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10화 (110/150)

110화.

퀘스트 포기

늘 그랬듯 퀘스트 창에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숭고한 희생이라니, 썩 좋은 어감은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빛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건물 밖으로 이어진 빛은 본관 중앙의 야외 복도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말소리가 작게 들리는 거리에서 자리에 우뚝 멈췄다.

‘스승님이다.’

내가 위치한 곳은 기둥 뒤쪽의 사각지대였기에 스승님은 나를 볼 수 없었다.

스승님과 대화하고 있는 이의 뒷모습은 익숙했다. 바람에 옅게 휘날리는 밝은 금발, 단단하고 너른 등.

‘율이 형?’

빛무리는 박율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손에 뭔가가 쥐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무게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내 손에 들린 것은 푸른 빛으로 은은하게 감싸여 있는 기다란 검이었다. 손잡이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게 왜?’

나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건 박율이 마물을 처리할 때 사용하는 검이었다. 선득한 감각에 검을 내팽개치려고 했지만 내 손에 딱 붙은 듯이 떨어지지 않았다.

퀘스트 창이 눈앞에서 깜빡였다. 별다른 지시 사항은 없었으나 그 어지러운 깜빡임이 내가 당장 손에 들린 검으로 무언가 행동하기를 재촉하는 것 같아서 식은땀이 흘렀다.

몸을 휙 돌려서 정처도 없이 내달렸다. 박율의 등 뒤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검을 든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숭고한 희생을 돕는 힐러’라는 퀘스트를 받은 채로.

‘시스템, 이 퀘스트 안 할 거야. 검도 내 손에서 없애. 지금 바로.’

<돌발! 퀘스트> ‘숭고한 희생을 돕는 힐러!’

퀘스트 진행을 포기하시겠습니까?

퀘스트 제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제야 뜀박질을 멈추고 바로 옆에 있는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내가 이전에 지냈던 별관 앞으로 와 있었다. 습관적으로 익숙한 장소로 향한 듯했다.

「퀘스트를 포기합니다.」

내가 긍정하자마자 검은 내 손에서 스륵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바닥에 닿기 전에 빛무리로 흩어져 사라졌다.

‘진짜 검이었을까? 아니면 시스템이 만들어 낸 허상?’

사라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이 퀘스트는 왜….

「퀘스트 포기에 따른 ‘퀘스트 실패 페널티’를 즉시 부여합니다.」

뭐, 이렇게 갑자기?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눈앞에 뜬 상태 창에 머리가 멍해졌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바닥을 짚고 다리에 힘을 줘 봤으나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퀘스트를 실패했을 때 페널티가 하루 동안 못 걷는다는 거였지.’

몇 번을 더 일어나려고 시도해 보다가 그만두고 손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여기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목이다. 신관님들이 나를 우연히 발견해서 방까지 데려다주는 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물론 나를 발견하더라도 그들이라면 나를 모른 척 지나가긴 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쩐다.’

페널티 지속 시간이 하루라서 곤란하게 됐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찾아낼 만한 사람이라면….

한참 전의 일이긴 하지만 민주혁이 맨 처음 나를 데리러 왔으니 내가 여기서 지냈다는 걸 알고 있다. 박율은 내가 어디 있든 곧잘 찾아와서 데려가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가 찾아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신전은 넓었다. 그러니 막연히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력으로 어떻게든 해 봐야 했다. 기어서라도 가야 하나? 아니면 바로 옆에 내가 지냈던 방으로 들어가서 뭐라도 있는지 살펴볼까?

막막함에 쪼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무릎에 박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목덜미를 콕콕 찍는 손길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하견 형?”

인기척도 없었는데. 하긴 송하견은 원체 인기척이 없는 사람이긴 했다. 그는 태양을 등지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바로 옆에 있는 방 쪽으로 향했다.

“여기는 왜?”

“형은요?”

“…그냥.”

생각해 보니 사막에 갔을 때였던가, 내가 별관에서 지냈다는 걸 송하견에게 말한 적이 있다. 송하견은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는지 그의 눈동자에 잠깐 아쉬움이 스친 것도 같았다.

“너는.”

“나도 그냥이요.”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실없이 웃자 송하견은 내게 한 손을 뻗었다.

“왜 그러고 있어. 들어가자.”

송하견을 멀뚱히 바라봤다. 그가 뻗은 손을 잡으면 몸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여전히 걷지는 못할 터였다.

“업어 줄래요?”

송하견이 전에 종종 ‘업어 줄까’ 하고 물어보곤 했으니 내가 지금 묻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속으로 합리화하며 담담한 척했으나, 업어 달라고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생각보다 부끄러웠다.

송하견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를 숙여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왜.”

“이것도 그냥이요.”

“아파?”

“…아프지는 않은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요.”

