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회복 약
라엔은 가볍게 웃었다. 그런데도 그 웃음이 어딘가 애달픈 것처럼 보였다. 그는 미지근한 물로 내 입을 헹궈 내게 하며 말을 이었다.
“알아요. 이한은 우리를 다 좋아하고 있겠죠.”
“다들 소중한 사람들이니까요.”
“우리를 다 좋아하고 있다는 건, 전부 똑같은 크기의 마음이라는 건가요?”
“네.”
“…리더 형에게도요?”
갑자기 그 질문이 왜 나오지? 고개를 기울이며 라엔을 바라봤다.
“리더 형을 바라볼 때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고,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어서요. 그래서 나는 그게….”
“아.”
그건 내가 박율의 운명을 알게 되었으니까. 아마도 그 이유가 전부일 것이다. 그래서 자꾸 시선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것일 터였다. 그게 그렇게 티가 났구나. 내 침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라엔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니요. 이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대답은 안 들을래요. 그것보다, 몸은 괜찮나요?”
“멀쩡해요. 원래 가끔 이러는 거 형도 알잖아요.”
“요즘에는 가끔이 아니던데요. 매일 새벽마다 각혈했던 거 알고 있어요.”
“…어, 네? 어떻게요?”
이미 들켰던 건가? 언제부터? 나름 철저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다. 다들 잠들어 있거나 텐트 안에 아예 없는 시간만 신중하게 골랐었는데.
“심증뿐이었는데 본인 입으로 말했으니 이제 다른 말은 안 통해요. 최근 몸이 좀 안 좋나요?”
지금 시간이 늦다 보니 졸려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내 입으로 순순히 말하다니.
“매일 각혈한 건 아니에요. 몸이 특별히 안 좋은 것도 아니고요. 신전에 있을 때 신과 대화하며 신력을 지나치게 썼었나 봐요. 그 여파가 아직 있는 것 같아요.”
해독 때문이라는 말을 꺼내지 말아야 했다. 그러면 다들 정말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치료받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을 돌렸다.
“하견 형이 독의 부작용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려 준 적이 있어요.”
“열이 난다든가, 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거나. 그런 거요?”
“맞아요. 그런데 마물과의 전투 중에 그런 증상이 나타나면 위험한 거 아닌가요?”
“하견이 만드는 마법 약은 약효가 곧장 도는 건 아니지만, 돌 때까지만 버티면 다시 몸이 원래 상태로 말끔하게 돌아와요.”
“그러고 나서 다시 전투에 참여하는 거고요?”
“그렇죠. 아, 하견은 주로 후방 쪽으로 빠져 있어요. 바로 약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아니, 잠깐만. 이게 지금 맞는 건가? 그동안은 막연하게 누군가 심하게 다치면 곧장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앞으로 전투할 때 나도 따라갈래요.”
“네? 안 돼요. 위험해요.”
“내가 함께 간다는 말을 안 했던 건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없어서 오히려 방해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런데 형들이 그런 식으로 버티고 있는 거라면 말이 다르죠. 내가 바로 치료할 수 있는 거 알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이한이 위험하다는 게 변하지는 않아요. 내가 괜히 걱정할 여지를 줬네요. 모든 식물이 독초인 것도 아니고, 독의 증상이 항상 심각한 것도 아니에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견 형은 후방으로 빠져 있는다면서요. 나도 그 옆에 붙어 있을게요.”
라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일어날까요? 텐트로 들어가요. 표정을 보니까 오늘은… 내가 재워 달라고 해도 안 재워 줄 것 같네요. 그래도 잘 시간이니까 가요.”
“재워 주는 게 싫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잠깐 놀란 듯하던 라엔이 부드럽게 웃으며 내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고마워요. 누구 생각을 하느라 잠이 안 와서, 그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면 금방 잘 것 같았거든요.”
막상 침대에 누워서는 내가 너무 일찍 잠드는 바람에 라엔이 잠드는 걸 보지는 못했지만, 다음 날 라엔의 컨디션이 나아 보이는 걸 보니 내가 일말의 도움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균열이 열린 장소로 텔레포트하기 위해 지도를 살피는 라엔의 몸을 꼭 붙들었다. 그가 텔레포트를 할 때 접촉하고 있으면 함께 이동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억지를 부려서라도 따라갈 수밖에.
“야, 선이한. 뭐 해.”
“안아 주는 건 좋은데요, 그래도 데려갈 수는 없어요.”
“그래, 이한아. 무슨 일 있으면 금방 돌아올게. 네가 전투가 끝난 다음에 치료해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
나를 살살 구슬리는 박율의 옆에서 송하견이 고심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옆에서 너를 지켜 줄 수는 있어. 그런데 그게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확실히 송하견에게는 부담이 갈 만했다. 그래도 그에게도 내가 옆에서 같이 치료해 주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식물의 샘플을 채취해서 마법 약을 그때그때 만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라엔이 내 머리를 가볍게 다독였다.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요. 우리가 이미 이한에게 충분히 신세 지고 있다는 거 잊지 말아요. 다녀올게요.”
