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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25화 (125/150)
  • 125화.

    용사님, 찾아갈게요

    눈앞에 절로 생겨난 상태 창은 이제 나를 재촉하듯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 정해져 있다는 건 이런 뜻인 걸까.’

    신은 내게 정해진 길은 없지만 정해진 목적지는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코앞에 들이밀어지는 이 선택지가 내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겠지. 내가 아주 오래전에 퀘스트를 성공하고 이 보상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의 이런 상황이 정해져 있던 걸까.

    ‘그렇다고 해도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어.’

    균열 안으로 홀로 사라진 박율을 찾고 싶다는 건 내 의지였다. 그것이 본래 내가 해야 할 일로 정해져 있든 아니든 그다지 신경을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경계해야 하는 건 운명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원하지도 않는 선택을 하는 상황일 테니까.

    「보상, ‘용사님, 찾아갈게요(1회)’를 사용합니다.

    찾아갈 용사님이 누구인가요?」

    ‘박율.’

    내가 대상을 선택하자마자 눈앞에 파란 빛 알갱이가 점점이 떠올랐다.

    흙먼지를 일며 공격해 오는 마물과 마법을 쓸 때 생기는 여러 색의 빛으로 주위가 온통 정신없는 와중이었다. 파란 빛 알갱이는 그 사이에서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뭇 이질적으로 보였다.

    「‘시공간의 균열’로 안내합니다.

    균열에 입장할 경우 시스템과의 연결이 끊길 수 있습니다.」

    빛 알갱이는 균열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자 바로 옆에 있던 민주혁이 나를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뭘 그렇게 봐? 설마 균열을 넘어가야겠다는 생각 같은 걸 하는 건 아니지.”

    짐작은 했지만 역시 시스템의 빛은 나에게만 보이는 게 맞았다.

    “방금 신력을 써서 율이 형을 찾았어. 형이 있는 쪽으로 이어진 길이 보여.”

    “뭐? 언제부터 그런 걸 할 수 있었는데?”

    “지금 딱 한 번만 가능한 거야. 운이 좋았어. 이런 건 전에도 못 했고 앞으로도 못 할 거거든.”

    “그래서 박율 형님한테 가겠다고?”

    어설픈 변명이었지만 민주혁은 그런 데 관심을 두지 않는 듯 내게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응. 형이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었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일 거야.”

    “왜요? 이한까지 균열을 넘어갈 이유가 없잖아요.”

    “율이 형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이유는 그걸로도 충분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형 데리고 멀쩡하게 돌아올게요.”

    마지막으로 민주혁과 라엔, 그리고 송하견을 차례로 치료해 준 후에 균열 앞으로 달려갔다. 마물이 이쪽을 공격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선이한!”

    “다녀올게요.”

    송하견과 시선이 스치듯이 맞았다. 균열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아무런 저항 없이 손목까지 푹 들어갔다. 그걸 확인하고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균열을 넘어가서 마주한 곳은 우주 한가운데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공간이었다. 주변이 텅 비어 광활하고 공허했다. 발아래도 뻥 뚫려 있었다.

    시스템과의 연결이 끊길 수 있다더니,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눈앞에 보이던 상태 창이나 길을 표시해 주던 파란 빛 알갱이는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박율을 멀지 않은 곳에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율이 형이 균열을 넘어간 지 한 시간쯤 지났으니까 별일 없겠지.

    균열을 넘기 전에 얼핏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시스템이 나를 이쪽으로 이끄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길 예정이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박율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들어간 걸 보면 그도 뭔가를 알고 있거나 이미 대책이 있는 상태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도 은연중에 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틀렸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게 다 뭐야.”

    검고 끈적한 마물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박율이 꼿꼿하게 서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박율은 온통 새까만 곳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물이 모여드는 중심에서 마법을 써 마물을 공격하고, 묶어 두고, 검을 들어 핵을 파괴하기를 반복했다.

    내가 지금 본 것만 해도 대엿 개였다. 핵이 파괴되자 마물이 회색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물은 숨 막힐 정도로 빽빽하게 모여들고 있었다.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저 마물을 뚫고 그에게로 다가가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설령 간다고 해도 박율에게 나는 방해만 될 것이다. 거리상 박율의 얼굴을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으나 이미 그는 한계에 다다랐을 거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때 박율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약병?’

    검푸른 액체가 담겨 있는 조그만 약병이 익숙해 보였다. 내가 저걸 언제 봤더라.

    박율은 액체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고는 한계인 듯 보였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포획 마법을 써서 그 많은 마물의 사 분의 일 가량을 전부 묶어 두었다. 그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묶여 있는 마물의 핵을 전부 파괴했다.

    검을 박아 넣고 한동안 숨을 고르는 듯 그 자리에서 움직임이 없던 박율이 또다시 아까와 같은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포획 마법을 써서 한 무리의 마물을 묶어 두고는 핵을 파괴하는 걸 반복했다.

    ‘이런 식으로 마물의 수를 줄여 나가는 중이구나.’

    전투가 길어질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그일 테니까 빠르게 처리하는 편이 낫긴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몇 병째 마시고 있는 저 약은 대체 뭘까. 자꾸만 신경이 쓰여 신중하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나 회복 약.’

