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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08화 (108/150)
  • 108화.

    맹목적인 마음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Ⅲ 실패!

    페널티 ‘메스꺼움’이 지속 시간 ‘1일’ 동안 유지됩니다.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Ⅳ

    성공 시: 박율의 개척 획득

    실패 시: 간헐적 코피 1주 페널티

    제한 시간: 1주

    왜 사람은 지나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곤 하는 걸까. 다시 겪어 보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하니까 그런 거겠지. 내가 그랬듯이.

    새벽 즈음부터 이어진 메스꺼움 페널티에 시야가 빙빙 도는 듯했다. 결국은 종일 내가 견뎌 내야 하는 일이겠지만, 어제 안일하게 생각했던 나를 떠올려 보면 괜히 화딱지가 났다. 한숨을 푹 쉬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 안 좋아?”

    송하견의 목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분명 그가 아침 일찍 방에서 나가서 아직 들어오지 않은 걸 확인했는데, 대체 언제 돌아와 있었던 거지.

    “아니요. 아직 잠이 덜 깨서요.”

    송하견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아직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등받이에 가만히 기대어 앉아 있기만 하는 나와 눈을 맞췄다.

    “무리해서 갈 필요는 없어. 오늘은 그냥 쉴까.”

    고개를 작게 저었다. 송하견의 손에는 한 뼘쯤 되는 플라스크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절반쯤 채워져 있었다. 아마 저건 라엔이 송하견과 같이 만든다던 멀미약일 것이다.

    어제 박율의 방에서 죽을 먹고 또다시 한숨 잔 후에 그제야 밖으로 나섰을 때, 방문을 열고 나오는 라엔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이른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라엔은 막 잠에서 깬 듯이 머리를 부스스하게 묶은 채였다.

    -이한? 왜 거기서 나와요?

    일순 눈을 날카롭게 떴던 라엔은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팠어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괜찮아요.

    -많이 안 좋았나요? 지금은 어때요?

    -괜찮아요.

    -하…. 잠깐 들어올래요?

    나는 제대로 대답했건만 라엔은 나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내가 아프지 않다는 걸 재차 확인했다.

    -오늘 신전으로 떠날 수 있겠어요?

    -아, 율이 형이 출발하는 날을 내일로 미룬다고 했어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내일은 괜찮겠어요? 더 쉬어야 하는 건 아닌가요?

    -지금 당장도 괜찮은걸요.

    라엔은 내가 식사를 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초콜릿을 꺼내서 내 입에 넣어 줬다. 그러고는 잠시 고심하더니 입을 열었다.

    -멀미가 심하다고 들었어요.

    -내가요? 누가 그러던가요?

    -주혁이요.

    멀미를 핑계로 댈 예정이었기에 속내를 들킨 건가 싶어 재빨리 물어보았으나 들려온 대답은 예상외였다. 민주혁이 왜 내가 멀미가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처음 만나서 같이 마차를 타고 올 때도 나는 자기만 했던 것 같은데.

    -멀미할 때 도움이 되는 마법 식을 만들어 봤어요. 직접 쓰는 것보다 마법 약으로 만들어서 약초의 효능과 함께 반응이 나타나도록 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아서 고민했는데, 연구해볼 시간을 벌었네요. 개량해서 하견과 같이 만들어 볼게요.

    -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멀미를 하긴 하는데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서요.

    -그래요. 들어가서 쉬어요.

    전혀 동의하지 않는 듯한 말투로 대답한 라엔은 그렇게 나를 방으로 다시 돌려보냈었다. 그러고는 기어코 송하견과 같이 마법 약을 만든 듯했다.

    “이거 라엔 형이랑 만든 거죠? 어제 들었어요.”

    “맞아. 안전성도 테스트했어.”

    “고마워요. 그러면 이제 1층으로 내려갈까요.”

    송하견의 손에서 플라스크를 빼내어 내 품에 넣은 후에 그에게로 양손을 뻗었다. 송하견은 내가 뻗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 손을 마주 잡는 대신에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1층으로 내려가자 다들 떠날 채비를 마친 채였다.

    “이한아, 정말 아무것도 안 먹어도 괜찮겠어?”

    “멀미할 것 같아서요.”

    다시 생각해 봐도 괜찮은 핑계였다.

    ‘신전으로 갈 때는 마차를 이용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했지.’

    마나를 가지지 않은 신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신전 근처에서는 마법을 금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안 먹으면 속이 더 안 좋을 텐데.”

    “약은 마실 수 있겠어요? 힘들 것 같으면 말하고요.”

    품에서 플라스크를 다시 꺼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고민하는 것을 망설이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라엔이 ‘억지로 마실 필요는 없어요.’라고 말하며 플라스크를 가져갔다. 그러고는 다들 나를 제외하고 저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약도 못 마실 정도라면 갈 수 있을까요.”

