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죽지 마
민주혁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이한.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음, 일단 그렇게까지 생각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내가 괜히 착각했구나 싶었어.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됐는데.”
“아니, 뭐를?”
민주혁이 큼직한 손으로 내 왼쪽 손목을 으스러뜨리듯이 쥐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피가 잘 안 통하는 느낌이 들긴 했다.
“너는 지금 여기에, 이 자리에 있어. 나는 너를 제대로 보고 있어. 봐, 우리 지금 눈 맞추고 있잖아.”
“야, 너 울어?”
“아니. 울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고개를 갸웃하며 민주혁을 바라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상황에 대한 막막함이 가장 컸는데, 민주혁이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니까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이제는 그가 대체 왜 이러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너를 좀 더 빨리 만났어야 했는데.”
“갑자기?”
“어. 그러면 좀 더 나았을까.”
“뭐가?”
민주혁이 나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
민주혁은 자기를 바라보는 선이한과 눈을 맞추며 생각했다.
‘선이한. 너는 신전에서 줄곧 혼자였을 테니까.’
말을 삼켰다. 지금 선이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방금까지 보였던 암울함은 티끌만큼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선이한은 감정을 숨기고 꾸며 내는 데 능숙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준비됐어요. 지금이라도 죽을 수 있어요.
차분하게 흘러나왔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런 말을 내뱉기까지 얼마나 홀로 속이 문드러졌을까.
선이한의 창백한 얼굴만 하염없이 뜯어봤다. 가느다란 목, 소매를 물들인 혈흔,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 그 위태로운 모습에 마음이 내려앉는 듯했다.
형님들과 함께 선이한의 스승이었던 대신관을 만났었다. 선이한이 신전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가장 잘 알고 있을 이였기에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는 요량이었다. 그러나 며칠째 계속되는 질문에도 대신관은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하면서도 쉬이 입을 열지 않는 모습에 분통이 다 터졌다. 그러다가 박율 형님이 그 얘기를 꺼냈다.
-당신을 제외한 신관들은 선이한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까.
순간 차갑게 내려앉은 정적 사이로 대신관이 그제야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아셨나요.
-이한이 얘기를 듣고 전부터 의심은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여기 온 이후로 신관들의 태도를 보고 확신한 겁니다.
-이미 다 아셨다면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이한이에게는 비밀입니다. 충격이 클 테니까요.
숨을 깊게 내쉰 대신관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신께서 이한이에게는 사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한이는 신의 힘을 받았고, 그 신의 힘 때문에 신관들은 이한이에게 이질감을 느낄 게 분명했습니다.
-설마 그래서….
-예. 그래서 신께서는 나를 제외한 다른 신관에게서 이한이의 존재를 지웠습니다.
송하견 형님이 이를 으득 물었다.
-그걸 가만히 두고 봤나?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하나 저러하나 결과는 비슷했을 겁니다. 존재를 지우지 않았더라도 신관들은 이한이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피했을 테니까요. 차라리 혼란을 주지 않는 방법이 더 낫지요. 따지고 보면 전부 이한이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라엔 형님이 드물게 침착함을 잃은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박율 형님은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다음 말을 이었으나, 나는 그 내용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장 선이한을 봐야 했다. 처음 만났을 적 선이한의 모습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별관의 휑한 방을 배경으로 서서 창백한 안색으로 나를 바라보며 옅게 웃던 모습.
선이한은 그 방 안에서 줄곧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대신관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보지 못하고, 심지어 본인은 그걸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늘 자기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을까.
‘지금 선이한은 기도실에 있겠지.’
텔레포트를 쓸 수 없었기에 폐가 터질 듯이 뛰고 있는데도 기도실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선이한의 얼굴을 당장 보고 싶었다. 그가 그 자리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고,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아리고 간절한 마음이 드는 건 선이한을 향한 마음이 단순한 우정이 아닌 애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선이한을 신전의 작은 방 밖으로 처음 끌어낸 사람이다. 게다가 나는 선이한의 손목에 남은 상처와 흉터를 보기도 했다.
‘그것도 그냥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간 얼마나 힘겨웠을지 그 상처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와 함께 지낸 이후로는 더는 상처를 내지 않는 듯했으니까.
그렇게 살짝 열려 있는 기도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선이한이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한 것은 지금이라도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그런 말이었다.
“야, 민주혁. 무슨 생각해.”
선이한이 내 눈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었다. 태연한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평소와 같은 표정을 만들어 냈다.
“이제 코피 다 멈췄어. 고마워.”
“어…. 응.”
멍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고 선이한이 키득 웃었다.
“아까 내가 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구나. 그럴 필요 없어. 그건 그냥… 별거 아니었어. 정말로.”
중간에 잠깐 고민하던 선이한이 별다른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는지 얼렁뚱땅 말을 맺었다.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선이한이 내가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으므로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았어. 그래도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그래.”
