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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09화 (109/150)
  • 109화.

    숭고한 희생을 돕는 힐러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이제 한계였다. 따로 먹은 것이 없었기에 아까 마셨던 투명한 마법 약만 게워 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느새 일어난 민주혁이 내 이마를 짚으며 맥없이 흔들리던 머리를 지탱했다.

    “다 토했어? 등 더 두드려 줄까?”

    “…으응. 괜찮아.”

    “누울 수 있겠어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민주혁이 자기 허벅지를 베개 삼아서 나를 눕혔다. 운동을 해서인지 근육 때문에 단단했고, 늘 그랬듯 체온이 높은 편이어서 따듯했다.

    “자고 있어.”

    내가 꾸물대며 자리를 잡자 민주혁이 잠깐 몸을 긴장시키더니 내 눈꺼풀 위로 손을 덮어서 시야를 가렸다.

    라엔은 내가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고는 내 바로 앞의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내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나서도 잘 자라고 말하는 듯한 라엔의 흐릿한 웃음이 잔상처럼 남았다.

    라엔과 민주혁이 순식간에 정리를 끝낸 뒤여서 마차 안에 선선하고 차가운 바깥 공기가 맴돌았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누워 있는 내 품으로 따뜻한 베개를 불쑥 안겨 줘서 끌어안았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 한결 나았다.

    “…고마워요.”

    가만히 눈을 감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잠에 서서히 빠져들 무렵 라엔과 민주혁이 소리를 낮춰 대화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차를 탔는데, 그때는 이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멀미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멀미가 아니라면, 신전으로 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가능성도 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듣자 하니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서 ‘그건 아니에요.’라고 제대로 말했던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기에 기억이 불분명했다.

    신전 앞에 도착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내 안색이 꽤 파리해 보였는지 박율도 송하견도 걱정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라엔과 민주혁에게 그다지 말할 만한 것도 아니니 내가 잠깐 상태가 나빴다는 건 알리지 말아 달라고 미리 부탁했지만 그 둘이 그걸 지켜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저쪽에 신관님이 계십니다.”

    민주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신전 앞에 단정한 자세로 신관님이 서 있었다. 무게감 있는 소재의 백색 신관복이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림조차 없었다.

    ‘처음 보는 분이네.’

    신전에서 십여 년을 살았기에 많은 신관님을 뵈었지만 눈앞에 있는 신관님이 누구인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하긴, 내가 신전에서 활동량이 많지는 않았으니 마주치지 못한 신관님들도 꽤 될 것이다.

    “대신관님이 용사님들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가시죠. 그런데 직접 나오지는 않으시고.”

    박율의 말투가 서글서글했기에 전달하는 내용과는 달리 꽤 예의 바르게 들렸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목소리에 묘하게 날이 서 있는 것을 눈치챘다. 적대감 비슷한 것이었다. 신관님을 경계할 필요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신전 자체에 대한 적대감인가.

    “바쁜 분이십니다.”

    “감사라도 해야 하나.”

    바로 옆에 서 있는 민주혁의 투덜거림은 신관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으나 내게는 똑똑히 들렸다. 다들 왜 이렇게까지 경계하고 있는 걸까.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신관이 네 명의 용사들에게 차례로 눈을 맞췄다. 뭐, 나를 못 본 체하는 그의 행동은 익숙했다. 신전에 있는 이들이란 다 그런 식이었으므로.

    “가자.”

    송하견이 내 손목을 단단히 쥐고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신전 건물 안쪽의 응접실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스승님의 모습을 바라봤다. 입이 딱 다물려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익숙했다. 경건한 복식도, 차분한 얼굴도, 풍기는 기운마저도.

    “오셨습니까.”

    “일행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본론부터 말했으면 합니다.”

    박율의 말에 스승님의 시선이 순간 나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스승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신전의 기도실을 사용해야 합니다. 대신관님이 우리를 호출한 이유도 말씀해 주십시오.”

    “기도실 사용은 허가해 드리겠습니다. 사용 가능한 시간은 추후 안내해 드리지요. 그리고 제가 여러분을 초대한 이유는….”

    스승님이 입매를 매만졌다. 이건 스승님이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것도, 추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짧지 않은 길을 오셨으니 일단 휴식을 취하세요. 길은 제자가 안내해 줄 겁니다.”

    스승님의 입에서 나오는 ‘제자’라는 말에 몸이 움찔 튀었다.

    “머무실 장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아까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했던 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지금 당장은 스승님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어서 서둘러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한아. 어디가 안 좋으냐?”

    등 뒤에서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나는 아마도 아직 스승님과 마주하고 대화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혹은 지금 울렁이는 속 때문에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든가.

    신전으로 올 때 라엔이 했던 말이 맞았다. 나는 신전에 오는 게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속을 게워 낼 것처럼 울렁임이 심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대답을…. 그런데 무슨 대답을? 나는 스승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지?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신전을 떠났으니 이제 당신의 아래 있는 제자가 아닙니다.”

