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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21화 (121/150)
  • 121화.

    해독약을 만드는 건

    박율은 내 말을 듣고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슨 꿈을 꿨는지 물어봐도 돼?”

    “…아니요.”

    “그래. 그게 무슨 꿈이었든 그건 그냥 꿈일 뿐이야.”

    그 말을 들으니까 속에서 뭔가가 울컥 차올라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형은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꿈이 아니에요.’

    내가 본 게 당신의 미래일 수도 있다는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신에게서 그가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내가 언젠가 그를 죽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가까운 일은 피부로 느껴지는 것처럼 생생했다. 나와 맞닿아 있는 지금 이 온기가 힘없이 스러질 수도 있다니.

    “알아요.”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박율에게 ‘내게서 떠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했던 건, 의미는 통했지만 사실 내가 하고자 했던 말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앞으로의 전투에 데려가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적어도 치료하기 쿨타임이 끝나기 전 나흘 동안은.

    라엔과 민주혁의 미래시를 봤을 때 내가 함께 갔다고 해서 상황이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어난 일을 모두 잘 수습하기는 했다. 성공은 아니었지만 실패도 아니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박율이 내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아파서 우는 건 아니지?”

    “…네.”

    “그러면 괜찮아. 마음껏 울어. 왜 우는지 말해 주면 더 좋은데, 그냥 이대로 있어도 괜찮아.”

    나를 껴안아 오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폭 안겼다.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눈앞에 파란 상태 창이 떴다.

    「<힐러가 도울게요!> 선택받은 용사 ‘박율’

    치료하기(잠금) / 가져오기」

    마음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재빠르게 선택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가져오기, 성공!」

    박율이 몸을 잠깐 경직시켰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이 방심했네.”

    “내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거예요.”

    “앞으로는 기회가 될 만한 것을 주지 말아야겠구나.”

    “나랑 멀리 떨어져서 지낼 거예요…?”

    “상처는 다 치료해 뒀는데, 새로 생겼을 테니까 다시 봐야겠다.”

    “형….”

    박율은 클린 마법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붕대를 풀러 다시 상처를 살폈다.

    “앞으로는 이렇게 말고 치료하는 쪽으로 신력을 쓸게요. 그러니까 같이 있어 주세요.”

    “진정하는 것 같더니 왜 다시 울려고 해. 아까 네가 말했던 것처럼 형이 너를 떠날까 봐?”

    “네.”

    “형은 그 반대를 걱정해 왔는데.”

    내 상처를 다시 치료할 때의 안쓰러운 표정을 지우고 맑게 웃은 박율이 내 손에 물잔을 들려 줬다.

    “이제 잘 수 있겠어? 형이 옆에서 같이 잘까?”

    “그래 줄 거예요?”

    내가 그가 누울 공간을 비워 놓고 재빨리 눕자 그가 키득키득 웃으며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내가 공간을 비워 둔 게 무색하게 나를 끌어당겨서 품에 가두듯이 안았다.

    “다들 곧 돌아올 텐데 이한이는 못 보고 자겠네.”

    “내일 볼 거니까….”

    그러니까 내일은 꼭 나도 데려가요.

    그 말은 제대로 했는데, 박율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음 날 텔레포트를 쓰려는 라엔의 옆에 다가가서 섰다.

    “나도 같이 가요. 어제 율이 형도 괜찮다고 했어요.”

    “네? 정말요?”

    라엔이 의아한 눈빛으로 박율을 바라봤다. 그러나 박율의 시선은 내게 닿아 있었다.

    “어제 약속까지 했잖아요.”

    “그 약속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할지 잠깐 고민하던 박율이 결국 나도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선이한, 너는 진짜. 네 고집을 어떻게 말리냐.”

    민주혁이 내게 방어 마법을 여러 겹 둘렀다. 그 옆에서 라엔이 나를 감싸 안았다.

    “걱정이긴 하지만 하견 옆에 있으면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마물의 핵으로 파고드는 쪽이 아니라 후방이니까요.”

    “하견 형에게 해독약을 받고 나서 나에게 바로 치료받으러 오기로 약속한 거예요.”

    라엔은 마지못해 끄덕이고는 텔레포트로 이동했다.

    “나한테서 다섯 발자국 이상 떨어지지 마.”

    송하견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앞쪽을 지원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바빠 보였다. 그는 박율과 라엔, 그리고 민주혁에게 상처를 내고 멀어지는 식물 중에서 독초를 골라내어 샘플을 채취하고 그걸로 각각 해독약을 만들고 있었다.

    라엔과 민주혁은 약속한 대로 해독약을 상처 부위에 뿌리고 나서 시간이 나는 대로 내게 와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가 아니라 가져오기이긴 했지만.

    “바닥 쪽으로도 공격이 꽤 들어가는 것 같아요.”

    “이한도 그래 보이나요? 더 주의해야겠네요.”

    나는 전투의 중반 즈음에 그들에게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슬쩍 귀띔했다. 그렇지만 이미 그들도 알고 있던 듯했다. 그렇다면 왜 미래시에서 본 그는 덩굴이 다가오는 걸 방어하지 못했을까. 속도가 너무 빨랐나?

    그날은 다들 주의해서인지 원래 사고가 일어나는 날이 아니었는지 별다른 큰일 없이 지나갔다.

