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독초
주변에는 식물이 우거져 있었다. 주위를 잠깐 돌아보던 송하견은 흰색 장갑을 소환해서 손에 꼈다.
“뭐 해요?”
“한 걸음 떨어져 있어. 확인할 게 있어서.”
송하견은 나를 물러나게 하더니 바로 앞에 허리께까지 자라난 풀에서 작은 잎을 하나 떼어 냈다. 그는 잎을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반으로 잘라서 투명한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 안에 넣었다. 그가 플라스크를 가볍게 돌리자 액체가 붉게 변했다.
“…박율 형.”
“독초구나. 그렇지?”
“응.”
송하견은 플라스크 안에 있는 액체를 땅바닥에 쏟아서 버렸다. 건조한 땅에 액체가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초입에도 이렇게 퍼져 있다면 깊숙이 들어갈수록 더 심할 거야.”
“이런. 예상하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텔레포트는 이곳 환경을 꼼꼼히 살펴본 다음에 쓸 수 있겠어요. 독초 군락 사이로 텔레포트하기라도 하면 곤란할 테니까요.”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식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민주혁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여기 있는 식물이 전부 독초인 거야?”
“이제 자연스럽게 만지네.”
“뭐를? 식물에 손 안 댔는데.”
“아니, 그거 말고 나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을 가늘게 뜨고 민주혁을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전부 독초인 건 아니야.”
“그러면 독이 있는 식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다 비슷해 보이….”
“이한아, 조심해야지.”
송하견이랑 라엔과 얘기하고 있던 박율이 갑자기 내 손을 가로채듯이 잡았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식물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송하견이 장갑을 끼는 걸 보고 함부로 만지지 말아야겠다고 분명히 생각했었는데.
“야, 너는 어떻게 위험한 행동만 골라서 하냐. 마음을 못 놓겠네.”
“내가 언제. 지금은 잠깐 다른 생각 하다가 깜빡한 거야.”
민주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그냥 넘기기로 했다.
“율이 형, 고마워요. 그런데 만지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거예요?”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 이 식물은 상처에 닿는 것만 조심하면 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웬만하면 안 건드리는 게 좋아.”
“주의할게요.”
“그래. 네가 앓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거든.”
독초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나는 시스템이 있으니 괜찮을 듯싶었다. 내부에 이상이 있어도 고통이 없다면 겉으로 표가 나지 않을 테고, 목숨에 위협이 갈 만한 거라도 저절로 나을 거다.
‘그런데 용사들은?’
독초도 독의 일종이니 중독이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치료하기로 해독하는 것도 가능한 걸까?
“어디쯤에 거처를 정해야 할지 위쪽에서 보고 올게요.”
라엔의 목소리에 이어지던 생각이 끊겼다. 그래, 해독에 대한 건 미리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들 조심할 테고, 송하견이 마법 약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으니 해독약도 제조할 수 있을 가능성이 컸다.
공중에 높이 떠 있던 라엔은 얼마 지나지 다시 내려왔다.
“나무가 빽빽해서 시야가 탁 트이지는 않는데, 적당히 머물 만한 곳은 찾았어요.”
“다행이다. 지도에 표시해 줄래?”
“여기예요. 이 주변에는 식물이 몇 없고 나무만 듬성듬성 있어서 텔레포트로 이동해도 돼요.”
“그러면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라엔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내 등 뒤에 서서 나를 보호하듯이 감싸 안고 텔레포트를 썼다. 그의 로브가 내게로 감겨서 정말 꽁꽁 싸맨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자기가 괜찮을 거라고 말하고도 안심이 안 되는 듯했다.
‘내가 아니라 당신들을 먼저 걱정해야 할 상황인데.’
치료하기로 해독까지 가능할지 불명확한 상황이었다. 내 몸에도 치료하기를 쓸 수 있었더라면 바로 시도해 보고 결과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박율은 적당한 자리에 큼직한 텐트를 하나 소환했다. 언제 봐도 편리하고 신기한 마법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올 건데, 이한이는 그동안 여기서 있을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같이 가면 좋겠지만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몰라서요. 여기가 더 안전할 거예요.”
주변의 지리를 파악하려는 거라면 용사들은 다 같이 가고 나는 이곳에 남는 편이 나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지도를 펼쳐 두고 길을 나섰다.
“쉬어.”
“자고 있든가. 다녀올게.”
민주혁은 아까 내가 옆구리를 찌른 걸 그대로 되돌려 주듯 기어이 내 뺨을 쿡 찌르고는 형들에게로 뛰어갔다.
‘신전에서 가져온 책을 읽어 볼까.’
품에서 책을 꺼내서 펼쳤다. 뭔가 대단한 거라도 적혀 있을 줄 알았건만 몇 페이지를 넘겨 보니 그다지 특별할 건 없었다. 신전의 규율이나 복식, 그리고 신전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정리된 책이었다. 초반부만 읽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지났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이쪽으로 바람이 훅 불었다. 다들 텔레포트를 써서 이동해 왔다.
“뭐야, 다쳤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둘러보고 오기만 한다던 사람들이 왜 한바탕 마물을 상대하고 온 것처럼 보이는 거지.
민주혁이 가장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그는 박율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부축받은 채였는데 박율에게 뭔가를 말하더니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 옆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야, 괜찮아? 무슨 일인데.”
