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11화 (111/150)

111화.

같이 자요

송하견은 평소의 담담한 얼굴로 돌아와 나를 침대에 바르게 눕혔다.

“다리가 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아?”

“네, 괜찮아요. 힘만 안 들어가는 것뿐이에요.”

“그래. 내일 다시 볼게.”

그가 내게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은 약속한 대로 내가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 페널티가 끝나고 내가 다리를 멀쩡히 움직여 침대에서 나오는 걸 보고는 ‘자고 일어나면 낫는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하고 묻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넘어가 줘서 다행이었다.

끼익, 낡은 소리를 내며 기도실 문이 열렸다. 이번에야말로 기도실 안으로 제대로 들어왔다. 밤이 아닌데도 어두침침한 내부에 작게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신과 대화하는 방법은 가 보면 알 거라고 했는데 여전히 감도 안 잡힌다, 그렇게 생각하며 단상 위에 선 순간.

【기다리고 있었단다, 아이야.】

언젠가 들었던 것과 똑같은 신의 음성이 기도실 전체를 메아리치듯 울렸다.

허공에서 피어난 물빛 꽃이 내게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이것도 언젠가 본 적 있는 꽃이었다. 신의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꽃이 낙하하는 걸 보니 힘을 현신할 때 생기는 건가.

【네 생각이 맞단다.】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대답하는 걸 보면 내 생각을 신이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어서 지금 가장 묻고 싶은 것부터 입 밖으로 꺼냈다.

“시스템은 당신의 힘인가요?”

【그렇단다. 다만 내 통제를 벗어난 힘이니 온전히 나의 힘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 그래, 자세히 설명하려면 네게 직접 보여 주는 게 낫겠구나. 눈을 감아 보련.】

감은 눈 위로 누군가 손을 덧댄 것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눈앞에 내가 보였다. 아니, 그는 나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나 자신은 아니었다. 가장 처음 시스템을 봤던 날 꿈속에서 보았던 그 소년인 듯했다.

그가 보고 있는 작은 화면 안에서 게임 캐릭터들이 화려한 이펙트를 내며 움직였다. 기다란 검을 든 이, 로브를 입은 이, 모노클을 쓴 이, 갈색 머리칼을 가진 이. 그 캐릭터들의 외형은 내게 무척이나 익숙했다.

곧이어 빠밤, 소리를 내며 커다란 글자가 작은 화면 전체를 메웠다.

「히든 엔딩.」

그걸 보고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떴다.

나는 텅 빈 기도실에 여전히 홀로 서 있는 채였다. 떨려 오는 몸을 애써 무시하며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모든 게 다 게임인가요? 정말로요?”

【아니란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내가 바랐던 답이었다. 안도감에 순간 힘이 빠져서 무릎이 푹 꺾였다.

【그건 평행 세계일 뿐이란다. 그쪽 세계에서는 한낱 게임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현실이지. 어렵느냐? 쉽게 생각하려무나. 지금 이 세계의 너는 틀림없는 현실을 살고 있단다.】

비현실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상태 창이 보였던 그 순간부터 이미 현실의 범주를 훨씬 벗어났기에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일단 그건 알았어요. 그러면 나랑 똑같은 모습의 그 사람은 누군가요? 평행 세계라고 했으니까 나는 아닌 것 같은데요.”

【다른 세계의 너란다. 네 생각처럼 너와 같은 모습이되 너와 동일한 이는 아니야. 서로 세계도 운명도 다르니. 다만 영혼의 파장이 비슷하여 그 아이의 기억을 네게 옮길 수가 있었단다.】

“기억이요?”

인상까지 찌푸려 가며 생각해 봤지만 도통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 같은 걸 받은 적이 없어요. 아닌가요?”

【…기억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렇지만 내가 간과한 게 한 가지 있었단다. 나의 힘은 내게서 벗어나면 불완전해진다는 거지.】

“그래서 실패했다는 거군요. 알았어요.”

