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퀘스트 성공
몸을 움직여서 송하견을 밀어 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게서 순순히 밀려 났다.
나는 양손을 들어서 그의 뺨을 있는 힘껏 감쌌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송하견이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세게 때렸나?’
조금 당황했지만 송하견은 뺨이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놀란 것 같았다. 그렇다면 괜찮았다. 뺨을 감싼 손을 놓지 않고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얼굴을 들이밀 듯이 가까이 했다. 무의식적인 반응인지 그가 몸을 슬쩍 물렸다.
“형, 들어 봐요. 내가 형을 치료해 주고 그랬던 게 형한테는 희생으로 보일 수 있겠죠. 내게는 별거 아니었지만요. 그런데 형은 왜 형이 나한테 해 준 건 생각 못 해요? 형은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 줬나요?”
“…아니.”
“그래요. 그리고 사실 그런 건 따질 필요 없어요. 하나만 물어볼게요.”
송하견이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아서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아, 설마 내가 뺨을 소리 날 정도로 때려서 붉어진 건 아니겠지. 이 생각은 빨리 지워 냈다.
“내가 형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없었으면 좋겠어요? 형이 진짜로 바라는 건 뭐예요?”
“…….”
“다른 건 그다음에 생각해요. 바라는 걸 쫓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여러 가지 따질 시간이 있나요.”
부러 짓궂게 웃자 송하견이 뒤로 물리던 몸을 일순 굳혔다. 그러고는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에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었지. 그때는 흘리듯이 대답했지만.”
“그랬죠.”
“너를, 원하고 있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줄곧.”
“…네?”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기껏해야 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줄 알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었지?”
이번에는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눈을 휘어 웃었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환한 웃음이었다.
“그냥 알고 있으라고. 네가 기어이 말하게 한 거니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송하견이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안다. 함께해 온 시간 동안 내가 그에게 정든 만큼 그도 나에게 정들었을 테고,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래, 그런 뜻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왜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 해독은 다 되었을 텐데도 이유 없이 괜히 열이 올라서 눈가가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빠밤, 하는 화려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려와 저절로 몸이 굳었다.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 성공!
짤막한 문장이 적혀 있는 상태 창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송하견의 뺨을 붙들고 있던 손이 스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자 그가 내 팔목을 다시 잡아챘다. 나는 상태 창에 정신이 팔려서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이 퀘스트를 성공하다니.’
별다른 보상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았지만 아쉬운 마음은 한 자락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마지막으로 떴던 퀘스트 창은 오류처럼 보상도 페널티도 없었다. 어쨌든 나는 이 퀘스트 성공 문구를 본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충격받은 표정 지을 거야?”
“아니요, 좋아서요.”
“뭐가 좋은데.”
송하견은 내가 좋다고 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조금 쓰게 웃었다. 환하게 웃으며 몸을 날려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냥 지금 이 상황 전부요.”
하마터면 입술끼리 세게 맞부딪쳐 피멍이라도 들 뻔했다. 송하견이 손바닥으로 내 입술을 가리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일어났을 일이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었다. 좀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잠깐 놀랐던 송하견은 금세 표정을 풀고 나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며 뭔가를 참아 내는 것처럼 웃었다.
“이건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안으려고 했던 건데 너무 흥분했어요.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사과할 필요 없는데.”
송하견이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손사래를 쳤으나 그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러고는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숨이 내 이마에 닿았다.
“싫으면 말해.”
“…….”
“그럴 것 같았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 송하견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뜨거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잔상이 길게 남아 선명했다.
“이제 제대로 설명해 봐. 이 상황이 전부 좋다는 게 무슨 뜻인지.”
“나도 멀쩡하게 일어났고, 형이 솔직하게 말하는 걸 듣기도 했잖아요.”
“그게 끝?”
뭔가 더 말할 게 남았나? 내가 입을 다물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자 송하견이 잠깐의 공백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래. 이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어. 지금은 이걸로 만족할게, 선이한.”
“네?”
무슨 만족? 송하견은 어리둥절하게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생각해 보니까 송하견이 원하고 있던 게 나라고 했잖아.’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나도 머쓱하게 따라 웃었다.
“이한! 일어났네요. 오늘 중으로 깨어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다행이에요.”
곧이어 텐트 안으로 텔레포트한 라엔과 민주혁, 그리고 박율까지 치료했다. 그들은 내가 상처를 그대로 가져오는 게 아니라 치료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치료를 받았다. 다음부터는 치료하기 쿨타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몸은 좀 어때?”
“해독약 덕분인지 이제 완전히 괜찮아요. 고마워요.”
박율이 내게 직접 물을 먹여 줬던 기억은 꿈일까 현실일까. 그에게 한시라도 빨리 답을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둘이 있을 때 말을 꺼내야 할 듯싶었다.
“야, 다음에는 먼저 상의를 하고 일을 벌여.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는 하견 형을 치료할 거라고 충분히 설명했어.”
“뭐? 일단 네가 한 건 치료가 아니라 부상을 그대로 옮겨 가는 거였고, 우리는 그걸 전혀 몰랐거든. …됐다, 내가 방금 일어난 애한테 무슨 말을 하냐.”