“네? 잠깐….”
라엔은 내가 붙잡고 있던 로브를 벗어 내고는 순식간에 텔레포트해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뒤로도 내가 함께 이동할 수는 없었다. 텔레포트하는 라엔을 손에 로브만 쥔 채로 몇 번을 더 보내고 나서 전략을 바꿨다. 로브 안쪽으로 파고들어 그를 안자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것도 벗기를 원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내가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라엔을 바라보자 그는 눈썹을 살짝 올려 웃더니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재빨리 그를 안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귀 빨개졌는데.”
그러고선 ‘다녀올게요.’ 하고 가볍게 웃으며 순식간에 텔레포트했다.
이후로 바로 포기한 건 아니다. 다음 날에 내가 ‘안 벗을 거잖아요.’라고 말하며 계속 라엔을 붙들고 있자 그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해요? 이한이 그렇게 바란다면 못 할 것도 없는데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아니, 진짜 벗으려고요?”
내 손에 라엔의 로브뿐만 아니라 그가 벗은 셔츠까지 들렸다. 잔근육이 탄탄히 잡힌 몸이 드러났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부끄러워하면서도 계속 보고 있는 걸 보니까… 마음에 들어요?”
“…아니, 그런 적 없어요.”
“다들 먼저 텔레포트해서 여기에는 우리 둘뿐이잖아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아니면 이걸로는 부족한가요?”
“아니요? …형, 그만 놀려요.”
말이 괜히 더듬더듬 나왔다. 그의 살갗이 스치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나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달아올라 있을 얼굴을 양손으로 서둘러 가렸다.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좋으면 좋다고 말해도 되는데. 다녀올게요.”
나중에야 민주혁에게 물어봐서 알았지만 라엔은 텔레포트 한 후에 새로운 옷을 소환해서 다시 입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이후로 라엔을 붙잡아서 같이 이동하는 방안은 더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를 데려가지 않으려 한다는 거니까.
‘박율이나 송하견, 민주혁에게 부탁하기는 어렵겠지.’
어느 정도 거리를 텔레포트하는 건지 모르니 같이 이동하는 데 마나가 얼마나 소모될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라엔은 마나량이 많다고 했으니 그나마 내가 먼저 부탁하기가 괜찮기는 했지만.
물론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내가 부탁하더라도 누구든 나를 데려가지는 않을 터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신전에서 가져왔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책의 초반부에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읽다 보면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앞에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책장이 저절로 두어 장 넘어갔다. 텔레포트를 할 때 생기는 특유의 바람이었다. 벌써 돌아올 리가 없을 텐데.
“율이 형?”
“이한아, 잠깐 같이 가 줄래?”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곧바로 박율의 손을 붙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하견이 상태가 안 좋아서, 부탁할게. 너를 그런 데 데려가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서….”
“아니요, 데려가 줘서 고마워요.”
텔레포트해서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급하게 돌아간다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민주혁이 방어막을 두르고 라엔이 덩굴과 나뭇가지에 스며든 마물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수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박율 형님!”
“이한아, 부탁할게. 하견이는 저쪽에.”
박율은 곧바로 달려가서 민주혁이 붙잡아 둔 마물에 검을 박아 넣었다. 검이 박힌 마물은 파스스 흩어졌으나 여전히 수많은 마물이 공격해 오고 있었다.
“괜찮다고 했는데 기어코 너를 불러왔네.”
“안 괜찮아 보여요.”
송하견은 후방에서 플라스크 여러 개를 띄워 놓고 마법 약을 만들어 지원하고 있었다. 한쪽 팔뚝의 깊게 베인 상처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채로. 그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땅에 고이고 있었다. 반쯤 풀려 있는 붕대는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바로 치료할게요. 왜 상처 지혈도 제대로 안 하고 있었어요?”
“지혈이 안 되는 건 독 성분 때문이야. 여러 성분이 복합되어 있는 독이어서 해독약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어.”
그러면 내가 치료하기로 처음부터 해독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에게로 뻗던 손을 잠깐 멈추고 치료하기 게이지에 눈을 흘끗 돌렸다. 남아 있는 공간은 반절이 조금 덜 됐다. 가능할까?
‘맞아. 회복 약이라는 보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눈앞에 상태 창이 떠올랐다.
「‘회복 약(1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하겠다고 생각하자 손안에 푸른 빛이 반짝이더니 뭔가가 쥐어졌다. 사탕처럼 생긴 동그란 환이 투명한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이걸 먹이면 되는 건가.
「‘회복 약(1회)’ 사용 방법!
보상을 얻은 ‘힐러’ 자격을 갖춘 사용자가 3초 이상 머금어 활성화합니다. 씹지 않고 삼키면 효과가 나타납니다.
효과: 상태 이상 등 해제 및 신체의 회복」
…어? 사용 방법이 이러면 나만 쓸 수 있다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