    맞아, 그거였다. 언젠가 라엔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박율이 마나 회복 약을 마신 거라면 그가 한계인 것처럼 휘청이다가도 넓은 범위의 마법을 곧잘 썼던 것도 설명이 됐다.

    ‘그런데 마나 회복 약을 저렇게 많이 마셔도 되나.’

    이제는 몇 남지 않은 마물을 상대하고 있는 박율을 바라봤다. 긴장에 입이 바싹 말라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마물의 핵에 검을 박아 넣었을 때, 마물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고 그 자리에 박혔던 검은 바닥에 힘없이 댕강 떨어졌다.

    박율이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형!”

    바닥에 붙은 듯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던 다리가 그를 향해 쉼 없이 뜀박질을 했다. 박율은 쓰러진 그대로 모로 누운 채 미동도 없었다.

    ‘얼마 안 걸릴 거라고, 멀쩡하게 돌아오겠다고 장담했잖아. 지금 이 상태인데 어떻게 그래.’

    몸이 떨려 오고 울컥 차오르는 눈물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형, 정신 차려 봐요.”

    박율의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를 바로 눕히려 어깨를 만진 순간 그가 약한 신음을 뱉으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닿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그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올려 식은땀을 닦아 냈다. 열이 높았다. 그리고 치료하겠느냐고 묻는 상태 창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스템과 연결이 끊긴다고 하더니.’

    하여튼 시스템은 정작 필요할 때는 도움이 안 됐다. 치료하기도 쓸 수 없고 가져오기도 쓸 수 없으면 나는 이 상황에서 대체 뭘 할 수 있지? 내가 쓰는 건 다 시스템의 힘이었다. 내가 신력을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율이 형. 내 목소리 들려요?”

    박율이 아파하는 것 같았기에 몸을 흔들어서 의식을 깨울 수도 없었다. 내가 그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몇 번을 더 간절하게 부른 후에야 그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초점을 잃은 연한 녹색 눈동자가 흐릿해 보였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정신이 좀 들어요? 지금 뭐가 필요해요? 어떻게든, 뭐든 할게요.”

    “……꿈이구나.”

    “잠깐, 다시 눈 감지 말고요. 꿈 아니에요. 나 봐요. 의식 놓지 말아요.”

    “…머리 아파. 조용히, 그냥 이대로 잠깐만 있자.”

    박율이 손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더니 도리어 나를 다독였다.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게 훤히 보이는데도 그러니까 목이 턱 메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까. 시스템은 어째서 나를 여기로 보낸 거지. 그가 이렇게 희생하고 있다는 걸 똑똑히 보라고?

    “왜 울어.”

    박율이 팔을 뻗어서 내 눈가를 살살 쓸었다. 방금까지 고통에 살짝 찡그리고 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고통을 숨기며 애써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게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꿈이라면서 왜 달래 줘요.”

    “네가 우니까.”

    “꿈인데도요?”

    “응. 그래도.”

    소매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우는데…. 형은 지금 뭐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는 거예요? 해결할 방법은 없나요?”

    “시간이 지나면 회복돼.”

    “얼마나요?”

    “하루나 이틀.”

    그의 목소리가 고통 때문에 잠겨 있었다. 이 상태로 하루나 이틀을 기다려야 한다고?

    “그렇게는 안 돼요. 얼마 안 걸린다면서, 흐윽, 멀쩡하게 돌아올 거라면서요.”

    “바깥과 시간이 달라. 여기에서 하루가 바깥에서는 한 시간쯤.”

    “뭐라고요…?”

    그러면 내가 바깥에 있을 때 이미 한 시간이 지났으니까 박율은 적어도 여기서 하루쯤은 혼자 전투하며 버텼다는 말이 된다.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무리했을까.

    아니, 그 전에 박율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 장소에 대해서 알고 있나? 의문이 하나둘 늘어 갔지만 지금은 내 궁금증을 해소할 때가 아니었다. 박율을 어떻게든 회복시킬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지금 상태가 안 좋은 건 마나 고갈 때문이에요? 아니면 마나 회복 약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그런 건가요?”

    “…둘 다.”

    맙소사. 전에 라엔의 마나 고갈 상태를 잠깐 느꼈을 때의 고통은 정말 끔찍했다. 다시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상태뿐만 아니라 마나 회복 약을 많이 쓴 부작용도 같이 겪고 있다니.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쓰려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 박율은 그런 내가 귀엽기라도 하다는 듯이 키득 웃었다. 그러나 곧이어 신음을 흘리며 눈을 꾹 감았다.

    “…이한아. 형 잠깐만 자고 일어날게. 괜찮으니까 울지 마.”

    의식을 잃어 가는 건지, 아니면 휴식을 취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박율은 숨을 몰아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자기가 꿈이라고 했으면서 나를 달래 주는 건 뭐야.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서 손을 가슴께로 올려 움켜쥐었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회복 약.’

    맞아, 그게 있었다. 지금은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그건 일전에 보상으로 받아 둔 거니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으니 시도해 봐야 했다. 급하게 품에서 사탕처럼 생긴 알약을 꺼냈다.

    ‘이걸 내가 입에 몇 초간 머금어서 활성화해야만 한다고 했지.’

    그래서 나는 이걸 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약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 입에 넣었다고 꼭 내가 삼키라는 법은 없었다. 박율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내게 물을 마시게 해 줬던 것처럼.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방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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