 가는 마을이 추운 곳인가요?”

    “딱히 그렇지는 않아. 그냥 바람이 많이 부니까.”

    “왜 그런지 알아?”

    민주혁이 옆에서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묘하게 들떠 보였다. 내가 고개를 젓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까 라엔 형님이 항구 도시라고 했잖아. 바다로 가는 거거든.”

    “아하.”

    “흠, 반응이 미지근한데.”

    민주혁이 장난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이게 최선의 반응이었기에 더 보여 줄 만한 건 없었다. 내가 얼굴에 표정이 잘 안 드러나서 그렇지 나름대로 설레하는 중이었다.

    “책에서 봤어. 파도가 치고 물 냄새가 나는 곳이라고 하던데.”

    “잘 알고 있네. 그래도 실제로 가면 책으로만 봤던 거랑은 다를 거야.”

    “맞아. 이한이도 좋아할 거야. 그러면 이제 출발하자.”

    “지금 텔레포트 쓸게요, 이한.”

    연한 바람이 몸을 감쌌다가 흩어졌다.

    「‘소리 없는 바다’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눈앞에서 스르르 사라지는 상태 창 뒤로 그보다 더 푸른색의 맑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게 밀려왔다가 멀어지는 바닷물 위로 햇살 조각이 떠 있는 듯이 반짝임이 일었다.

    “…네. 좋아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멍하니 내뱉으며 발끝으로 땅을 슬쩍 쓸어 보았다. 고운 모래가 사락거리는 소리가 적막의 한가운데서 울렸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조금 묵직했고 짠 냄새가 어려 있었다.

    “조용하지? 원래는 파도가 칠 때마다 철썩이는 소리가 들려. 여기는 장소가 뒤틀리면서 바다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민주혁의 목소리가 아쉽다는 것처럼 들려서 ‘아쉬워?’라고 물었더니 그가 곧바로 나를 돌아봤다.

    “어.”

    “파도치는 소리 들어 본 적 없어?”

    “있지.”

    하긴, 원래 아는 것이 사라졌을 때 더 아쉬움이 큰 거였다. 나는 원래 파도 소리 같은 걸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출렁이는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세상이 이렇게나 넓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너는 없잖아.”

    “어?”

    “파도 소리, 들어 본 적 없잖아. 들려주고 싶었는데 아쉽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말갛게 웃는 민주혁의 얼굴이 정말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어쩐지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새삼 민주혁이 푸른색과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시원하고 투명한 바다와 청량한 분위기의 그가 서로 녹아들듯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지금도 신기하고 좋아. 처음 와 보거든.”

    “그래도 너한테 들려주고 싶어. 나중에 나랑 같이 다른 바다에 가 볼래? 시간이 나면. 여기 말고 다른 바다는 뒤틀린 지역이 아니니까 파도 소리도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래.”

    무심결에 대답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여기도 뒤틀린 부분을 원래대로 돌리면 파도 소리가 들릴걸?”

    “으음….”

    민주혁이 시선을 바다로 가져갔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이미 약속한 거야.”

    내 손을 직접 들어 올려서 새끼손가락을 거는 시늉까지 하는 그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선이한. 저기, 보여?”

    송하견이 내 어깨를 살짝 건드려서 나를 불렀다. 그의 손끝을 따라가니 마을이 보였다.

    “보여요. 마을이 바닷가에서 생각보다 떨어진 곳에 있네요.”

    “그래도 이 정도 거리라면 해변 쪽에는 균열이 없을 거야.”

    “아, 균열은 사람이 살지 않는 외곽 지역에 주로 열린다고 했던가요?”

    “응. 그래도 둘러보긴 해야겠지만.”

    “해변 쪽에 열린 균열이 없다면 이 지역에는 균열이 아예 없는 건가요?”

    “아니, 바다 쪽도 살펴봐야 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와 송하견의 담담한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송하견은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송하견이 이런 걸로 농담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했다. 바다를 어떻게 다 살펴본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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