    “지금 안색도 파리한데.”

    “차라리 신전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텔레포트한 후에 걸어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텔레포트는 마나가 많이 들어가는 마법이어서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야 할 거야.”

    “맞아요. 내 생각에는 텔레포트한 후에 신전까지 먼 거리를 걸어서 가는 게 더 무리일 것 같아요.”

    “업고 가면 괜찮지 않아?”

    “그러면 제가 업겠습니다.”

    “업혀서 가는 거라도 피로는 꽤 많이 쌓일 텐데. 그러면 차라리….”

    대화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게다가 업고 가겠다니, 지금 이야기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거지? 라엔의 손에 들린 플라스크를 빼앗듯이 가로채고 마차 안으로 훌쩍 몸을 실었다.

    “안 가요?”

    옆자리를 두드리자 민주혁이 ‘쟤 고집을 어떻게 꺾어.’라는 표정을 하다가 재빨리 뛰어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러니까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난다, 그치.”

    “응, 그렇네.”

    내 앞의 한 자리는 라엔이 타기로 합의된 상황인 듯 자연스럽게 라엔이 앉았다.

    마차는 다섯이서 모두 탈 수 있을 만큼 넓었으나 여차하면 나를 눕혀 놔야 한다는 명목으로 굳이 두 대로 나눠서 가기로 했다. 나는 누워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으나 누구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렇게 결정됐다.

    “라엔 형님, 지금까지는 멀미에 효과가 있는 마법 식을 연구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

    “마차는 거의 신전으로 향할 때만 사용하는 이동 수단이니까요. 신전에 갈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그렇지만 전에 신체 증상에 관여된 마법 식은 만들기가 번거롭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일정이 촉박했는데도 빨리 완성하셨습니다.”

    “나를 위한 게 아니니까요.”

    라엔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마차의 창을 조금 열어 두었다. 내 손에 들려 있는 마법 약이 메스꺼움 페널티에도 효과가 있을지 여부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약간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입에 털어 넣었다. 달콤한 맛이었다.

    “이제 자. 도착하면 깨울게.”

    민주혁이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덜컹거리며 출발하는 마차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마차는 달리고 있었다. 나는 민주혁에게 기댄 채였고, 옆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민주혁도 잠이 든 듯했다.

    ‘망할 페널티.’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잘 자다가 왜 깼는지는 명확했다. 마법 약은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마법 약을 아예 마시지 않는 것이 나았을 뻔했으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라엔은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내 이상을 바로 알아채고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엔의 부드러운 손길에 식은땀에 젖은 내 머리칼이 쓸어 올려졌다.

    “형. …얼마나 남았어요?”

    “절반쯤 더 가야 해요. 속이 안 좋아요?”

    “…….”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였다.

    침착하자. 여기서 토할 리가 없었다. 지난번에 메스꺼움 페널티를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면, 물이나 차는 마셔도 괜찮았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다. 마법 약도 물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명치께의 불쾌한 울렁거림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 와중에 라엔이 옆에서 봉투 하나를 소환했다.

    “많이 안 좋으면 말해요. 괜찮으니까 억지로 참지 말고요.”

    “…네.”

    “미안해요.”

    울먹이는 라엔의 작은 목소리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또렷하게 들려와서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내 등을 찬찬히 쓸어내리고 있던 그가 내게 시선을 맞췄다.

    “내가 마법 식을 더 잘 확인했어야 했는데.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울렁이는 속 때문에 말을 뱉을 수가 없어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상황은 메스꺼움 페널티 때문이기에 라엔이 해결해 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나를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괜찮았다. 내일이면 끝날 페널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조금만 버티면 된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요, 이한. 내가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겠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라엔이 알 턱은 없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정확하게 짚어 냈다. 그가 속삭이듯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마법 식에 오류는 없었을 거예요. 같은 마법 약을 마신 나는 괜찮으니까요. 게다가 여러 번의 테스트를 거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법 식을 만들었어요.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내가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건 없겠죠. 나도 알아요.”

    “그러면 왜….”

    “그런데 모르겠어요. 나는 내 모든 걸 줄 수 있고, 주고 싶은데도 결국 당신은 또 이렇게 아파하니까….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적어도 그게 당신과 관련된 일은 아니기를 바랐어요.”

    라엔의 조용한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옅은 웃음기가 자조적으로 들렸다.

    나는 시시각각 한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말아 쥔 옷자락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서 바스락, 하고 봉투 펼쳐지는 소리와 라엔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래서 미안해요. 원래 그런 거예요.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이성적인 영역을 벗어난 맹목적인 마음이거든요.”

    그가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울렁이는 속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할 수는 없었다.

    라엔이 입가를 막은 내 손을 잡아 내리고 봉투를 댔다. 그러고는 내 등을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두들겼다.

    “아까부터 무리하고 있었던 거 알아요. 토해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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