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방향만 다를 뿐이지
라엔은 텔레포트한 장소에서 그대로 허공에 뜬 채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로브를 틀어쥐었다. 우거진 식물 사이로 보이는 새까만 균열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상황이 쉽지 않겠는데.”
“여기에 있는 식물 전체에 마물이 스며들어 있는 걸까요?”
내 물음에 박율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확인해 봐야 알 것 같네. 라엔아, 가능하겠어? 아니면 형이 해도 괜찮고.”
“괜찮아요. 바로 할게요.”
“그래, 부탁할게.”
뭘 한다는 걸까. 라엔은 내가 묻기도 전에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는 한 손으로 내 눈가를 덮었다.
“잠깐만 눈 감고 있어요.”
아래쪽에서 밝은 빛이 반짝 터졌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그가 가려 주지 않았다면 필시 따가웠을 만큼 밝았다. 라엔이 쓴 마법인 듯한데, 내 눈을 가려 주면 자기는 어떻게 한 거지?
급하게 라엔 쪽을 돌아보자 어쩐지 그가 더 놀란 것처럼 나와 시선을 마주해 왔다.
“어… 왜요? 불편했나요?”
“형은 눈 괜찮아요?”
“아, 괜찮아요. 마법을 써서요.”
“그렇구나…. 나는요?”
혼자서 수긍하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재빨리 물었다.
“이한에게도 같은 마법을 걸었는데요. 눈이 아팠나요?”
걱정스럽게 되묻는 라엔을 보자 조금 민망했다. 그가 어련히 내게 잘해 줬을까. 방금 그건 괜한 물음이었다.
“괜찮았어요. 그냥 형이 손으로 직접 가려 주길래요.”
“아, 음…. 더 확실하게 하려고요.”
라엔이 내 어깨를 손끝으로 덧그리듯이 만지작거리다가 변명하듯이 내뱉고는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아래쪽을 한번 볼래요? 리더 형 말처럼 상황이 쉽지 않겠네요.”
“형, 식물이 저렇게 빨리 다시 자라나는 게 가능한 일이었나요?”
군데군데 찢기고 베여서 뜯긴 가느다란 나무줄기와 덩굴이 느리긴 해도 눈에 띌 정도의 속도로 자라나며 본래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마물이 스며들어 있어서 그래.”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핵을 찾아서 파괴해야 하는 건가요?”
“잘 알고 있네. 그전까지 손상된 부분은 저절로 복구될 거야.”
“방금 내가 쓴 건 얕은 공격을 넓은 범위에 하는 마법이에요. 그래서 복구되는 속도가 빨라 보이는 거고, 전투하면서 공격 마법을 쓸 때는 저것보다는 조금 느려요.”
옆에서 노트를 꺼내 든 송하견이 말을 이었다.
“기록해 둔 걸 보면 처음 둘러봤을 때 이 주변에는 독이 있는 식물이 없었어. 정확한 건 다시 봐야 하겠지만.”
“그랬지, 형도 기억나. 그래도 네 말처럼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는 있겠다.”
“금방 다녀올게.”
“아니, 하견아. 너는 여기에 있어. 저번처럼 네가 알려지지 않은 독에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해. 주혁아, 형이랑 다녀오자.”
“네, 형님.”
“라엔이는 여기서 아래 상황을 계속 살펴봐 줘. 하견이는 혹시 모를 상황이 일어났을 때 바로 수습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옆에서 이한이도 잘 챙겨 줘.”
아래쪽으로 향했던 박율과 민주혁은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돌아왔다.
“처음 살펴봤던 것처럼 독이 있는 식물은 없습니다.”
“균열이 밀집해 있는 편이니까 그것만 조심하면 되겠어.”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고 깨달은 것은 독의 유무가 전투 속도와 꽤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독초 사이에서 싸워야 했다면 몇 달은 훌쩍 넘게 걸렸을 전투가 한 달이 조금 지날 무렵 마무리되어 갔다. 이제 이곳에 남은 건 단 하나의 균열뿐이었다.
“그동안 봤던 균열 중에서 가장 큰 것 같습니다.”
“사람도 들어갈 정도네요.”
