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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27화 (127/150)

127화.

운명보다 너를

“율이 형이 여기서 혼자 쓰러져 있다가 나가는 게 정해져 있는 일이라고요?”

“쓰러져 있는 건 아니고 회복하고 나가는 거지. 형이 용사로 선택받아서 신전으로 갔던 날 본 몇 안 되는 명확한 미래 중에 하나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이게 박율이 순응하는 지점이구나. 박율은 그날 본 미래를 불변의 진리라도 되는 양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가 봤던 미래가 실제로 일어났을 테니까. 나 역시도 미래시를 보고 무력감을 느꼈었다.

그래도 박율은 그렇게 순응해서는 안 된다. 내가 미래시에 어떻게든 저항하면서 모두를 살리려고 노력했으니 그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 아니다.

‘형이 살았으면 좋겠어.’

이유는 오직 이거 하나였다. 선택받은 용사로서 박율이 본 그의 운명이 어떻든 그가 삶의 의지를 가지기를, 적어도 그렇게 포기하고 순응하지는 말았으면 했다.

이것을 바라는 마음이 내 이기심이고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바람을 박율도 원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기심도 욕심도 아니게 된다. 박율의 퀘스트에 적혀 있던 대로 그가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형이 봤던 미래는 미래가 아니게 됐네요. 내가 여기 왔으니까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이한아.”

“또 안 믿는 거 알아요.”

대답이 이렇게 순순히 나올 리가 없었다. 박율을 자리에 천천히 눕히고 그의 눈 위를 손으로 덮었다. 언젠가 그가 내게 해 줬던 것과 똑같이.

“괜찮아요. 나는 어디 안 가니까 이따 다시 얘기해요. 잘 자요.”

고른 숨소리가 들릴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손을 떼어 냈다. 잠든 박율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새삼 그가 체격이 꽤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번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던 그의 팔뚝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찔러 봤다가 생각보다 단단한 감촉에 몸을 파드득 떨었다.

내 팔뚝을 쿡 찔러 보니 마찬가지로 단단했다. 박율처럼 근육 때문이 아니라 말랑한 살가죽 아래로 뼈가 바로 만져져서였다. 그가 나를 잘 먹여도 살이 안 오르는 게 고민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괜한 생각은 그만두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마나 회복 약 약병을 주워 오니 총 세 개였다. 부서진 파편이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네다섯 개쯤 마신 듯싶었다. 아무리 이곳에서 하루가 흘렀다고 하지만 이렇게 많은 마나 회복 약을 마시다니.

‘혼자서 마물을 상대하느라 그만큼 더 무리한 건가.’

마음이 울렁였다. 그가 균열 안으로 혼자 들어가는 미래를 봤다지만 그 미래를 그대로 따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신의 힘을 받은 그만이 균열에 진입하는 게 가능했다고 해도, 처음부터 균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안 됐나?

“율이 형. 순응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요.”

나도 그럴 테니까.

잠들어 있는 박율이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마디를 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마법을 쓸 줄 알았더라면 박율에게 뭐라도 덮어 줬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율이 형이 일어나려면 한참은 더 걸릴 거야.’

여기 들어온 이후로 잠도 못 잤을 것이 틀림없었다. 박율이 잠든 사이 아까 약병을 줍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수상한 틈을 살펴볼 요량이었다.

위험한 건 아니었다. 눈을 가까이 대고 살폈을 때 시스템의 빛처럼 푸른 빛무리가 가느다랗게 퍼져 나오는 것이 보였으니 신의 힘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컸다.

‘비틀린 이 지역을 원래대로 돌리는 키워드를 알 수 있으려나.’

틈 쪽으로 손을 뻗은 순간, 삐이 하고 이명이 울렸다. 귀를 막았다.

웅웅거리며 퍼진 목소리가 주위를 맴돌았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한 귓가에 흐느끼며 간절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스쳤다. 여기에 시스템의 힘이 잘 안 닿는다는 건 신의 힘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불명확하게 들리는 것일 터였다.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내려고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 선명한 목소리가 딱 하나 들려왔다.

살아가 줘.

그 목소리를 끝으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명도 사라졌다. 식은땀에 축축해진 손을 옷에 눌러 닦았다. 이 목소리가 선택받은 용사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살아가 달라는 그 말이 아프게 들렸다.

박율에게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그는 여전히 아까의 바른 자세 그대로 잠든 채였다. 옆에 누워서 그가 깨지 않도록 팔을 허리에 둘러 조심히 안았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차분한 움직임이 닿아 있는 피부로 느껴졌다. 이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니 다른 감각이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선명한 온기, 차분한 호흡, 연한 꽃향기, 그리고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 쿵쿵대며 울리는 빠른 심장 박동은 내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한껏 긴장한 상태였다는 것을 인지했다.

몸에 힘을 풀었다. 박율은 잠들어 있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가 나를 감싸 안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깐만 이렇게 있어야지. 박율이 깰 때까지, 아주 잠깐만.

