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20화 (120/150)

120화.

내게서 떠나지 말아요

“됐으니까 벗어요.”

“이한이가 형한테 그런 걸 바라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런 식으로 말해도 소용없어요. 나는 오늘 형한테 닿아야겠으니까요.”

“우리 이미 닿고 있는데.”

“장갑 낀 손 말고요. 맨살이 닿아야 하는 거 알잖아요.”

“흐음.”

내 손목을 감싼 악력이 점점 강해지는 듯했다. 분명히 내가 박율에게 먼저 다가갔는데 어느새 그가 주도권을 쥔 듯한 구도가 됐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형은 이한이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주고 싶은데.”

“그런데요?”

“그전에 이한이가 먼저 시범을 보여 볼까.”

“네…? 아니, 아니요.”

손목을 비틀었으나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어느새 등 뒤로 이불이 닿았다. 박율을 간절하게 올려다봤다.

“내가 형한테 벗어 달라고 했던 건 치료하기 위해서였고, 내가 벗을 필요는 없잖아요.”

“있어.”

“…왜요?”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박율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내 가슴 위로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댔다.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이 내 호흡을 느끼는 것처럼, 혹은 내 약간의 움직임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 자리에 머물렀다.

“심장이 터지겠네.”

“앗, 아니… 헉.”

내가 당황한 사이에 박율이 내 옷을 슬쩍 들췄다. 곧바로 잡아서 내렸으나 이미 뭔가를 본 듯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한아. 다시 올려.”

“화내지 마요.”

“화난 거 아니니까 얼른.”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서 옷을 다시 들췄다. 어설프지만 나름 노력해서 감은 붕대와 군데군데 거즈를 덧대 종이 반창고로 고정한 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돌아와서 몰래 수습하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가져오기를 썼으니 내 몸에 상처가 남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걸 들키는 건 싫었다. 그래서 아까 라엔과 민주혁이랑 함께 돌아오자마자 기회를 봐서 서둘러 상처를 치료했었다.

얼굴이나 손처럼 드러나는 부위에 상처는 없었으니 신관복에 자연스럽게 가려질 테고, 붕대와 거즈를 사용해서 피 냄새만 안 새어 나가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다들 눈치채지 못했다. 박율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보기에만 이런 거지 별거 아니에요.”

“붕대 같은 건 다 어디서 났어.”

“레데오에 있을 때 챙겼어요. 방 서랍에 붕대나 거즈 같은 이런저런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혈 향이 안 새어 나가게 하는 것들로만 꼼꼼하게 챙겼네. 하마터면 형도 모를 뻔했어.”

“…알고 챙긴 건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까….”

박율이 쓰게 웃더니 내가 종이 반창고로 붙여 놓은 거즈를 하나 떼어 냈다. 작은 상처에 피가 말라붙어 어느새 피딱지가 져 있었다.

“상처 치료는 꼼꼼하게 안 했고.”

“……노력은 했어요.”

“붕대는.”

박율이 나를 안으며 내 등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내가 허리 즈음에 묶어 놓은 붕대를 금새 풀어냈다. 풀린 붕대가 허리께를 간질이며 흘러내렸다. 박율은 내게 더 가까이 붙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붕대도, 꼼꼼하게 안 묶었고.”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한편으로는 그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음에도.

“정말 딱 혈 향을 지우는 용도로만 상처를 가렸구나. 약도 안 바르고, 붕대도 엉망으로 묶고. 상처가 곪든 흉이 지든 너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네.”

붕대도 노력해서 감은 건데. 억울한 마음이 스치듯이 들으나 지금은 이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박율에게도 가져오기를 쓰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약을 안 가지고 있었을 뿐이에요.”

“이한아. 너는 위태로워 보여. 그게 지금껏 너를 제대로 바라봐 준 사람이 없었기에 그렇다고 생각했어. 그 스승이라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내 등을 위로하듯이 쓸어내린 박율이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어. 네가 너를 보고 있지 않아. 그래서 너는 네가 어떤 상태인지 몰라.”

박율은 거즈를 모두 떼어 내고 붕대를 풀었다. 그러고는 소독약과 연고 같은 것을 여러 개 소환했다. 상처 부위를 하나하나 닦아 내고 치료하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진지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상처를 치료한 게 아니라, 네게 그대로 옮겨 간 거네. 네게 이런 상처가 생길 일은 없었을 테니까.”

“…숨길 수도 없겠네요. 맞아요. 형, 그런데 혹시….”

“다들 한참은 지나야 돌아올 거야. 걱정하지 마. 모두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그걸 바라는 거지?”

“…맞아요.”

“대신에 형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박율이 종이 반창고를 지익 뜯어내서 마지막 거즈를 고정했다. 그가 내 피부를 조심스레 쓸었다.

“이기적인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형이 네 옆을 차지해도 될까? 네 옆에서 너를 보아 주는 사람이 되어도 될까. …짧은 시간이겠지만 그동안이라도. 작은 것도 놓치지 않을게. 네가 너를 먼저 알아챌 수 있을 때까지.”

박율은 생각보다 이번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죄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의 짐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이기적이지 않아요.”

내 대답을 들은 박율이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것 같았다. 시종일관 웃는 낯이었음에도 그 조그만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박율이 이렇게 감정 변화를 보이는 것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형이 나한테 하견 형의 치료를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치료했을 거예요. 오히려 하견 형이 그렇게 부상을 입었는데도 나를 안 데려갔다면 화났을지도 몰라요.”

“알아. 너의 도움이 필요했던 건 맞지만 나는 네가 너의 안위보다는 우리의 안위를 먼저 고려했다는 게 속상했어.”