    박율이 나를 보호하듯이 내 어깨를 감쌌다. 흔들림 없는 그의 목소리에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용건이 있으면 저를 부르십시오.”

    단호하게 말을 맺은 박율이 나를 조심히 부축해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응접실 문이 거의 닫힐 무렵, 안쪽에서 다른 신관님과 대화하는 스승님의 목소리가 옅게 흘러나왔다.

    “대신관님, 그런데 왜 찻잔은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를 준비하라고….”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너는 항상 말이 너무 이르다.”

    “아, 아직….”

    내 옆에 있던 신관이 흠흠, 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주혁아, 그만.”

    “아니, 방금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그냥 갑니까.”

    “민주혁.”

    자리를 박차고 다시 응접실로 들어가려던 민주혁이 작게 혀를 차며 물러났다. 민주혁뿐만 아니라 다들 복잡한 표정이었다. 나 때문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이제 가요.”

    내가 먼저 목소리를 내자 그제야 다들 신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민주혁이 내 머리칼을 괜히 헤집어 놓았다.

    “지금 안내해 드리는 곳은 실은 손님용 방은 아닙니다. 여기는 손님이 올 일이 거의 없으니 손님용 방 같은 건 없기 때문이죠.”

    “그렇군요.”

    “네, 대신 남는 방은 많지요. 미리 방 두 개를 비워 뒀습니다. 넓은 방이니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신관은 우리를 본관 왼쪽 건물의 1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이 건물에는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습니다. 저는 바로 옆 건물에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찾아오셔도 됩니다.”

    신관은 신전에 있는 건물의 대략적인 구조와 위치를 알려 주고는 떠났다.

    방 안으로 들어와 보니 널찍한 소파가 있었고, 세 사람쯤은 충분히 잘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라엔은 나를 자연스럽게 안아 들어서 침대 한가운데에 눕혔다.

    “쉬어요.”

    “형들은요?”

    “건물도 돌아보고, 더 알아볼 게 있는지 보고 있을게요. 쉬기도 할 거고요. 걱정 마요.”

    “급한 일은 없으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각자 할 일을 한다면 나야 안심이었다. 눈을 감은 내 이마를 가만히 쓸어 올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 익숙해?”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라는 송하견의 대답은 한참의 간격을 두고 고요히 들려왔다.

    다음날, 메스꺼움 페널티가 끝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스승님을 독대하러 갔다. 스승님이 늘 계시는 곳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찾아가 본 적은 없었지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고 문을 열자마자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는 스승님이 보였다.

    “너는 언제든 들어가도 좋단다.”

    “뭐가요?”

    “기도실 말하는 거란다. 그걸 물어보러 온 것 아니었느냐.”

    그것 말고 지난 일에 대해서는 내가 묻기 전에는 먼저 말씀하지 않으려는 요량인 듯했다. 그렇다면 나도 굳이 이제 와 스승님께 대답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왜 내게 아무것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는지, 그동안 내게 보인 건 동정이었는지. 그런 질문들을 하기엔 조금 비참했다. 그러니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고 싶지 않았다.

    “신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요?”

    “가면 자연히 알게 된단다.”

    “제물 같은 게 필요한가요? 피라든가요.”

    “네게 그런 건 필요 없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두렴.”

    “네, 감사합니다.”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는 나를 스승님이 조용히 불렀다.

    “내가 미우냐, 이한아. 네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는 제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을 테지만 나를 마주 보는 스승님은 쓰게 웃었다. 그건 스승님이 이전에도 나를 바라볼 때 종종 짓던 표정이었다.

    “가 볼게요.”

    “언제든 들어와도 좋다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란다.”

    “…….”

    스승님이 나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문을 닫고 나와서 기도실로 걸음을 옮겼다. 기도실은 본관의 맨 위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 기도실 앞에 서자마자 고풍스러운 무늬가 그려진 문이 보였다. 손잡이에 감긴 체인과 거기 걸린 자물쇠도.

    ‘잠겨 있는 거 아닌가…?’

    그러나 자물쇠를 걸어 둔 것일 뿐 잠가 두지는 않았는지 내가 손을 대자마자 찰칵, 하고 풀렸다. 자물쇠가 땅에 떨어졌다. 체인을 풀고 묵직한 문을 밀었다.

    그 안으로 한 걸음을 옮기자마자 귓가에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짐작이 맞다면 이건 돌발 퀘스트일 것이다. 이곳이 신의 힘을 가장 강하게 받을 수 있는 장소일 테니까. 시스템이 반응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눈앞에 뜬 퀘스트 창을 읽었다.

    <돌발! 퀘스트> 숭고한 희생을 돕는 힐러!

    성공 시: ‘그’와의 대화

    실패 시: 1일간 걷지 못함

    제한 시간: 1일

    눈앞에 파랗고 동글동글한 빛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길을 안내하듯이 한곳으로 주욱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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