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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22화 (122/150)

122화.

최선의 방법

뜨겁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감각이 예민해지다 못해 온몸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시스템이 통각을 차단했는데도 몸에 이 정도의 반응이 오다니. 송하견이 아까 정신을 잃지 않고 버티고 있던 게 새삼 대단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애써 지탱하며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깜빡였다. 뭐라도 말해야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말할 기력이 없어서 그런 듯했다.

“선이한.”

이명 때문에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송하견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내게로 뻗어져 오다가 차마 닿지 못하겠는지 허공에 멈춰 있는 손을 마주 잡았다. 팔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조차 버거워서 그와 맞닿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괜찮아요.’

목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입 모양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시야가 흐려서 송하견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화났으려나? 아니면 속상해하려나? 그렇다 해도 이게 최선이었다. 송하견도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그걸 알 터였다.

“잠깐 안을게. 불편하면 말해.”

박율이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팔을 뻗어서 그의 목에 두를 힘조차 나지 않아서 가만히 눈을 감고 안겨 있었다. 이번에는 시스템이 적당히 치료를 안 해 주는 듯했다.

“아직 상황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어. 여기에 더 있는 건 위험해.”

“텔레포트를 써서 서둘러 돌아갑시다.”

“일단은 그렇게 하는 편이 낫겠어요. 마나의 흐름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텔레포트를 쓰면 마나의 흐름이 엉킬 수 있기에 신중해야 하죠. 이한은 마나가 거의 없으니깐 괜찮을 거예요.”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열기가 몸 안에서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열이 올라 몽롱한 머리로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답답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옷깃을 그러쥐었다.

“이한아, 숨쉬기가 힘들어?”

그건 괜찮았다.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더워요.”

내가 웅얼거리자 박율이 내 머리칼을 살살 헤집었다. 시원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으나 몸 깊숙한 곳부터 퍼지는 본질적인 열기는 해소되지 않았다.

“하견아, 정신 차리고 일어나. 그리고 이한이 발목 좀 확인해 줄래.”

아무리 지금은 괜찮아졌다고 해도 송하견은 큰 부상을 입었었는데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지, 그래도 아직 안전지대로 돌아간 것이 아닌데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게 더 좋지 않았다.

‘가져오기를 썼으니까 송하견의 몸 상태는 나쁘지 않을 텐데.’

그가 넋을 놓고 있는 게 어쩌면 나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듯이 들었다. 물론 아니겠지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가 자책하기를 원한 게 아니었다.

“왜… 여기에 이 상처가….”

“설마, 선이한 너 지금 형님을 치료한 게 아니라….”

송하견의 흔들리는 목소리에 이어 민주혁의 화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율이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해독약을 만들어야 해, 하견아. 아까 너를 공격했던 그 식물의 해독약.”

“…알았어.”

“하견이 조사하던 샘플이랑 플라스크는 내가 정리해서 챙겼어요. 바로 돌아가요.”

바람이 살짝 불어온 듯했다. 그리고 나는 다급하면서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침대에 눕혀졌다. 주위에서 들리는 말소리가 웅웅대며 퍼졌다.

의식이 깨어났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가져오기를 안 했다면 송하견이 한참 고생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 와중에 얼핏 들었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토기가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자리에 누운 채 위액을 토해 내는 내 고개를 누군가 옆으로 가만히 돌려 줬다. 그러고는 조금 진정했을 때 일으켜 앉혀서 입도 헹구게 하고 클린 마법도 써 줬다.

목이 말랐고, 몇 번쯤 물을 찾았다. 물도 제대로 마실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삼켰던 것 같은데….

-…율이 형.

-못 삼키겠어?

-…….

-힘들구나. 목이 많이 말라?

-……흐윽.

-알았어. 열이 심하니까 지금은 울지 말고.

-흑, 네에. …콜록, 읏.

-…안 되겠네. 눈 감아 보자. 몸에 힘은 빼고 편하게. 그렇지, 이제 괜찮아.

달래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 내 목과 등허리를 받치는 단단한 손. 더운 숨이 닿고, 그는 내가 물을 삼킬 수 있도록 부드럽게 혀를 움직였다. 목적은 그것 하나뿐이라는 것처럼, 느릿한 움직임에는 머뭇거림이나 망설임조차 없었다.

나는 입 안에 흘러 들어온 물을 어렵지 않게 삼켜 냈다. 익숙하지 않았기에 입을 떼어 내고 나선 달뜬 숨을 몰아쉬었다. 연한 꽃향기가 났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그는 내가 충분히 목을 축일 때까지 몇 번을 더 그렇게….

잠깐, 뭐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텐트 안이었고, 나는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불은 덮고 있지 않았다. 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조금 풀어 헤쳐진 채였다. 이마에는 미지근한 물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꿈인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 건가?’

전자여도 후자여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꿈이라면 내가 그런 상상을 무의식적으로 했다는 얘기가 되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그건….