내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재던 송하견이 이번에는 내 다리를 쭉 펴고 옷을 걷어 올렸다. 그가 큼직한 손으로 내 발목을 감싸 쥐었다. 옷으로 싸매고 다녀서 햇빛을 받지 않아 허여멀건한 발목이 더 가느다래 보였다. 그는 내 발목을 조심스레 움직였다.

“삐었어?”

“아니요. 피곤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예요.”

페널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그 부분은 빼고 말했지만 사실이긴 했다. 페널티 지속 시간이 하루니까.

송하견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뭔가를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일단 들어가자.”

그러고는 순순히 나를 업…지 않고 번쩍 안아 올렸다. 그가 단단히 받치고 있는 내 다리가 허공에서 달랑 흔들렸다.

“손 단단히 감아. 다리에 힘 안 들어간다며.”

“고마워요.”

송하견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는 나를 가볍게 안은 채로 우리가 머무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박율은 스승님과 대화하며 밖에 있을 테고, 민주혁과 라엔도 밖에 있거나 옆 방에 있는 듯했다.

걸어오는 내내 아무 말 않던 송하견은 나를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다리를 신중하게 살펴보고 무릎을 툭툭 쳐 보기도 하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이한, 솔직하게 말해.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요?”

“단순히 피곤하다고 다리가 완전히 마비되지는 않아.”

어떻게 내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했지. 갈피를 못 잡고 세차게 흔들리는 시야에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린 송하견의 얼굴이 얼핏 스쳤다.

“다리가 마비됐는데도 태연한 걸 보니까 너는 원인을 알고 있는 거겠지.”

확신하는 말투였다. 제대로 말하기 전까지 그냥은 못 넘어가겠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방문을 힐끗 보자 송하견이 문 쪽을 향해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문 잠갔어.”

“네?”

“아무도 못 들어와. 이제 너랑 나랑 둘뿐이야.”

상황상 말해야만 한다면 최대한 인원이 적은 편이 낫다. 하루면 괜찮아질 일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페널티 말고 뭐 때문이라고 말해야 신빙성이 있을까.’

내가 변명을 고민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송하견의 입꼬리가 더욱 삐딱해졌다. 그가 내 어깨를 쥐고 밀어붙인 탓에 뒤로 점점 밀려 났다. 그러다가 결국 소파에 눕혀졌다.

위쪽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송하견의 보랏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어둡고 깊어 보였다. 다리는 여전히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내 양쪽 팔목을 단단히 옭아맸다. 내가 도망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처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않으면요?”

“어떻게 할 것 같아?”

화난 것처럼 꾹 눌린 목소리였다. 평소 무표정했던 송하견의 얼굴에 옅게 떠오른 미소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긴 머리칼이 목덜미에 스쳤다.

“지금, 딱 한 번. 기회를 줄게.”

“…….”

“그 이상은 안 기다려. 어떻게 해서든 알아낼 거야.”

가슴이 맞닿았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는 아마 내 것일 터였다. 송하견도 그걸 알고 있겠지. 그가 나를 몰아붙이는 탓에 긴장감으로 숨이 가빴다.

“…말, 할게요. 그러니까 좀….”

송하견이 내 손목을 풀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몸에 손을 대고 밀어 내려고 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세게 밀치지 못한 건지, 그가 내 힘 따위는 버틴 건지 모르겠지만, 송하견은 내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말캉하고 뜨거운 느낌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내가 정말 널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봐?”

눈을 떴을 때 송하견은 내게서 떨어져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아까의 분위기를 보면 그의 물음에 당당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일으켜 줘?”

“내가 일어날 수 있어요.”

송하견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직접 일으켜 세워 줬다.

“그래서.”

“기도실에 갔었어요. 거기서 신력을 잘못 쓴 것 같아요. 아마 파장이 안 맞은 것 같은데 그 부작용이에요. 평소에는 신력을 쓰는 데 부작용 같은 게 없어서 방심했어요.”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건?”

“느낌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 부작용이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설마 신력 한 번 잘못 썼다고 평생 이렇게 살겠어요?”

“확신할 수는 없잖아.”

“그러면 뭐… 아까처럼 형이 안고 다녀야죠.”

“원한다면.”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농담이었는데 이런 대답이 들려올 줄은 몰랐다.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다리는 곧 괜찮아질 거고, 앞으로는 이럴 일 없을 거예요. 모두에게는 말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나도 안 들키게 조심할게요. 지금 누워서 자면 다들 모를 거예요.”

“네 말대로 내일까진 지켜볼 거야. 그래도 안 나으면….”

송하견이 무슨 심각한 말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뜸을 들여서 나도 몸을 굳혔다.

“그러면 내가 안고 다녀야지. 네 말처럼.”

장난도 참. 내가 웃자 송하견도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나를 소파에서 들어 올려서 침대로 향했다.

“진심인데.”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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