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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15화 (115/150)
  • 115화.

    말라붙은 늪지대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고 등을 돌렸다. 밖은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달빛 아래서 백색 신관복이 연하게 빛났다. 그는 달빛을 등지고 있었으나 서고의 불빛 때문에 그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스승님.”

    그는 쓰게 웃고 있었다. 스승님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나는 나의 어떤 행동 때문에 스승님이 힘들어하는가 고민하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내가 뭔가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내 탓이 아닌 일이었다.

    “미안하단다, 이한아.”

    물론 그건 스승님 탓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이 잘못한 건 없어요. 신이 나를 선택한 거지 스승님이 나를 떠민 게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내가 네게 무엇도 말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단다.”

    “처음에는 그게 속상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지난 일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으니까요.”

    스승님은 고개를 천천히 젓고서 말을 이었다.

    “네게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말로 내뱉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만 차마 다 털어놓을 자신이 없구나.”

    “무슨 상황이었는지 내가 다 알고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아니면 괜찮다는 말로는 부족한가요? 이미 용서했어요. 용서하고 말고를 따질 일도 아니었지만요.”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꽤 있단다. 괜찮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제로는 괜찮지 않을 때도 있지.”

    그제야 스승님이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내가 뒤로 물러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정해야 했다. 나는 실은 아직도 스승님 앞에 서는 게 괜찮지 않을지도 몰랐다. 배신감 때문인지 서운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등 뒤로 울퉁불퉁하게 꽂혀 있는 책 모서리가 닿았다.

    “너는 자각하지 못하는 새에 너 자신을 쉽게 속일 수 있단다. 그러니 네 생각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에 집중하렴. 네게 마지막으로 이 말은 꼭 해 주고 싶었단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답은 항상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있어.”

    “…….”

    “가끔 처음부터 네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했단다. 그랬다면 네가….”

    스승님의 목소리를 끊어 내고 똑똑, 하고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신경질적으로도 들렸다. 문은 이미 열려 있을 텐데.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말하는 게 위선이라는 것은 아십니까.”

    문에 삐딱하게 기대어 선 박율이 팔짱을 끼고 말을 이었다.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제가 대답해 드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질문을 바꾸지요. 이 구석진 건물까지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박율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스승님과 대화를 나눌 때의 차가운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에 연한 미소를 그린 채였다.

    “왜일 것 같아, 이한아?”

    “나를 보러요…?”

    “이제 잘 아네. 내일 떠날 거니까 얼른 재워야겠다 싶어서.”

    내일 떠난다면 책을 방에 가져가도 읽을 수가 없었다. 책장에 다시 꽂아 둬야겠네.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책은 그냥 가져가도 좋단다.”

    “감사합니다. 이만 가 볼게요.”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스승님께 인사하고 서고를 나서자 박율이 내 옆에서 걸음을 맞춰 걸었다.

    “대신관이 네게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았어?”

    “그다지요. 미안하다는 말만 들었어요. 그것도 이상한 말이라면 이상한 말이겠지만요.”

    “…지금은 행복해?”

    잠깐을 망설이다 나온 물음이 꽤나 갑작스러워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입으로 간지러운 말을 직접 하기는 어색했지만 뭐라도 노력해 봐야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형이 옆에 있어서요.”

    “지금을 말한 게 아니라 요즘을 말한 거긴 한데, 그래도 그런 말을 들으니까 좋네.”

    “요즘에도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을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서 형이 금방 찾으러 왔잖아.”

    박율이 밝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해. 지나간 기억 위에는 새로운 기억이 쌓이니까. 네게는 좋은 기억만 쌓이기를 바랐거든. 다행이다, 행복하다고 해서.”

    그런데 당신이 죽고 나면 그 기억은 다 사라지게 되는 거잖아.

    울컥 차오르는 말을 애써 내리눌렀다. 나는 박율에게 따지거나 화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냥 너무 쉽게 운명을 받아들여 버린 그의 생각을 돌리고 싶을 뿐이다.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는데 띠링, 하는 기계음이 들려서 발을 삐끗했다.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Ⅳ 실패!

    페널티 ‘간헐적 코피’가 지속 시간 ‘1주’ 동안 유지됩니다.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Ⅴ

    성공 시: 박율의 개척 획득

    실패 시: 간헐적 각혈 1개월 페널티

    제한 시간: 1개월

    박율이 내 팔뚝을 붙들고 있다가 나를 다시 제대로 일으켜 세울 때까지 퀘스트 창을 멍하게 바라봤다. 그래, 그러니까 이 퀘스트가 성공하는 건 반드시 보고 싶었다.

    “이렇게 잠깐만 눈을 떼어도 위태로운 건 처음이랑 하나도 안 변했네. 이런 것도 같이 변하면 좋을 텐데…. 이한아? 어디 아파?”

    “아니요.”

    눈동자를 굴려서 박율을 바라봤다. 나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생각 좀 하느라요. 내가 형한테 어떻게 해야 할지를요.”