선이한이 말갛게 웃었다. 그게 더 마음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선이한을 꼭 끌어안았다.
◇
선이한은 민주혁에게 안겨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시원한 향기.’
민주혁에게서는 바람결처럼 연한 향기가 났다. 그런데도 나를 안고 있는 체온은 데일 것처럼 선명했다. 흐느끼기라도 하는지 가늘게 떨리는 몸이 안쓰러워서 나도 그를 마주 안았다.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기도실에는 무슨 일로 왔어?”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내가 며칠쯤 기도실 밖으로 안 나간 줄 알았네. 들어온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몇 시간도 안 됐는데 안에서 혼자 코피 흘리고 있던 건 누구야?”
“음….”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니 꼭 내가 매번 그러고 다녔다는 것처럼 들렸다. 민망함에 웃으며 민주혁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그는 내가 바라는 대로 하겠다는 듯 나를 안고 있던 몸을 천천히 풀었다.
“자, 어쨌든 이제 멀쩡한 거 봤지? 언제까지 여기 있으려고. 이제 돌아가자.”
민주혁이 여기 온 이상 오늘 신에게서 뭔가를 더 들을 수는 없었다. 먼저 몸을 돌려서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내 손목을 민주혁이 붙잡았다.
“죽지 마.”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평소의 장난스러운 구석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해 보였다.
“아까도 그 얘기 했잖아. 그건 그냥 어쩌다 보니 나온 말이었어. 정말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알아. 그래도 제대로 약속해.”
“그래. 약속할게.”
“…못 믿겠어.”
‘그러면 더 어떻게 하자는 거야.’ 하고 투덜대기에는 민주혁도 자기가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디 갈 때마다 말할게. 네가 걱정 안 하게.”
“이거 받아.”
민주혁은 품에서 가느다란 팔찌를 꺼내 내 손목에 걸었다. 신기하게도 내 손목에 딱 맞는 크기인 팔찌는 얇은 은색 체인이 빙 둘려 있는 모양이었다.
“마나가 담겨 있는 팔찌야. 내가 마법을 쓰면 네 위치를 찾을 수 있어. 한 번만 사용할 수 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민주혁은 진심인 듯 보였다. 이런 걸로 마음이 놓인다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거야?”
“어. 쓰는 순간 팔찌가 깨지거든. 기억해, 이게 깨어지면 내가 너를 걱정해서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뭘 하고 있든 당장 그만두고 멀쩡하게 있어.”
“명심할게.”
내가 팔찌를 손끝으로 두들기며 가볍게 웃자 민주혁은 그제야 평소처럼 여유롭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제야 믿음이 가네. 자, 그만 나가자.”
민주혁은 내 소매를 잡아끌고 기도실 밖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를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게 하고 싶다는 것처럼.
◇
그로부터 며칠을 더 기도실에 꼬박꼬박 방문했으나 ‘내가 대신 죽어도 되는가’ 혹은 ‘다른 방법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만 얻었다. 신전에서 살 때 신의 말은 절대적이라고 배우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동의할 수 없었다.
안 된다고 할수록 오기가 생기는 법이기에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만 굳건하게 다져졌다. 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 눈앞에 닥친 현실이 아니기에 실감이 나지 않아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는 듯했다.
‘신에게 묻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
그렇다면 서고로 가 볼까. 어쩌면 쓸모 있는 책이 있을지도 모른다.
서고는 별관처럼 따로 떨어진 건물에 있었다. 전등 스위치를 찾아서 누르니 주황색 등이 몇 번 깜빡이다가 켜졌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공간에 책장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책장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듯한 책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여기는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보관하는 공간이니까.’
책을 골라서 방으로 가져가 읽을 예정이었다. 곧 레데오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그게 언제쯤이려나. 책 한 권 정도 읽을 시간은 있겠지, 생각하며 책장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책을 발견했다.
‘미래시.’
처음 퀘스트를 받았을 때 읽었던 두꺼운 책이었다. 스승님이 서고로 다시 가져다 두셨구나. 책을 꺼내 보니 손목에서 뚜둑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묵직했다. 다시 읽으라고 하면 절대로 못 읽을 두께였다.
미래시 책을 다시 자리에 꽂아 두는데 바로 옆에 꽂혀 있던 손바닥만 한 책이 툭 걸려서 떨어졌다.
‘제목도 안 적혀 있네.’
내용을 확인해 보려고 책장을 넘기는 순간 뒤쪽에서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감에 몸이 경직됐다. 내가 못 올 곳을 온 건 아니었지만 신관님들과 마주하는 건 껄끄러웠다. 그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도 내가 그들을 무시하는 것도 불편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신경을 쓰지 않은 채로 내 할 일을 했다. 책장을 두어 장 넘겼으나 당연하게도 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안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깥 공기가 서고의 텁텁한 공기를 밀어 내며 스며들었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듯했다. 내가 자기를 봐 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