“…음.”

“당장 너를 소중히 여기는 게 어렵다면, 너를 소중히 여기는 형을 생각해 줘. 형을 생각해서라도 너를 좀 더 소중히 대해 줘.”

“알았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숨기지 마. 화 안 낼 테니까 어디 다쳤으면 형한테 꼭 얘기해 줘. 그래야 치료를 하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약속한다는 말까지 듣고 나서야 박율은 안심했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매일 약을 바르자. 형이 모두에게 안 들키도록 적당한 시간에 올게.”

“고마워요. …그런데 형은 안 벗어요? 형도 치료하게 해 주세요.”

“이미 날도 어두워졌고 네가 잘 준비도 마쳤는데? 이제 잘 시간이야. 그건 다음에.”

내 눈 위로 덮인 장갑 낀 손에서는 면의 보드라운 감촉과 함께 연한 꽃향기가 났다.

“다음에는 꼭….”

“그래, 알았어.”

웃음 어린 목소리가 어딘가 고집 있게 들리는 것이 내 착각이기를 바랐다. 의식이 점차 잠겨 갔다.

박율은 이틀간 내가 잠들기 직전에 찾아와서 붕대를 풀고 약을 새로 발라 준 후에 다시 붕대를 말끔하게 감아 놓고 나를 재웠다. 내가 잠들려고 할 때를 어떻게 아는 건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 덕에 그동안 박율에게 가져오기를 쓸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옷을 살짝 들춰 내는 것조차 실패했으니까. 어떻게 하든 박율을 치료하기 어려울 거라는 송하견의 생각이 맞을지도 몰랐다.

‘쿨타임은 이제 나흘쯤 남았나.’

쿨타임이 다 지나기 전에 박율을 치료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쿨타임이 끝난 후 내가 상처를 가져오지 않고 치료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한아, 잠깐 일어나서 옷 들춰 볼래?”

오늘도 내가 비몽사몽 할 무렵 찾아온 박율이 나른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어제도 박율이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 때문에 그가 상처를 치료해 주는 중에 잠들 뻔했다.

“앉아서 자게? 귀엽네.”

그가 흘리듯이 말하며 내 뺨을 콕 찌르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잠이 확 달아나기는 했지만.

“상처가 잘 아물어 가는 것 같긴 한데, 새로운 상처가 계속 생겨서 소용이 없네.”

“그제도 어제도 다들 전투하면서 부상을 입었으니까요. 율이 형 빼고는 다 치료했어요.”

“치료하는 게 아니라 상처를 그대로 옮겨 오는 이유가 있어?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음, 신력을 쓰는 데 부작용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신력을 쓰는 게 잠깐 불안정해서 그런 건데, 며칠만 지나면 전처럼 문제없이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변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수준급이었다. 박율도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다들 요 며칠 큰 부상이 없어서 다행….”

박율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하게 들렸다. 정신이 붕 뜨는 듯한 감각. 설마 이건.

“…형.”

말을 더 잇기 전에 눈이 감겼다. 직전에 박율에게로 몸을 기댄 것 같기도 했다.

‘역시 미래시구나.’

눈앞에 흐릿한 장면이 펼쳐졌다. 눈을 부릅뜨고 집중했으나 물에 비친 풍경을 보는 것처럼 불명확하게 보이기만 했다. 심지어 초점이 바닥 쪽을 향하고 있었기에 보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미래시가 점점 불친절해져 가는 것이 착각이 아니었다. 조각난 정보를 애써 짜 맞췄다. 일단 바닥을 보니 배경은 이곳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이는 거의 무릎 정도까지만 비치고 있어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정황상 전투 중인 듯했다.

그렇게 몇 분쯤 흐른 듯했다.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바닥 쪽에서 덩굴 같은 것이 빠르게 뻗어 왔다. 그러고는 자석처럼 그의 발목에 감겨 순식간에 조여들었다. 덩굴에 있는 가시 때문에 발목 아래로 검붉은 피가 주륵주륵 흘렀다.

그리고 그가 무너졌다. 발목이 뒤틀려서인지, 독 때문에 힘이 빠져서인지 알 수 없었다.

화면이 서서히 멀어졌다. 이게 끝인가? 그동안은 용사들이 목숨을 잃을 만한 일이 있을 때만 미래시가 보였다. 그렇다면 이것도 그만큼 심각한 일이 된다는 건가? 영구적인 상처가 남는다거나, 갑작스러운 전력 손실로 위험한 상황이 전개된다거나…?

“이한아, 정신이 좀 들어?”

나는 박율에게 몸을 완전히 기대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받친 채로 내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침구와 그의 옷까지 피로 뒤덮여 있었다.

박율이 충분히 당황했을 만한 상황이지만, 방금 본 미래시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내 안색이 창백하기라도 했는지 그는 나를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 속이 아프지는 않아? 불편한 데는?”

“…흐으, 율이 형.”

“그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 거지? 바닥 쪽을 조심하고, 발목을 공격당하는 걸 주의해야 한다. 이걸 전부 그대로 말해도 될까?

미래시에서 본 상황은 치료하기 쿨타임이 남은 나흘 안에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라엔 때도 그랬고, 민주혁 때도 그랬다. 꼭 처음부터 그렇게 되리라고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다면 이번에는 박율이나 송하견인 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는 박율과 시선을 맞췄다. 생각을 정리해서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말도 뒤죽박죽 나왔다.

“꿈을, 꿨어요.”

“응.”

“내게서 …흑, 떠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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