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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26화 (126/150)

126화.

많이 참았는데

고민하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방법이 있다면 당장 시도해 봐야 했다.

“형. 우리가 해야 할 게 있어요.”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며 약이 담긴 통의 뚜껑을 열었다. 박율은 눈을 감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의식을 붙잡고 있는지 거의 잠겨 가는 목소리로 ‘그래.’라며 제대로 대답했다.

“나한테 약이 있어요. 내가 그걸 물고 있다가 형한테 먹여 주면 형은 그걸 씹지 말고 삼켜야 해요.”

“…….”

“약이 사탕처럼 동그랗게 생겼는데, 크지 않아서 삼키기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듣고 있어요?”

대답이 없기에 이미 정신을 잃었나 싶었는데 그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는 눈동자만 굴려서 나를 멍하게 바라봤다.

박율은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어려울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아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깜빡임조차 없이 내게로 향한 시선이 깊어 보였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약이 들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지금은 박율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 듯했지만, 약을 왜 내가 물고 있다가 먹여 주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조급함에 떨리는 손으로 박율의 어깨를 조심히 쥐었다.

“잠깐 일어날 수 있어요?”

“…내가 이런 걸 바랐나.”

박율이 자조하듯이 웃더니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얼핏 체념한 표정이 스친 것 같아서 몸이 굳었다.

“뭘 바라요?”

“이런 꿈까지 꿀 정도였구나. …그래.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사그라드는 혼잣말을 듣고 깨달음이 스쳤다. 이런 꿈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지금 순간을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그다지 의욕을 보이지 않는 거겠지.

박율이 약을 먹는 데 협조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부드럽게 약을 삼키도록 도와주는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그와는 달리. 문득 내게 입을 맞춰 왔던 박율의 차분한 숨소리가 떠올라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거야말로 꿈일 수도 있는데.’

생각을 재빨리 털어 냈다. 동요하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지금 꿈 아니에요.”

“그래. 꿈이 아니구나.”

“안 믿는 거 알아요. 됐어요, 꿈이라고 생각하든 현실이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으니까. 혹시 조금도 못 움직이겠어요? …나는 형한테 약을 어떻게 넘겨줘야 할지 모르는데.”

마지막 말은 작은 목소리로 한 혼잣말이었는데 박율은 내게만 집중하고 있었는지 그걸 기어코 들었다.

“그냥 줘도 돼. 알아서 삼킬게.”

“안 돼요. 내가 먹여 줘야 해요.”

“…왜?”

“……그렇게 하고 싶어서요.”

“이래 놓고 꿈이 아니라고.”

“…사실 내가 입에 잠깐 머금고 있어야 약효가 있대요.”

결국 솔직하게 말했음에도 박율이 어이없다는 듯이 큭큭 웃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쉽게 믿지 못할 만하긴 했다. 세상에 그런 원리로 효과가 생기는 약이 어디 있겠는가. 속으로 시스템을 원망하고 있을 때 박율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가슴께를 눌렀다.

“형, 괜찮아요? 많이 안 좋아요?”

“괜찮아. 이한이도 이제 자자. 형도 잠깐만 잘게.”

안 괜찮았다. 가물가물 멀어지는 듯 몽롱한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박율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까.

여기서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었다. 이미 지체할 만큼 지체했으니까. 겉으로 표를 안 낼 뿐이지 그의 몸 상태는 한계일 게 뻔했다. 박율의 반듯한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내가 이러는 게… 싫은 건 아니죠?”

약을 입에 넣으며 박율을 흘끔 내려다봤다. 그가 싫다고 해도 강행할 작정이었지만 예의상 조심스레 물은 것이었다.

노력해 보겠지만 정 안 되면 입에 물고 있던 약을 손에 뱉어서라도 그의 입에 넣어 줘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가 찝찝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하염없이 대화만 나누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형이 싫어서 이러는 것 같아?”

“글쎄요. 말을 안 해 주면 모르죠.”

동그란 약은 사탕을 먹듯 빨아 먹은 것이 아님에도 묘하게 맛이 느껴졌다. 의외로 달콤한 맛이었다. 그나저나 이걸 삼킬 수 있으려나. 겉보기에는 크지 않았는데 막상 입에 넣으니 보기보다 큼지막했다.

‘지금쯤이면 시스템이 조건으로 건 시간이 다 됐겠지.’

3초는 짧았다. 이제 남은 건 박율에게 전해 주는 일뿐이다. 긴장되는 마음에 약을 입 안에서 굴렸다. 딱딱한 약이 이와 맞부딪히며 달각, 하는 소리를 냈다. 박율의 목덜미로 손을 조심히 받치고, 누워 있는 그에게로 몸을 숙였다.

“…좋아서.”

“네?”

순간 눈을 뜬 박율과 시선이 정확하게 맞았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는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살짝 찌푸렸던 미간이 부드럽게 펴지고,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가 서서히 번지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면 이한이를 어떻게 봐야 하나.”