“만약의 상황이 있으니 가까이 가지는 않는 게 좋겠어.”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옆에 있는 라엔의 팔뚝을 손끝으로 가볍게 콕콕 찍어서 그를 불렀다.
“형, 균열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게 될 수도 있어요?”
“아, 내가 괜한 말을 했네요. 그런 전례는 없어요. 애초에 균열은 이쪽으로 마물이 들어오는 통로고, 이쪽에서 바깥쪽으로 뭔가가 넘어간 적은 없으니까요.”
“그러면 다행이에요.”
“그래도 리더 형 말 들었죠? 가까이는 가지 말아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나와 용사들의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내가 그들을 뚫고 균열에 다가갈 리도 없었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서는 송하견이 해독약을 만들 필요가 없었으므로 후방에 빠져 있을 필요 역시 없었다. 바꿔 말하면 나 역시도 후방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모두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게 치료하기가 더 편하기도 해.’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를 방어할 수단이 있었더라면 후방에 빠져 있는 편이 용사들도 편했을 것이다. 전투하며 나까지 신경 쓰기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럼에도 내가 가운데 위치하는 건 마법을 아예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민주혁이 내게 방어 마법을 여러 겹 둘러 주기는 했지만 그건 돌발 상황에는 무력했다.
“이제 진입할게. 모두 준비해.”
마른 잎이 바삭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식물의 줄기가 뻗어져 왔다. 민주혁은 그걸 마법으로 옭아매서 묶어 두고 박율이 거기에서 마물의 핵을 찾아냈다. 핵이 없는 경우에는 민주혁이 그대로 묶어 둔 채 내버려 뒀다.
전투가 이어지던 중에 송하견을 치료하기 위해 그를 바라봤다. 순간 그의 뒤쪽에서 가시 돋친 식물의 줄기가 빠르게 뻗어 왔다.
‘사각지대다.’
송하견은 눈치채지 못한 듯 그쪽으로 별다른 공격이나 방어를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행동이 앞섰다. 나는 어느새 그의 뒤쪽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식물의 독에 당한 뒤 고통받던 송하견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송하견이 부상당하지 않도록 구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충격을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선이한.”
“…….”
“눈 떠. 괜찮아.”
나는 송하견의 품에 폭 안긴 채였다. 그는 순식간에 나를 붙잡아 끌어당겨서 보호하듯이 안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던 송하견이 내 안색을 살피더니 애써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숨 쉬어. 아무 일도 없었어.”
“……네.”
“그쪽으로 공격해 오는 거 알고 있었어. 방어할 거였고.”
쿵쾅대는 내 심장 소리가 맞닿아 있는 몸으로 그에게까지 느껴질 것 같았다.
“네가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다치면, 나는….”
송하견은 짓씹듯이 중얼거리고는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선이한. 네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해. 함부로 나서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알았다고 제대로 대답하고 나서야 나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마물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자 박율이 지나가듯이 물었다.
“주혁아, 포획 마법에는 마나가 많이 들어가는 편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포획 마법 때문에 마나가 부족해진 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어 마법 같은 경우에는 마나를 잘 조절해서 쓰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 해 줘. 라엔이는 전방 쪽을 더 집중해서 공격해 줄 수 있지?”
“네, 가능해요. 왜요? 잠깐 휴식을 취해야 한다면 그동안은 우리가 맡을게요. 여기 식물에는 독이 없으니까 마물을 묶어 두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무리해서 핵을 바로 처리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 고마워. 하견이는 지금 하는 것처럼 다음 전투를 위해서 잘 기록해 두고, 틈을 파고드는 마물을 잘 처리해 줘.”
“응.”
“이한이도. 지금까지 적당한 때에 잘 치료해 줬으니까, 형이 안 보고 있다고 너무 몸을 혹사하지 말고.”
“…알았어요.”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박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이제껏 전투 중에 잠깐이라도 빠져 있던 적이 없었다. 내가 그를 치료하는 걸 놓친 것도 아니었으므로 특별히 몸 상태가 나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왜?’
순간 박율이 뒤를 돌아봤다. 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러면 믿고 맡길 수 있겠네. 형은 해야 할 게 있어. 중요한 일이야.”
“잠깐, 율이 형…!”
“금방 멀쩡하게 돌아올 거야. 확신할 수 있어. 그때 변수가 생기지 않으려면 너희가 이 상황을 포기하지 말아야 해.”
