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원하고 있으니까
회복 약 보상은 지금 송하견에게 사용할 수 없었다.
‘보상 사용 취소하기.’
안타깝게도 그런 건 없는 듯했다. 손에 들린 회복 약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신경질적으로 품에 넣었다. 송하견은 다른 용사들의 해독 마법 약을 만드는 데 집중하느라 내 손에 들렸던 약을 못 본 것 같았다.
혹은 그에게 아예 보이지 않거나.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사용 방법을 보니 회복 약은 나에게만 쓸 수 있었고, 나에게는 시스템이 있으니 그건 쓸모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제 이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송하견에게 치료하기를 쓰면 게이지가 끝까지 찰 가능성도 있어.’
그렇다고 게이지를 이제 와 비워 내는 건 불가능했다. 게이지를 비워 내는 중에는 치료하기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한시가 급한 지금 그 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망설임 없이 그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송하견’
치료하기 / 가져오기」
치료하기를 쓰면 게이지가 다 차서 일주일의 쿨타임을 기다려야 할 가능성이 있었고, 가져오기를 쓰면 내게 그대로 옮겨진 상처를 송하견이 보게 것이다. 찰나의 순간 빠르게 고민을 마쳤다.
‘치료하기.’
푸른 빛이 송하견의 주위로 서서히 번졌다.
가져오기를 써서 내가 그의 상처를 한동안 대신 달고 있으면 송하견이 앞으로의 전투에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였어도 죄책감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시스템이 있기는 하였으나 죽을 만큼 심각한 상처가 아니니 내가 가져온다 해도 치료해 줄지 미지수였고, 어떤 것이든 회복할 수 있는 회복 약은 고작 이런 데 사용하는 게 아니라 나중을 위해서 남겨 두고 싶었다.
‘피를 토하는 건 그동안 많이 보였으니까.’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각혈을 하는 편이 더 나았다. 치료하기 게이지가 가득 찼을 때 쿨타임이 있다는 것이 큰 타격이기는 했지만, 티가 많이 나지 않는 웬만한 상처는 가져오기로도 괜찮을 듯싶었다. 신관복이 치렁치렁한 게 이럴 때 도움이 됐다.
아니지, 혹시 운이 좋다면 치료하기 게이지가 끝까지 안 찰 수도….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나는 운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듯했다. 검붉은색이 끝까지 찬 게이지를 눈에 담은 동시에 입가를 틀어막았다. 흘러내린 피로 소매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다음 치료하기까지 남은 쿨타임: 7일」
고개를 살짝 숙이고 가빠 오는 호흡을 애써 진정시켰다. 소리 내지 말자. 송하견과 잠시 거리를 뒀다가 좀 진정된 후에 돌아와야지. 전투하는 중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선이한.”
그러나 송하견은 금세 멀끔하게 나은 팔로 나를 붙들었다. 그러라고 치료해 준 건 아니었는데.
“뭐야, 너… 지금 왜…? 나 때문이야? 잠깐, 무슨 피를 그렇게 많이 토해. 나 봐 봐. 내가 어떻게 해 줘야….”
그가 나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의 정신이 온통 내게로 쏠린 것 같아서 힘겹게 입을 뗐다.
“하던 거, 마저 해요.”
“지금 그런 안색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선 지혈 효과가 있는 약초를….”
“형. 내 상태는 내가 알아요.”
입에 감도는 비릿한 맛이 불쾌해서 저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을 애써 폈다.
“뭘 안 해도 시간이 지나면 멈춰요. 형이 집중해야 할 건 내가 아니에요.”
“…너.”
“빨리. 신경 쓰이게 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허공에 떠 있는 플라스크 쪽으로 눈짓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여러 개의 플라스크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송하견이 화난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순식간에 평소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방금까지 다급해 보였던 모습도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침착하게 고개를 돌려서 다시 마법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됐다.’
이게 내가 원하던 거였다. 잠깐 사이에 표정을 갈무리한 송하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내가 방해되지 않는다면 그걸로도 만족스러웠다.
어정쩡한 자세로 피를 토하다가 옷을 더 물들이기 전에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원을 그리는 핏방울을 바라보다가 치료하기 게이지를 확인했다. 거의 다 비워진 걸 보니 각혈도 곧 멈출 듯했다.
“…헉.”
등을 찬찬히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접촉이었기에 깜짝 놀라 몸을 굳히자 그가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내게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숙인 채여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마법 약을 만드는 중인지 플라스크 안의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너는 무리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해.”
“…….”
“반대로 생각해 봐. 내가 너를 치료하고 나서 각혈하고 있으면 너는 가만히 있을 수 있을지.”
“상황이 다르잖아요. 나는….”