“더 자도 돼, 이한아.”

고요한 목소리에 잠이 덜 깬 채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물리고 벌떡 일어나 앉아서 상황을 파악했다.

“형, 이제 괜찮아요?”

나는 아까 그 자세 그대로였었고, 박율은 잠에서 언제 깼는지 나를 감싸 안고 있는 채였다. 그가 평소처럼 여유롭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한이 덕분에.”

“아…. 그렇죠. 봐요, 꿈 아니라고 했죠?”

“그렇네.”

박율이 미안하다는 것처럼, 혹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머뭇거리기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좋았어요.”

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형한테 도움이 될 수 있어서요. 그리고….”

“그리고?”

“아니요, 이건 됐어요. 아무튼 좋았어요. 약이 잘 들어서 다행이에요.”

박율이 누워 있어서 뻗친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푸스스 웃었다.

“그래. 고마워.”

왜 똑같이 누워 있었는데 박율은 머리가 여전히 뻗친 부분 하나 없이 찰랑거리고 단정한 걸까. 그새 마법을 쓴 것일지도 몰랐다. 원래 머리가 잘 안 뻗치는 모질일 수도 있었고. 어느 쪽이든 부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형,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요?”

“네가 잠든 지 두 시간쯤. 밖의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 안 지났어.”

“다행이네요. 그러면 이제 나갈까요?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가자. 들어왔던 곳으로 그대로 나가면 돼.”

박율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를 안고 나간다는 것을 극구 말려서 내 발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멀쩡하겠지만 방금까지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던 사람에게 어떻게 나를 들고 가라고 할 수가 있을까.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었다. 박율은 안 그런 척하면서 나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균열의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박율이 입을 열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들어왔어? 다들 네가 이렇게 위험한 데 들어오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텐데. 설마… 아무도 안 말렸나.”

말투가 조금 딱딱해진 듯한데 내 기분 탓일 것이다. 박율이 내게만 유하다는 송하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설마요. 다들 말렸는데 내가 행동이 빨랐던 거죠.”

“그래…. 그랬을 것 같긴 했어.”

박율의 목소리가 그제야 조금 누그러든 듯해서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면 형은 위험할 줄 알면서도 여기 왜 들어왔어요? 미래를 봤다고 해서 꼭 그걸 따를 필요는 없잖아요. 더 안전하고 좋은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고요.”

“형이 봤던 미래는 아까 그 지점으로부터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두 갈래로 나누어졌어. 아까 어마어마한 마물 봤지?”

“봤어요.”

“형이 균열로 들어와서 마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바깥에서 마지막 마물을 처리하자마자 공간에 있던 마물이 한꺼번에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을 거야. 그러면….”

박율은 순간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 나갔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겠지.”

“…그랬겠네요.”

그가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나도 묻지 않고 넘어갔다. 박율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고마워. 그러면 두 번째 선택지로, 형이 균열로 들어와서 마물을 다 처리하고 나간다면 바깥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어떤 선택을 하든 형은 아직 죽지 않아. 해야 할 일이 남았거든. 그러니까 뭘 해야 하는지는 사실 명확하지.”

균열 입구에 거의 도착했기에 박율이 손에 들린 검을 고쳐 쥐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형 말이 맞아요. 선택지가 두 개뿐이라면요.”

그의 몸이 움찔 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선택지가 그렇게 정해져 있을 리가 있나요. 지금도 내가 균열 안으로 들어왔잖아요. 이건 형이 본 미래에 있던 선택지가 아니고요.”

“……그랬지.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도.”

박율은 나를 바라보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가능할 리가 없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신의 힘을 받았기에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운명에 묶이지 않게 되었다는 신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운명에 묶여 있다는 의미도 됐다.

박율의 손목을 쥔 채로 다른 쪽 손바닥을 균열 쪽으로 가져다 댔다.

“내가 가능하게 만들게요. 어떻게든 할 거예요. 그러니까 형은 나를 믿어 주세요.”

“운명보다 너를 믿으라는 말이야?”

“네.”

부러 당당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봤다. 내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박율도 늘 그랬던 것처럼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이미 믿고 있어.”

웃음기 담긴 목소리였으나 박율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대로 손목을 잡아끌며 균열을 통과했다. 그는 여기 들어올 때처럼 검을 찔러 넣는 대신 내가 이끄는 대로 균열을 빠져나왔다.

텅 비어 있던 광활하고 고요한 균열에서 빠져나오니 오감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박율이 봤던 미래처럼 며칠간 균열 안에 혼자 고립되어 있었더라면, 목숨은 잃지 않았더라도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율이 형은 그걸 몰랐을까.’

내가 균열 안에서 몇 시간을 있었지만 이쪽의 시간으로 따지면 몇 분쯤 지난 것이니 아직 다들 정신없이 마물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옆에서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박율을 올려다봤다.

박율은 알았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후유증으로 힘들어하는 미래까지 봤음에도 순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썼다.

“이한아, 왜 그래?”

그가 내 시선을 느끼고 나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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