【감히 실패라고 말하다니 당돌하구나.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은 것뿐이지 너는 이미 그 기억을 보았단다. 시스템이 네 눈앞에 처음 나타났을 때, 네가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기억의 파편이지. 단편적이었기에 네가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시스템을 처음 보았던 날의 그 장면을 말하는 거구나. 그런데 왜 하필 그때였을까. 열일곱 살의 그 날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수많은 날 중 하루였다.

【네가 나의 힘을 받아 내었을 당시에 너는 너무 어렸단다. 그래서 네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가 찰 때까지 봉인해 두었지. 그 시기가 되었을 뿐이란다.】

“내 생각 마음대로 읽지 말아요. 그래서 정확히 무슨 기억을 나한테 옮기려고 했던 건데요?”

【이 세계에는 정해진 결말이 있어. 아이야, 너는 그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란다.】

“무슨 결말…. 아니, 그것보다 왜 그걸 바꿀 수 있는 게 나인데요?”

【다른 세계의 네가 숨겨진 결말을 찾아내었으니, 네 영혼에도 그 열쇠가 있지 않겠느냐. 보렴, 지금도 너는 나와 이렇게 대화하고 있잖니.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러면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열쇠가 뭔지 시스템이 알려 주고 있는 건가요? 나는 퀘스트를 성공시키면 되는 건가요?”

【그건 확언하기 어렵단다. 말했듯이 시스템은 나의 힘에서 비롯되었지만 내가 통제하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내 의지를 일부 반영시킬 수 있을 뿐이지.】

“그러면 어제 내가 기도실 문을 열자마자 받았던 퀘스트는요? 그것도 당신의 의지를 반영한 건가요? …그건 무슨 의미인데요?”

손안에 아직도 딱딱한 검의 차가운 감촉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 퀘스트를 성공하는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박율에게로 이어져 있던 시스템의 빛. 문득 떠올랐던 추측이 있다. 숭고한 희생은 박율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숭고한 희생을 돕는 힐러라는 말의 의미는 내가 박율을….

【지금은 아니란다.】

“뭐가요?”

【기억을 직접 전해 주는 방법은 실패했으니 네가 해야 할 일을 내가 직접 알려 주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 퀘스트는… 이런.】

들려오던 목소리가 멈췄다.

“제대로 말해 주세요.”

재촉하며 소매로 코 밑을 쓸었다. 하얀 천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 나왔다. 뜨끈한 느낌이 든다 했더니 코피였다.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간헐적 코피 페널티 때문이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구나. 돌아가서 쉬렴.】

“하, 설마 고작 코피 때문에요? 당신이 내려 준 페널티인데요. 이보다 더한 페널티도 있었어요. 상관없으니까 이어서 말해 주세요.”

【내가 내린 페널티가 아니란다. 너도 알다시피 신력을 사용하는 데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지. 그런 것처럼 퀘스트에 보상이 더해지는 순간 그만큼의 페널티를 받을 가능성도 함께 포함되는 거란다. 그런 종류의 대가는 내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받았던 하루 동안 걷지 못한다는 페널티도 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마터면 계속 원망할 뻔했다.

그런데 보상에 따른 페널티라면 페널티가 큰 만큼 보상도 컸다는 말이 아닌가. 보상이 ‘그와의 대화’였던가.

“알았어요. 나는 괜찮아요. 그것보다 어제 받았던 ‘숭고한 희생’ 퀘스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 주세요. 말해 준다고 하셨잖아요.”

【네가 괜찮다는 걸 나도 안단다, 아이야. 그래도 그 상태로 이 자리에 세워 두고 싶지 않구나. 바깥도 벌써 어두워졌단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렴.】

“잠깐, 이렇게 일방적으로 대화를 그만둔다고요? 싫어요. 저기, 신님?”