    치료하기 쿨타임이 하루 정도 남았을 때였다. 곧 미래시에서 봤던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되기도 하고, 어쩌면 다들 조심했기에 미래시에서 본 사고가 피해 간 것은 아닐까, 하고 묘하게 안심되기도 할 무렵이었다.

    “이 지역에는 처음 보는 식물이 꽤 있네.”

    옆에서 들려오는 송하견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송하견은 플라스크 세 개 정도를 허공에 띄운 채 해독약을 만들면서 한 손으로 작은 풀잎을 하나 쥔 채 신중하게 살피고 있었다. 흰 장갑을 낀 채였다.

    “위험한 독초인가요?”

    “독초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반응이 애매하게 나타나는데. 일단 다른 테스트를 더 해 봐야 해.”

    송하견은 그 자리에서 시약병을 소환해 여러 액체에 풀잎을 담가 보며 뭔가를 확인했다. 혹시 모르니 돌아가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내가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걸 판단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전투하는 당사자들일 테니까.

    전투 중에 텔레포트를 써서 곧바로 돌아가도 된다고는 했지만, 그 경우 다음에 그 지역을 공략할 때 몇 배로 더 위험하고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한번 시작한 전투는 보통 마물의 핵을 찾아서 파괴하고 근처의 균열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 끝낸다고 한다.

    ‘내가 여러 번 바닥 쪽도 조심하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잘 살피고 있어야지.’

    상황 자체는 내가 막을 수 없어도 가져오기로 바로 상처를 없앨 수는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앞쪽의 박율에게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이 식물은 구조가 왜 이렇게 꼬여 있지? 이러면 해독약을 만드는 데 한참 걸릴 거야.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절대 못 만들어.”

    송하견은 드물게 침착함을 잃은 듯해 보였다. 그가 한 손으로 딱 소리를 내자 하늘에 붉은색의 불빛이 잠깐 터졌다.

    “선이한, 이쪽으로 와. 일단 돌아가야 해. 신호를 보냈으니 다들 서둘러 마무리하고 올 거야. 이대로 있으면 위험해. 나는 이 식물의 샘플을 더 구하고… 읏.”

    하늘에 불빛이 터졌던 자리를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송하견이 말을 하다 말고 숨을 들이켰다.

    옆을 돌아봤다. 무너지는 몸. 그의 발목에서 흘러내리는 피. 이미 덩굴이 그의 발목을 감아 상처를 낸 후에 미끄러지듯이 흩어진 채였다. 상처가 꽤 깊은지 바닥에 고인 핏물이 상당했다.

    ‘왜 박율이라고 생각했지.’

    처음에는 분명히 박율이나 송하견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미래시에서 본 인물이 박율일 거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송하견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와 높이를 맞췄다.

    “하아… 방금 샘플, 윽… 그거야. 그걸로….”

    송하견은 내 옷자락이 구겨질 정도로 세게 그러쥐고 가쁘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의식을 반쯤 잃은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단정하게 묶은 그의 보랏빛 머리칼이 식은땀에 젖어 들어갔다.

    “하견 형님? 괜찮으십니까?”

    송하견이 보낸 신호를 보고 곧바로 돌아온 모두에게 상황을 빠르게 전달했다.

    “형이 구조가 복잡해서 해독약을 만들기 어렵다고 한 식물이 있었어. 방금 그 식물의 독이 체내에 들어간 것 같아. 형이 연구하던 샘플은 저쪽에 전부 있어.”

    “라엔아, 살펴보자. 주혁이는 하견이 상태 좀 체크해 줘.”

    박율과 라엔이 샘플을 달각거리며 살피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민주혁은 송하견의 어깨를 두들기며 의식을 깨우려 노력했지만 송하견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형님, 제 말 들리십니까?”

    “…….”

    “고개만 끄덕이셔도 됩니다. 지금 열이 높습니다. 다른 데도 안 좋으십니까?”

    “…응.”

    “텔레포트를 써도 될 정도의 몸 상태이십니까?”

    “…….”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이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듯했다.

    “형님들, 해독약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텔레포트를 쓰는 건 어렵겠습니다.”

    “이한아, 하견이가 해독약을 만드는 데 한참 걸릴 거라고 말했어?”

    “네.”

    “기간을 얼마나 예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걸릴 거예요. 하견이 마법 약 분야에는 가장 뛰어나니까요.”

    사실 처음부터 내가 뭘 해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다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린 것만 해도 나는 인내심이 닳고 닳아 있었다. 더 이상 송하견이 고통받고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잠깐, 이한아. 너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 너도 똑같이 아픈 거야.”

    “전부터 계속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아픔을 느끼지 않아요. 그리고 하견 형이 해독약을 빨리 만들 수 있다면서요. 그러니까… 뒷일은 맡길게요.”

    뭘 하려고, 하는 민주혁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지만 내가 송하견에게 손을 대는 것이 더 빨랐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송하견’

    치료하기(잠금) / 가져오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다. 송하견이 해독약을 담당해서 만드는 역할이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되면 상황이 곤란하게 흘러가는구나. 이걸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송하견의 주위를 살폈을 텐데. 그래도 달라지는 게 없었을 수도 있지만.

    「<힐러가 도울게요!> 가져오기, 성공!」

    송하견에게 퍼졌던 빛이 내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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