“네가 말했던 것처럼 각혈하는 게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나한테는 치료 때문인 것처럼 보여.”
변명할 말은 많았지만 송하견은 내게 틈을 주지 않았다.
“네가 왜 무리하면서까지 치료하려고 하는 건지 전부터 생각해 봤어.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너를 다 내던지면서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 거잖아.”
“아니요. 내가 고작 의무감 때문에 여기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좀 서운한데. 고개를 들어 송하견이 마법을 써서 플라스크를 용사들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내게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면?”
“알면서 물어보지 마요.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면 안 했어요. 형을 치료하는 건 내 선택이고,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거예요.”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건지 어떻게 확신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서 자기 암시처럼 너를 속이게 된 걸 수도 있어.”
“콜록, 흡.”
송하견의 진지한 이야기에 목이 턱 메는 듯해서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이야.
사실 그건 송하견이 그러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다는 의미도 됐다.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건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그렇다면 이게 그가 스스로를 외면하게 된 이유일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콜록대며 숨을 가다듬고 있자 송하견은 짐짓 놀란 듯 보였다.
“괜찮아?”
“잠깐만, 형. 반대로 생각해 봐요. 내가 부상을 당해서 피를 쏟고 있으면 형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거예요?”
“아니.”
송하견이 내게 했던 말을 비슷하게 돌려주자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거봐, 자기는 그러면서.
“그렇겠죠. 형 마음이랑 내 마음이랑 같을 테니까요. 형이 진심인 것처럼 나도 진심이에요.”
“…….”
송하견은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가 설명을 더 요구하는 것 같았기에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형이 나한테 소중하니까… 아, 내가 형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뭐?”
그가 더 혼란스러워 보이는 건 내 착각일 뿐일까. 나는 그냥 송하견이 그의 ‘스스로에 대한 외면’이라는 퀘스트를 깼으면 해서 그가 뭘 원하는지 끌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말이 좀 이상하게 나간 것 같긴 했지만.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형은 나를 원하지 않나요? 아, 그게 아니라, 내가 아니더라도 형이 원하는 게 있을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뭘 말하고 싶은 거냐면요….”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네? 못 들었어요.”
부끄러움에 푹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변명하듯이 중얼거리느라 그의 목소리를 놓쳤다. 송하견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가 내 턱을 가볍게 잡아서 들어 올렸다.
“피, 멈췄네.”
그가 미지근한 물에 적셔진 손수건을 소환해서 내 입가와 턱을 닦았다. 연한 약초 향이 났다. 평소에는 그 향이 마음을 안정시켜 줬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심장이 더 뛰는 걸 보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약초일지도 몰랐다.
‘보지 않고도 마법 약을 만들 수 있구나.’
허공에서는 여전히 플라스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송하견은 내 손에 묻은 핏자국까지 손수건으로 꼼꼼하게 닦아 줬다. 그러고는 클린 마법으로 옷에 묻은 핏자국을 지워 줬다.
처음부터 클린 마법을 쓰면 됐잖아, 하는 생각이 스치듯이 들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어쩌면 그가 한쪽에서 마법 약을 만드는 데 지나치게 집중하느라 클린 마법을 쓴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견 형도 이런 실수를 할 때가 있네.’
흠이 없어 보이는 그가 약간의 어설픔을 보이는 모습에서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 같아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도 밝아 보이네.”
“이럴 때요?”
“한참 각혈하고 나서도.”
송하견이 나를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웃지 말라는 거 아니야. 괜찮아 보여서 다행인데, 정말 괜찮은 건지를 모르겠어서 말한 거였어.”
“괜찮아요. 그러니까 이건 비밀로 해 주세요. 특히 율이 형한테는요.”
앞쪽을 살펴보니 상황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송하견은 후방에 있긴 했지만 그의 꾸준한 지원도 한몫한 듯했다. 망설임 없이 그를 치료한 건 잘한 일이었다. 물론 이제 치료하기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일주일의 쿨타임을 기다려야 하긴 했지만.
“왜, 박율 형한테만?”
굳은 듯한 목소리에서 얼핏 경계심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율이 형이 텔레포트를 써서 나를 여기로 데려왔으니까요. 괜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요. 아까 율이 형이 나를 데려온 걸 형도 보지 않았나요?”
“아, 그랬지. 맞아.”
송하견은 여전히 생각에 빠진 듯 보였지만 어쨌든 수긍하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말을 안 한다고 박율 형이 모를 것 같아?”
“율이 형은 저 앞에 있고, 우리는 뒤쪽에 있으니까요.”
송하견은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박율이 전투를 하면서 이쪽 상황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클린 마법으로 주변을 다 정리했으니 따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박율이 알아챌 방법은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