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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19화 (119/150)
  • 119화.

    적극적이네

    전투가 모두 마무리되고 라엔과 민주혁의 상처를 가져오기를 써서 없앴다. 신관복이 흰색이기는 했지만 품이 커서 몸에 그대로 옮겨 온 상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독은 송하견이 해독약으로 어느 정도 누그러뜨린 상태여서 부작용으로 어지럽거나 하는 느낌도 없었다.

    그리고 박율에게 손을 대려고 하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라엔이랑 주혁이는 이한이 잘 데려가서 상태 좀 봐 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네? 선이한, 어디 봐. 무리했어?”

    “아니, 그것보다 율이 형 잠시만….”

    “그래, 이한아. 가서 푹 쉬고. 하견이는 지금 몸 상태는 괜찮아? 형이랑 주위를 좀 둘러보고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응.”

    “그러면 부탁할게.”

    “이한은 내가 텔레포트로 데려갈게요.”

    박율은 상황을 순식간에 정리했고, 나는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이동해서 텐트 앞으로 돌아왔다. 라엔이 나를 데리고 텔레포트를 쓰기 직전에 박율이 ‘미안.’이라고 말하는 입 모양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박율과 송하견이 돌아왔을 때, 나는 박율을 보고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이 날씨에 장갑까지 낀다고요…?”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을 한 번 바라보고 그가 낀 흰 장갑을 한 번 바라봤다. 물론 단정하고 차분해 보이는 분위기가 그와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라 팔뚝을 다 덮는 겉옷까지 걸치고 있었다. 긴 바지야 원래 입고 있었다고 쳐도 굳이 겉옷까지 입고 나타난 건 내가 그에게 닿는 걸 명백하게 피하고 있는 거였다.

    송하견에게 눈짓했으나 그는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가져오기를 쓰기 위해 송하견의 손을 그러쥐었으나 아무런 상태 창이 뜨지 않았다. 다행히 송하견은 어딘가 다쳐서 온 건 아닌 듯했다.

    ‘손은 계속 잡고 있으려는 건가.’

    그가 내 손을 잡은 채로 놓아주지 않기에 그대로 속삭였다.

    “설명해 줘요.”

    “어떤 독초가 있는지 조사하고 왔어. 식물의 독이 문제라면 종류별로 미리 해독약을 만들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거 말고….”

    말하는 중에 옆을 보니 박율이 자리에 없었다. 이미 텐트 안으로 들어간 듯해서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그것도 궁금하긴 했는데, 율이 형에 대해서 물어본 거예요.”

    “뻔하지 않겠어.”

    그래. 나를 전투 장소에 데려간 게 신경이 쓰였든, 내가 각혈했던 게 신경이 쓰였든. 어쨌거나 내가 신력을 써서 자기를 치료하는 걸 거절하는 거였다.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송하견이 조금 어색한 손길로 내 어깨를 다독였다.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어. 아마도.”

    “형, 확신이 없어 보이는데요.”

    “응. 박율 형은 그런 걸 우리한테 안 말하니까.”

    “나한테도 안 말해요.”

    “그래도 너한테는 좀 무르지 않아?”

    그랬던가? 박율이 나에게만 무르다는 말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말하는 편이 옳았다. 괜히 마음이 간질간질한 기분…이기는 했지만 짚어야 할 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뭘 보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잘 못 느껴서요.”

    “그건 형이 너를….”

    송하견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말을 돌렸다.

    “박율 형은 한번 결심하면 단호한 면이 있으니까, 전투에 지장이 갈 만한 큰 부상이 아니면 한동안 너한테 먼저 치료해 달라고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든 하려고요.”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지만 나도 박율 못지않게 단호한 면이 있었다. 다짐하듯이 내뱉자 송하견이 내가 귀엽기라도 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잘해 봐.”

    내가 박율을 못 당해 낼 거라고 확신하는 듯한 그 모습에 괜히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텐트 안에는 박율과 민주혁이 있었다.

    박율은 동그란 탁자 위에 나무 틀을 올려 두고, 거기에 유리로 된 투명한 시험관을 하나씩 끼워 고정해 두는 중이었다. 시험관 안에 들어 있는 맑은 액체에는 작은 풀잎이나 식물의 줄기가 한두 개씩 들어 있었다.

    민주혁은 그 앞에서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박율은 민주혁과 뭔가를 얘기하다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이쪽을 돌아봤다.

    “이한이구나.”

    “라엔 형은요?”

    “방금 나갔는데 엇갈렸나 보네. 주변을 돌아보다가 하견이한테 물어보러 갈 게 있다고 했어.”

    박율의 맞은편에 앉은 민주혁의 옆쪽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민주혁이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이건 만지지 마.”

    “알았어. 이게 뭔데? 독초?”

    “맞아. 형님들이 방금 채취해 온 거야.”

    민주혁이 노트 사이에 펜을 끼워 두고 탁 소리가 나게 노트를 덮었다.

    “지금 이것도 종류가 많아 보이지 않아?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야.”

    “주혁이 말이 맞아. 워낙 종류 자체가 많기도 하고 장소에 따라서 피어 있는 식물도 다르니까. 일단은 생경한 독초나 해독약을 만들기가 까다로운 독초만 선별해서 샘플을 가져왔어.”

    “모든 식물의 해독약을 미리 만들어 두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전투 중에 어떤 식물의 독에 당한 건지 판별해 내는 게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요.”

    “맞아. 웬만한 건 그 자리에서 식물 샘플로 직접 해독약을 만드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렇게 몇 가지 식물만이라도 미리 해독약을 만들어 두는 건 좋은 것 같습니다.”