“일어났네.”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마에서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이제 해독이 다 되었는지 시야가 또렷했다.

“몸은?”

송하견은 내가 누운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펜을 쥔 채였지만 손에 든 노트에 뭔가를 쓰고 있지는 않았다. 책장이 규칙적으로 팔랑팔랑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괜찮아요.”

“해독약이 잘 듣나 봐. 그래도 더 누워 있어.”

탁, 하고 그가 노트를 덮었다. 그러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 발목을 흘끗 바라봤다.

“발목은 붕대를 감아 두긴 했는데 한동안 움직이지 마.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가고 있어.”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흉이 남겠지.”

송하견의 시선이 내 허리 쪽으로 향했다. 옷이 헐렁하게 헤쳐져 있어서 드러난 허리춤에 커다란 흉이 보였다. 맨 처음 가져오기를 썼을 때 라엔의 상처를 가져온 흔적이었다. 요 며칠간 용사들의 상처를 가져오며 난 작은 생채기도 아물어 가는 게 보였다.

내가 머쓱하게 웃자 송하견이 옷을 여며 주려고 손을 뻗었다가 다시 물렸다.

“열이 많이 올라서 풀어 뒀어.”

“그런 것 같았어요.”

“……나한테 말할 건 없어? 물어보고 싶은 거라든가.”

“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요?”

“사흘.”

“생각보다는 얼마 안 지났네요.”

해독약을 만드는 데 한참 걸릴 거라고 하더니. 다들 며칠간 여기에만 매달려서 무리했을 게 빤히 보였다. 송하견이 가장 힘들어했을 테고.

이제 치료하기 쿨타임도 끝났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들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고 송하견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 나는 헛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형, 괜찮아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송하견은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잠깐. 나한테 회복 약이 있었잖아.’

품 안에 뭔가 걸리는 느낌에 그제야 시스템이 다시 가져가지 않았던 보상이 떠올랐다. 이게 지금에 와서야 생각나다니. 열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긴 했나 보다.

사흘이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괜히 다들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회복 약이 있다는 걸 이제 반드시 기억해 둬야지.

“시간이 얼마 안 지났다고.”

“사흘이라면서요. 그것보다 형, 지금 많이 피곤해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거뭇해 보이는 송하견의 눈가를 쓸었다. 그는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송하견’

치료하기 / 가져오기」

상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역시 어디가 안 좋은 게 맞았구나. 곧바로 치료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그에게 퍼졌던 파란 빛이 내게로 들어왔다. 그러나 송하견의 안색은 더 창백해 보였다. 왜지? 설마 내가 자기에게 신력을 쓰는 것에 트라우마라도 생긴 건가. 내가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건 좀 곤란했다.

“형? 나는 형이 만들어 준 해독약 덕분에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고마워요.”

“너는… 네가 사흘 동안 얼마나 앓았는지 모르지.”

송하견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건 공포였다. 그는 내 눈앞에서 달아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처럼 혼란스러워 보였다.

“네가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럴 리가요. 나는 형이 해독약을 만들어 줄 걸 알고 있었어요.”

“나 때문에,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아차. 이번 건 내 말실수였다. 믿고 있다는 말로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게다가 나는 그가 해독약을 만들지 못했더라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시스템이 있으니까.

“미안해요. 부담됐나요?”

“부담되고 안 되고가 어디 있어. 그게 문제야? 너를 살려야 하는데.”

“음, 나는 죽지는 않았을 거긴 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래. 송하견에게는 그렇게 들리겠지. 그는 내 말을 단호하게 끊어 냈다. 그러고는 여전히 희게 질린 얼굴로 손에 들린 노트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다른 방법도 있었어.”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겠죠.”

“그러면 이게 최선이었다고?”

“내가 부상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형은 그 몸 상태로 해독약을 절대 못 만들었어요. 고통을 느끼지 않는 나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렸는데 형은 어땠겠어요.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아요?”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다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하견을 바라봤다. 그가 내게로 몸을 천천히 기댔다.

“그래도 네가 죽을 고비를 겪는 것보다는 나아.”

그가 나를 옭아매듯이 끌어안았다. 세게 힘을 준 것이 아님에도 품 안에 가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와 내가 맨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해?”

“기억나요. 내가 형 방에 있을 때 형이 들어왔잖아요. 밤이었고요.”

“그래. 그리고 너는 나를 치료했지. 그때 너는 나를 알지도 못했어. 그럼에도 나를 구한 거야.”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그래서 나는 네 옆에서 있고 싶기도 하고, 네게서 떨어지고 싶기도 했어. 네가 희생해 가며 우리를, 나를 치료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요.”

“그때처럼, 그리고 지금처럼 이렇게 나 때문에 네가 희생한다면, 나는….”

“내게서 떨어지고 싶다고요?”

“……응.”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망설이듯 나온 대답이 그의 본심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게 진심이라면 여전히 매달리듯이 나를 끌어안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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