민주혁은 툴툴거리면서도 내 안색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도 막 깼잖아. 너 난리도 아니었어.”
“내가 뭘 했는데?”
박율과의 기억에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싶어서 다급하게 물었다.
“울었던 건 기억나?”
“내가?”
“기억 못 할 것 같았어. 너 첫날 하루 종일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몸을 한쪽으로 웅크리고 있었어. 그리고 우리가 살짝이라도 건들려고 하면 괜찮으니까 가라고 했고.”
“살짝이라도 닿으면 아파하는 것 같았어요.”
“그 독의 증상 중에 하나야. 처음에는 몽롱함만 느끼는데, 시간이 지나게 되면 가벼운 접촉에도 데는 것 같은 아픔을 느껴.”
그렇지만 나는 시스템 때문에 통증을 안 느낄 텐데. 시스템이 가끔 오락가락할 때가 있더니 통각을 없앴다가 말았다가 하는 건가.
“이튿날에는 나아진 것 같아 보이긴 했어.”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해독약을 먹었으니까요.”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이한이 앓았던 것 말고 다른 일을 말하는 거라면 없어요. 내가 있었을 때는요.”
“아, 내 옆에 돌아가면서 교대로 있었던 건가요?”
“그렇죠. 해독약 연구도 해야 했으니까요.”
아무리 물을 삼키게 할 요량이었다지만, 박율이 모두의 앞에서 내게 입을 맞추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둘이 있었다면 말이 좀 달라지는데.
내가 고민해 봤자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럼에도 그날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생각으로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몇몇 식물의 해독약을 미리 만들어 두는 전략은 나름대로 도움이 됐다. 덕분에 그 식물이 자라는 부근의 마물을 처리하고 균열을 닫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들 부상당하는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치료하기 게이지가 가득 차는 일은 그 이후로 없었다. 송하견이 스스로의 안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해독약을 만들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게이지를 비워 냈던 내 노력도 한몫했다.
‘내가 게이지를 비워 내면서 피를 토하는 걸 모두에게 들키기는 했지만.’
어쩐 일인지 새벽에 게이지를 비우러 나갈 때마다 용사들에게 들켰다. 분명히 모두가 잠들어 있는 걸 봤음에도 그랬다.
‘나중에야 다들 내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지.’
그랬기에 내가 숨죽여 텐트를 나가더라도 기민하게 알아채고 옅게 든 잠에서 깨는 거였다. 그걸 알게 된 이후로 새벽에 치료하기 게이지를 비워 내는 건 그만뒀다. 다들 아무리 체력이 좋다 해도 밤에는 잠을 자야지. 내게 신경 쓰느라 제대로 못 자는 일은 없어야 했다.
게이지를 비워 내는 건 내가 혼자 텐트에 남아 있을 때나,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전투에 따라갔을 때 하는 방법을 택했다.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Ⅴ 실패!
페널티 ‘간헐적 각혈’이 지속 시간 ‘1개월’ 동안 유지됩니다.
눈앞에 뜬 퀘스트 창을 보니 벌써 한 달이 지난 듯했다. 시간이 빨랐다.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
성공 보상:
실패 페널티:
제한 시간:
이번 퀘스트도 송하견의 경우처럼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설레는 마음으로 퀘스트를 수락했다. 퀘스트 창은 눈앞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까 퀘스트 창에서 봤던 박율의 이름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의 이름을 보니까 내가 앓았던 날의 꿈 같기도 현실 같기도 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그에게서 내 기억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돌려서 물어보려 할 때마다 어떻게 눈치챘는지 주제를 틀었다. 게다가 내가 직접적으로 물어봤을 때는 오히려 내게 질문을 되돌려 줬다.
-사실이든 아니든 어때. 형이 네게 입을 맞췄던 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물을 삼키게 하기 위해서였다면서.
-근데 기분이….
-기분이 나빴어?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좋았어?
-…몰라요.
나쁘다와 좋다 중에서는 좋다는 쪽이 더 맞았다. 아니, 그런데 지금 내가 처음에 질문했던 것에서 한참 멀어지지 않았나?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박율이 내 뺨을 은근하게 쓰다듬었다.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벌써 얼굴이 빨개졌네.
-아니요, 내가 언제요.
그렇게 말려들어서 대화를 끝낸 게 몇 번쯤 됐다. 하여튼 고단수였다.
“이한, 오늘은 늪 중앙에 갈 거예요.”
들려오는 라엔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라붙은 늪이라고 했던가요?”
“네. 지금까지 거쳐 왔던 뒤틀린 지역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장소를 원래대로 돌리는 열쇠가 존재한다면 아마 거기에 있을 거예요.”
“범위가 좀 넓긴 하지만 나름대로 중심부니까.”
“거기에도 균열이 많이 열려 있을까요?”
“아마도. 그래도 처음 온 날 둘러봤을 때는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어.”
그의 말에 안심하며 텔레포트로 함께 이동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어떻게 짧은 시간 동안 상황이 이렇게 악화할 수가 있습니까?”
민주혁의 말에 몇 번이고 동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혀 안 괜찮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