‘믿을게.’라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끝으로 박율은 균열 한가운데 검을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빨려 들어가듯이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들 전투 중인 것도 잠시 잊고 박율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가 라엔이 균열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균열은 뻥 뚫린 것처럼 보였지만 라엔의 손은 뭔가에 막힌 것처럼 균열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못 넘어가요. 이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아니니까요.”
“박율 형님은 넘어가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못 넘어간다는 말이에요.”
“…형은 선택받은 용사니까.”
“신의 힘을 직접 받았다는 거. 고작 그거 때문입니까.”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민주혁이 돌연 내 손목을 쥐어 잡았다.
“선이한. 안 돼.”
“뭐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민주혁의 손목에서 손을 슬슬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율이 형처럼 신의 힘을 받았어. 해 볼 가치는 있잖아.”
“아니, 넘어가는 걸 성공하더라도 그냥 네가 위험해지는 것뿐이지. 안에서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잖아.”
민주혁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나는 미래시를 본 것도 아니었다. 박율은 아마 그가 장담했던 것처럼 멀쩡히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래도 꼭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무런 근거 없는 생각이야.”
“지금 율이 형은 균열 바깥쪽에 혼자 넘어가 있어.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고 싶지 않아. 아니면 나랑 손을 잡은 채로 균열에 대 보는 건 어때? 그거라면 괜찮잖아. 같이 들어가게 될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야.”
가만히 생각하던 송하견이 덧붙였다. 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주혁이 송하견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형님.”
“응.”
“지금 선이한을 저 안으로 들여보내자는 말은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당연히 아니지. 그래도 선이한이 가야겠다면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같이 가도 안 됩니다. 저 안에서 뿔뿔이 흩어질지 어떻게 압니까? 넘어가서 박율 형님을 만나지 못하면요?”
“해당 균열에서 빠져나온 마물을 모두 처리하면 균열이 닫혀. 그 말은 하나의 균열이 그 자체의 성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야. 흩어지더라도 만날 수 있고, 박율 형도 찾을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도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에 따라 서로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균열을 넘어가자마자 위치가 뒤틀릴 수도 있고요. 아니, 그것보다 그냥 저 안으로 들어간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박율 형이 망설임 없이 들어간 걸 보면 다시 나올 출구도 알고 있다는 거야. 여러 개의 균열이 연결되어 있을 리가 없으니 출구는 입구와 같을 테고. 그러니까 형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안에서 길을 잃지는 않겠지. …그래도 선이한, 나도 너를 말리고 싶어.”
송하견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긍정하듯 민주혁은 말없이 내 손목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내가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지는 듯했다.
그렇지만 내 머릿속 어디선가 지금 반드시 박율을 찾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건 민주혁이 말했던 것처럼 근거 없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게 직감이라고 느꼈다. 근거는 없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그런 직감.
라엔은 주위로 몰려오는 마물을 차분하게 공격하며 말을 이었다.
“이론상으로는 꽤 신빙성이 있어요. 그렇지만 이한, 아까 리더 형이 했던 말을 기억해 봐요. 형은 우리에게 뒷일을 맡기고 갔어요.”
“…네.”
“그러면 리더 형이 정말로 바라는 게 무엇일지도 생각해 봐요.”
다 알고 있었다. 나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알았고, 논리적으로 따져볼 줄 알았다. 그런데도 박율을 균열 안으로 혼자 들여보내는 게 싫었다.
“미안해요. 나는 율이 형에게 가야만 할 것 같아요. 나도 율이 형처럼 신력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라엔은 쓰게 웃었다.
“들어가면 리더 형을 만날 확률이 높아요. 나도 하견 생각에 동의하거든요. 주혁도 말만 안 했지 동의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혹시라도 아니면요?”
“그래. 들어가서 미아가 되면 어떻게 하려고.”
송하견까지 거들자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대책이 없긴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고집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강한 직감을 무시하고 일단 수긍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지났을 무렵 눈앞에 상태 창이 떠올랐다.
「보상, ‘용사님, 찾아갈게요(1회)’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내가 이런 보상을 받았던가. 아니, 그것보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상태 창을 강제로 눈앞에 보여 주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