    “어떻게 하고 싶은데?”

    “형은 나한테 어떻게 하고 싶어요? 나도 그거랑 같은 마음일걸요.”

    박율도 나를 계속 옆에 붙들어 놓고 싶은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자만이라면 할 말 없지만 지금껏 그가 보여 온 태도를 보면 그랬다. 사실 박율뿐만이 아니라 다른 용사들도 그런 느낌으로 나를 대하기는 했지만….

    “아닐 텐데.”

    단호한 목소리에 생각이 뚝 끊겼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율을 바라보자 그가 내게로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 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르잖아.”

    귀에 와 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문득 그가 내 귀를 잘근 물었던 게 생각나서 파드득 떨었다. 재빨리 한 발짝 떨어져서 양손으로 한쪽 귀를 가리고 있자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봐, 이 정도로 얼굴이 새빨개졌네.”

    “그건 형이…. 그것보다 이 정도라니요? 더한 것도 생각했나요?”

    “글쎄. 이한이가 생각하기 나름이지.”

    “빨리 방에 들어가기나 해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박율을 잡아끌듯이 해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는 내내 내가 귀엽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은 오는 길보다 훨씬 수월했다. 메스꺼움 페널티의 유무가 이렇게나 큰 영향을 끼친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라엔은 내가 저번에 먹었던 것과 같은 약을 다시 먹어도 될지, 차라리 안 먹는 게 더 나을지 고심했다. 물론 그사이에 내가 그의 손에서 약병을 빼앗아 순식간에 삼켰다.

    그 약은 분명히 효과가 좋을 터였다. 저번에는 페널티 때문에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그러니까 라엔이 이번에 내가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괜한 자책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속은 괜찮아?”

    “완전 멀쩡해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송하견이 멈춰 세웠다. 이번에는 올 때와 반대로 송하견, 박율과 같은 마차에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가는 길이 꽤 걸릴 테니까 조금 자고 있자.”

    자기 허벅지를 톡톡 두들기며 나를 바라보는 박율의 손에는 이미 담요가 들려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고 가면 나중에 형 다리 저려요.”

    “가벼워서 괜찮아. 느낌도 안 날걸.”

    “그러면… 고마워요.”

    박율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구태여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그의 다리를 베고 눕자 그가 손으로 내 눈가를 가려 줬다. 담요까지 덮어 주니까 완벽하게 잠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어쩌면 내가 많이 자게 된 건 나른한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몽롱한 정신으로 실없는 생각을 한참 하는데 조용하게 대화하는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지금은 상태가 괜찮은 것 같지?”

    “…저번보다는 훨씬.”

    “그때는 정말 신전에 가는 게 심적으로 부담이 돼서 그랬던 건가 보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처음부터 같이 오지 말았어야 했나.”

    “선이한이 오고 싶어 했던 거니까.”

    “그래, 그건 알아. 그래도 하견이 너도 들었다시피 신전에서는 다들…. 어쨌거나 이한이에게 좋은 공간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 정도였을 줄은 몰랐어.”

    가만히 듣자 하니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거람. 그때는 메스꺼움 페널티를 받는 중이었고 지금은 아닐 뿐이었다. 부정하기 위해서 잠겨 있는 목을 가다듬었다.

    “큼,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안 자고 있었네.”

    “형들이 말한 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알아, 고생했어.”

    내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 손길 때문에 순식간에 잠들어 버렸는지, 다시금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을 때는 마차가 이미 레데오에 도착한 후였다.

    “이한, 이번에는 약이 효과가 있었나요?”

    “네. 고마워요, 형. 덕분에 멀미 하나도 안 하고 왔어요. 형은 괜찮아요?”

    내가 분명히 사실대로 대답했건만 라엔은 박율과 시선을 한 번 교환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은 레데오에서 휴식을 취할 거예요. 그러고 나서 다른 지역으로 출발할 거니까 마음 놓고 몸도 풀어요.”

    “어디로 갈 거라고 했었죠?”

    “늪이 있는 지역으로 갈 거야. 늪이 다 말라붙어 있어서 그렇게 습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네요.”

    더위를 잘 타지는 않았지만 습한 건 좋아하지 않았다.

    “야, 그러니까 이제 들어가자. 쉴 때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거 알지? 잠깐이라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고.”

    민주혁이 손목을 잡고 이끄는 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살짝 드러난 손목에 민주혁이 채워 줬던 팔찌가 보였다. 기분 탓이겠지만, 그 팔찌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채워져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제 출발할까요.”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하는 라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간의 휴식으로 몸이 한결 개운했다. 라엔에게 기대며 몸을 끌어안자 그가 조금 긴장한 듯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차분하게 손을 들어 올려 내 눈을 가려 줬다.

    「‘말라붙은 늪지대’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띠링, 하는 알림음과 함께 눈을 떴다. 상태 창은 지직거리더니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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