“……. 땅이 울렁이는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인 민주혁의 이마 아래로 땀이 방울져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민주혁 대신에 다른 이들에게서 재빠르게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균열이 열린 지 꽤 되어서 마물이 이미 다른 곳에 스며들어 있었어요. 그게 하필 독을 가진 식물이었고요.”
“가시가 있는 얇은 덩굴이 발목을 휘감아서, 쓸린 상처로 독 성분이 체내에 들어간 것 같아. 바닥 쪽으로 접근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착잡하다는 듯이 말한 박율은 민주혁의 등을 두들겨 보고 안색을 살피며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민주혁의 발목에 옅은 상처가 보였다.
“식물의 샘플을 채취해서 마법 약은 바로 만들었어. 상처가 난 부위에는 뿌렸는데 약효가 빨리 안 나타난다면 힘들어도 직접 마셔야 돼. 아니면….”
“도와줄래, 이한아? …네가 무리하지 않는 일이라면.”
박율이 망설이듯 말했다. 내가 무리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러면 내가 무리하게 되는 일이라면 하지 말라는 뜻인 건가.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내게 어떠한 부담도 지우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명백하게 내가 신력을 쓰는 걸 꺼리고 있었다. 만약 민주혁이 아닌 박율 자신이 부상당한 상황이었다면 그는 기어코 치료해 달라는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을 터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당연히 해 볼 생각이었어요. 시간 끌어서 미안해, 민주혁.”
“아니, 괜찮….”
“고마워. 부탁할게, 이한아.”
바닥을 짚은 민주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민주혁’
치료하기 / 가져오기」
‘치료하기.’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다행히 성공했다는 상태 창이 뜨긴 했다. 민주혁의 발목에 난 상처도 말끔히 사라졌다.
“괜찮아?”
“…어. 아까는 진짜, 세상이 빙빙 도는 줄 알았어.”
민주혁이 과장하듯이 말하며 내게 몸을 그대로 기댔다. 말투야 장난스럽지만 그게 사실이었다는 걸 안다. 고생했을 민주혁의 등을 마주 안아서 다독였다. 내게 괜히 더 파고드는 듯한 느낌은 아마 착각일 테다.
‘치료하기 게이지가 더 많이 찬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이전에 게이지가 어디까지 차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게이지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거의 끝까지 차 있었다.
“그 식물의 독이 감각 기관 교란을 일으키는 종류였거든. 이제는 멀쩡해 보이네, 민주혁. 떨어져.”
“나는 괜찮아요. 좀 더 기대 있어, 민주혁. 그것보다 형, 독의 종류에 따라서 해독약을 다 다르게 만들어야 해요?”
“…독의 종류가 아니라 식물의 종류에 따라서. 부작용이 비슷하더라도 결국은 독 자체를 중화시켜야 되고, 독의 구조는 식물별로 다르니까.”
“하견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마법 약을 그렇게 금방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걸요.”
송하견과 라엔, 그리고 박율까지 치료하며 살펴보니 지금은 치료하기 게이지가 차는 속도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독에 당한 건 민주혁뿐인가요?”
“맞아. 주혁이가 공격받고 나서 서둘러 마무리하고 곧바로 돌아온 거니까.”
설마 해독할 때는 더 많은 게이지가 차게 되는 건가. 이제는 작은 틈만 남겨 두고 채워져 있는 치료하기 게이지를 바라봤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들의 힐러로서 어떻게든 이들을 치료할 거니까.
‘오늘 밤에 게이지를 당장 비워 내야겠네.’
앞으로는 밤이 바쁠 듯싶었다.
◇
치료할 때마다 꾸준히 살펴본 결과 해독할 때는 치료하기 게이지가 더 많이 차는 것이 맞았다. 며칠에 한 번 꼴로 게이지를 비워 내기 위해 밤마다 텐트 밖으로 몰래 나와야 할 정도였다. 그간 들키지는 않았지만 숨죽여 행동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대기는 했다.
‘송하견이 마법 약을 통해 1차적으로 해독을 하는데도 그러네.’
그가 아니었더라면 독 해독하다가 밤이 되기도 전에 치료하기 게이지가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일주일간 쿨타임을 기다려야 했겠지.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콜록. …욱.”
어둠 속에서 깜빡이며 줄어드는 게이지를 올려다봤다. 남은 건 절반 정도.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닦아 냈다. 밤하늘에 모처럼 커다란 달이 떠 있어서 그쪽으로 멍하니 시선이 갔다.
“고개 숙여요.”
작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다가온 그가 내 뒷머리를 조심스레 눌렀다.
“라엔 형? 읏, 콜록…. 갑자기 왜….”
“말하지 말고 피 뱉어요.”
“…잠이 안 와요?”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손길이 뚝 멎었다.
“지금 내 걱정하는 거예요?”
“네.”
“고마운데, 그러지 마요. 지금 상황만 봐도 누가 누구를…. 제발 자기 걱정부터 좀 해요.”
피가 거의 멎어 가기에 품에서 클린 마법이 담긴 종이를 꺼냈다. 라엔은 종이를 찢으려는 내 손을 감싸 쥐더니 자기가 직접 피가 묻은 피부에 손을 대 가며 클린 마법을 써 줬다. 내 입가를 찬찬히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형도 내 걱정 먼저 하잖아요.”
“나는 이한을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이한도 나를 좋아하고 있나요?”
“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떨리는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한 라엔이 입술을 짓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