힘이 빠져서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은 나른한 목소리가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목덜미를 감쌌다. 마나 회복 약 부작용 때문인지 마력 고갈 때문인지 뜨거운 그의 살결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이렇게 일어나도 돼요…? 괜찮아요?”

“형은 많이 참았는데.”

마주한 시선에서 꾹꾹 눌러 담은 욕망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드러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지만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것처럼.

“…읍.”

입술이 맞닿았다. 그의 혀가 순식간에 내 안으로 침범했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내가 아까부터 입에 물고 있던 동그란 약을 한구석으로 몰아 두고는 내 혀를 옭아매듯이 움직였다.

내가 놀라지 않도록 느릿하게 입 안을 훑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간지러웠다. 아니, 간지러운 것보다 좀 더….

“흐, …읏.”

허리에 꼿꼿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가 감싸고 있던 내 목덜미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쓸었다. 물론 탐색하듯이 내 입 안을 훑고 있는 건 여전했기에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물을 먹여 주던 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더 깊고, 더 농밀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시끄럽게 울렸다. 제발 그에게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맞아, 약.’

까맣게 잊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박율의 어깨를 두어 번 톡톡 쳤다. 박율이 버티고 있었더라면 나는 절대 밀쳐 내지 못했을 테지만, 그는 지체하지 않고 물러났다.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진정하자. 잠깐 잊었던 것뿐이지 이건 치료를 위한 일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할 때 박율이 눈을 접어 웃었다. 아쉬움이 얼핏 담겨 있던 그의 눈이 곱게 휘었다.

내 안색을 살피며 ‘싫었어?’ 하고 묻는 듯한 그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약.”

숨을 고르고 겨우 한 글자를 내뱉었다. 박율이 번들거리는 내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다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입을 맞춰 왔다. 아까보다 좀 더 조심스럽고 세밀한 움직임이 자극적으로 느껴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박율은 내 호흡이 가빠지지 않도록 중간중간 신경 써서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맞붙였다.

지금 박율은 이걸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었나? 한낱 꿈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소중하게 대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져서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간질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박율은 내가 자극적인 감각에 더 이상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자 구석으로 밀어 뒀던 약을 드디어 가져가고는 몸을 물렸다.

“삼킬까?”

그의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그건 마나 회복 약 부작용이나 마나 고갈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조금 거칠게 호흡하는 그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고 해도 나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박율은 힘을 풀고 내가 가져다 댄 손에 얼굴을 가만히 기댔다. 비스듬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아까 다정하게 잡아먹을 것 같았던 그의 움직임이 떠올랐다.

서서히 안정되어 가던 심장이 다시 터질 듯이 뛰어서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씹지 말고… 삼켜야 해요. 그냥 삼킬 수 있겠어요? 아니면 물이라도….”

“…아.”

박율이 자기 목을 감쌌다.

“왜요? 아파요?”

“아니. 목으로 넘기니까 녹아서 사라졌어.”

박율의 상처가 하나하나 아물어 갔다. 작은 상처든 큰 상처든 흉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시간을 돌린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졌다. 약효가 있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속은 괜찮아요? 이쯤이 아팠을 것 같은데.”

내가 라엔의 마나 고갈 부작용을 가져왔을 때 명치 부근에 통증이 일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박율의 명치께에 손을 올리고 살살 쓸자 그가 내 손목을 사뿐히 감쌌다. 그의 눈이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정말 괜찮아졌네.”

“졸려요? 상처가 갑자기 치료되면서 그런가 봐요. 좀 자요.”

이 균열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고 했다.

밖에서 걱정하고 있을 모두를 생각한다면 빠르게 나가는 게 맞았지만, 이곳에서의 하루가 밖에서의 한 시간이라면 여기서 몇 시간 자는 것쯤이야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박율이 상태를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가는 편이 나을 터였다.

“누울래요?”

“이한아.”

눕혀 주려고 손을 뻗기가 무섭게 박율이 나를 안았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

통증 때문이었을까 현실 감각이 없어서였을까, 박율은 평소의 침착하고 꼿꼿한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반응이 조금씩 늦는 것 같았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냈다. 입가에 그린 듯한 웃음을 지은 채였음에도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솔직한 박율의 모습을 봐서 좋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던 벽이 허물어지고 비로소 그에게 손을 뻗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한테 울어도 된다고 말하던 박율도 그런 기분이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나조차도 몰랐던 내면의 벽을 허물어서 그 안쪽 깊숙한 곳까지 손을 뻗어 나를 달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거라면 나는….

“내가 일어나면 너는 이 자리에 없겠지.”

박율이 잠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형을 두고 갈까 봐요?”

“아니. 전부 꿈이니까.”

“아까부터 형이 왜 그렇게 꿈이라고 확신하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에는 아무도 안 와.”

내게 기대고 있던 박율이 그 상태 그대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한 금발이 뺨을 스치고 연녹색 눈이 내 얼굴을 오롯이 담았다. 그는 나를 놓치기 싫다는 듯이 안은 상태로 쓰게 웃었다.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여기는 내가 혼자 들어와서 혼자 나가야 하는 곳이야.”

이건 또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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