그러나 들려오는 음성은 더 이상 없었다. 신이 목소리를 전할 때 공중에서 흩날려 바닥으로 쌓이던 꽃도 먼지처럼 잘게 부서져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어안이 벙벙해서 이마를 탁 소리가 나게 짚었다. 이건 분명히 괜한 핑계로 나를 내쫓는 거였다. 그래도 이렇게 포기하지는 않을 거다. 내일 다시 와 봐야지.

코피는 왼쪽 소매가 온통 붉게 물들어 축축해질 때쯤에야 간신히 멈췄다. 클린 마법이 담긴 종이를 찢어서 주변을 정리한 후에 기도실 밖으로 나왔다. 본관 건물을 빙 돌아서 뒷길로 향했다.

‘이쯤에 정원이 있었지.’

신이 내게 말했던 것들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으나 당장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벤치에 앉아서 생각이라도 정리하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밤이 깊은 이 시간이면 사람도 없을 터였고…. 어?

누군가 있었다. 달빛 아래 하얀 벤치에 바르게 앉아 있는 곧은 뒷모습이 보였다.

주변이 조용해서 내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렸다. 타박, 하고 바닥을 딛기 무섭게 그가 뒤를 돌았다. 달보다 더 빛나는 금안에 내 모습이 담겼다.

“라엔 형.”

“이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여기 있어요. 기도실에서 이제 나온 거예요?”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져서요. 형은요?”

소매에 핏자국이 모두 지워진 걸 다시 확인하고 라엔의 옆에 앉았다. 라엔은 달빛을 조명 삼아서 보고 있던 종이를 차곡차곡 접어서 옆에 두었다.

“나는 잠도 안 오고 해서 잠깐 산책 겸 나왔어요. 안 춥나요?”

그는 자기가 덮고 있던 로브를 내 어깨 위로 걸쳐 줬다. 로브가 차갑게 식은 걸 보니 바깥에 오래 있던 것 같다. 슬쩍 살핀 얼굴이 달빛 때문인지 창백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가늘게 웃었다.

단순히 내 기분 탓이 아니라 그는 피곤해 보였다.

“형, 피곤해 보여요.”

라엔의 손을 감싸니 치료할 거냐고 묻는 상태 창이 떴다. 치료를 하기는 하였으나 이걸로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 피로도 해소해 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시스템의 힘을 빌려 치료할 때 옅게 퍼졌던 푸른 빛을 잠깐 바라보다가 내 어깨로 무너지듯이 스르륵 기댔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채였다.

“고마워요. 두통이 좀 있었는데 한결 나아요.”

“몸도 안 좋으면서 왜 이렇게 늦게까지 무리하고 있었어요?”

“무리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잠이 안 와서요.”

“그래서 얼마나 못 잤는데요?”

“음, 신전에 도착한 이후로요.”

경악해서 라엔을 바라봤다. 신전에 머무른 지 못 해도 며칠쯤은 지났을 터였다.

“형, 지금 괜찮은 거 맞아요?”

“네, 괜찮아요. 이렇게 있으니까 좋아요. 잠깐만 이러고 있을까요,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러 가야죠.”

내가 안정제라도 되는 듯이 기대 있는 몸을 밀어 올렸다. 설령 두통을 치료했더라도 그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다. 라엔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내가 걱정돼요?”

피곤해서인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품에서 플라스크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분홍색 물약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수면 유도 마법 약이에요. 이제는 이 약이 별로 안 들어서요. 이런 것보다 이한이 같이 있어 주는 게 더 효과가 좋은 듯한데…. 그래도 지금 그냥 가라고 할 건가요?”

기억을 헤집어 보니 라엔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내가 치료했을 때 다들 긴장이 한 번에 풀리면서 졸려 했던 것 같으니까.

“그러면 같이 가요. 오늘은 내가 책임지고 재워 줄게요.”

플라스크를 다시 집어넣던 라엔이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