    “맞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도 대화에 살짝 끼어들어 의견을 내자 민주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선이한 너도 어떤 해독약을 어떤 독초에 쓰는 건지 알아 둬야겠다고?”

    그런 말은 안 했지만 민주혁이 내게 알려 주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미리 만들어 둔 해독약을 내가 소환 마법을 써서 가져오진 못하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율이 말을 덧붙였다.

    “이참에 한 번씩 살펴보는 것도 괜찮지. 물론 네가 전투하는 곳에 따라갈 일은 웬만하면 없겠지만.”

    “맞아요, 아예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필요하면 나도 같이 갈 거고, 내가 도움이 된다면 항상 전투에 따라가는 방안도 고려하는 중이어서요.”

    시험관을 살펴보던 박율이 행동을 뚝 멈췄다.

    “누가 그런 방안을 고려하고 있어?”

    “내가요.”

    “…이한아.”

    “자, 그 얘기는 나중에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형님도 오늘 선이한이 무리했으니까 편하게 쉬게 할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가라앉은 박율의 목소리를 기민하게 눈치챈 민주혁이 노트를 일부러 과장되게 펼치며 내 앞에 들이밀었다. 민주혁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가 설명해 주는 독초와 각각의 증상, 그리고 해독약에 대해서 집중해서 들었다.

    “마비 같은 심각한 증상이 있는 독초도 있구나.”

    “맞아. 어떤 독초는 적절한 때에 해독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어.”

    “뭐?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그런 독초는 미리 해독약을 만들어 두고 있어. 기존에 발견하지 못한 독초라면 좀 곤란하겠지만, 하견 형님이 있으니까.”

    “그래도 조심해야겠다.”

    나와 민주혁의 대화에 끼지 않고 바로 앞에서 시험관을 분류하고 독초를 분석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박율을 바라봤다. 한마디 말도 없는 이유가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 건지, 내가 아까 전투에 매번 따라가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서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직접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박율이 듣기를 바라며 민주혁에게 말을 꺼냈다.

    “그러면 너는 율이 형이 이 더운 날에 장갑을 끼고 있는 게 독초를 만져야 하기 때문인 것 같아?”

    “응? 그렇지.”

    “정말 그것 때문에?”

    “하견 형도 독초를 만질 때는 장갑을 끼잖아.”

    “그러면 형이 시험관을 사용해서 독초를 분류하는 걸 다 끝낸 뒤에도 장갑을 끼고 있으면 그건 뭔가 다른 이유 때문이겠네.”

    “글쎄. 독초 샘플을 가져와서 연구하는 건 계속해야 하니까, 장갑 끼고 있는 걸 손에 익게 할 겸 한동안 끼고 있을 거라고 하시던데.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형님?”

    박율이 이미 그런 식으로 설명했구나. 물론 그럴싸한 이유이긴 했지만 민주혁이 그걸 그대로 믿고 있다는 게 조금 의외였다. 민주혁은 박율을 꽤 믿고 따르는 듯했다.

    “율이 형, 정말로요? 그러면 겉옷도 독초 때문에 입은 건가요?”

    “맞아. 마물이 스며든 식물에 독이 있을 경우에는 스치기만 해도 위험하니까. 그걸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 당분간 입고 있으려고.”

    “아하…. 그러면 민주혁 너는?”

    “아무리 식물이라도 공격해 올 때는 옷 같은 건 다 뚫고 들어오니까. 라엔 형님의 로브도 공격을 막는 데는 도움이 안 되잖아. 박율 형님은 전투할 때 최전방에 있으니까 필요하시다고 한 거고.”

    하마터면 나조차도 수긍하고 넘어갈 뻔했다. 박율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최전방에서는 잔 공격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겉옷에 마법을 걸어 둬서 덥지 않아.”

    “그래요. 잔 공격을 많이 받았으니까 치료가 필요하겠네요, 그렇죠?”

    “그건 괜찮아. 그만큼 심각하지도 않고, 형이 지금 좀 바빠서.”

    바빠 보이긴 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시험관을 들여다보는 데만 집중하는 박율이 조금 미웠다. 괜히 그럴싸한 핑계를 대는 게 더 화가 났다.

    시험관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멎어 가고 어느 정도 정리될 무렵, 박율이 나무 틀에 끼워 둔 채 고심하며 지켜보고 있던 마지막 시험관을 민주혁이 꺼내 들었다.

    “아, 이건 하견 형님께 제가 다녀올까요?”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어?”

    “아까 라엔 형님이 지도 어디쯤을 보고 있었는지 기억납니다. 마침 이 독초도 그 부근에서 채취한 거라고 하셨으니까, 형님들이 없으면 독초라도 살펴보고 올 수 있으니 겸사겸사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텔레포트해서 돌아오고.”

    민주혁이 순식간에 텐트 밖으로 나섰다. 한결같이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듯이 들었다.

    박율은 시험관을 테이블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무리했을 텐데, 좀 쉴래?”

    “무리한 적 없어요.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왜 안 믿어 줘요?”

    “형은 항상 이한이를 보고 있어.”

    “…….”

    침대에 걸터앉아서 누우라는 듯이 이불을 가볍게 두들기는 박율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니까 대체 언제? 어떻게 볼 수 있었단 말이지? 분명히 그가 나를 볼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내가 각혈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하고 있었다.

    이 주제로는 내가 이길 수 없으니 빨리 넘겨야 했다. 박율에게로 다가가서 그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벗어요.”

    박율은 잠깐 놀란 듯하다가 곧 평정을 되찾고 내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적극적이네.”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모습에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오히려 오기가 생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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