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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07화 (107/150)

107화.

너에게 필요한 게 나라면

언젠가 시스템을 통해서 본 적이 있기에 지금 내가 박율의 방에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직접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이 얼떨떨해서 주변을 멍하니 둘러봤다.

“형 방이라는 걸 바로 알았네.”

“그냥… 큼, 그냥 그런 것 같았어요.”

박율의 물음에 괜히 찔려서 목소리가 엇나갔다. 그는 곧바로 유리잔에 물을 따라 내 입가에 조심스레 가져다 댔다. 유리잔을 받아 들기 위해서 올렸던 손을 머쓱하게 내려 이불을 매만졌다.

“하견 형 방에는 뭐가 많더라고요. 책이랑, 뭔지는 모르겠지만 플라스크도요.”

“그래. 하견이는 한번 방에 가져다 놓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두는 편이니까. 그렇다고 엉망으로 쌓아 두는 건 아니지만.”

그건 맞았다. 물건은 많지만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플라스크는 아마, 네게 도움이 되는 마법 약들이 대부분일 거야.”

“아, 들었어요. …그게 대부분인 줄은 몰랐지만요.”

내 체력에 도움이 되는 거라고 했던가. 그런데도 나는 매번 이렇게 작은 페널티에 맥을 못 추니…. 부끄러움 때문인지 지속되고 있는 페널티 때문인지 갑자기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아서 서둘러 말을 이었다.

“라엔 형 방에도 조그만 물건들이 많았어요.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도 있었고요. 그리고 민주혁 방에도요. 걔가 쓰는 화실도 가 봤거든요.”

‘그런데 형은요?’

다른 방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박율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은 이거였다. 신전에 있을 때 지냈던 휑한 공간이 문득 떠올랐다. 물론 내가 방에 물건을 들여놓지 않았던 것과는 다른 이유겠지만. 그래도 그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이걸 함부로 물어도 될까? 입을 달싹이고 있는데 박율이 늘 그랬듯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는 것처럼 작게 웃었다.

“여기에 뭐가 없는 것 같아도 다 있지.”

“네?”

“이한이 먹일 약이라든가.”

박율이 마법을 써서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달각이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그 안에서 약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를 꺼내려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열이 안 떨어졌구나. 딱히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잊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으나 역시 조금 따끈한 것 말고는 모르겠다. 그다지 심각하지도 않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텐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달각이던 소리가 일순 멈췄다.

“왜, 약은 안 필요해?”

박율의 눈동자가 내 표정을 집요하게 좇았다. 방 안에 내려앉은 정적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여유로워 보였으나,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묘한 기대감이 비치는 듯도 했다.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망설이며 말을 뱉자 동시에 박율이 나를 껴안을 듯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박율의 단단한 손이 내 목덜미를 감싸듯이 쥐고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열이 오른 살갗에 닿아서인지 그의 손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그의 손길이 덧그리듯이 지나간 자리가 오히려 달아오르는 듯했다.

내 몸이 가늘게 떨리자 박율이 내 머리를 가볍게 눌러 제게 기대게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나는 어느새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고, 그는 나를 빈틈없이 안은 채였다.

귓가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그러면 형이 어떻게 해 줄까?”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박율의 나긋한 목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어떻게 해 줄 수 있는데요?”

“뭐든.”

“왜요?”

박율이 내게 뭘 해 줄 수 있는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중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왜?’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왜냐면, 이한아. 어떻게 형이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박율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였기에 표정을 볼 수는 없었으나, 목소리에 서린 웃음기를 보아하니 그가 웃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에게 필요한 게 나라면 당연히 뭐든 해야지.”

“네…?”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이건 열이 오른 탓도 있었지만 박율이 계속해서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옷 위로 스치는 손길이 감질날 지경이었다. 그가 내 몸의 열기를 가져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열로 달아오른 몸이 시원한 살갗을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래도 약은 먹자. 열이 이렇게 나는데. 잠깐만 손 놓… 이한아?”

내게서 몸을 떨어뜨리려던 박율이 답지 않게 조금 당황했다. 자기가 먼저 덥석 껴안을 때는 언제고 내가 옷을 붙잡고 늘어지니 어쩔 줄을 모르는 듯했다.

그라면 충분히 나를 떼어 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건 이대로 있어도 된다는 암묵적인 허락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시원해요.”

“어?”

“이렇게 있을래요.”

“…….”

박율의 등으로 손을 뻗어서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안았다. 그의 등이 껴안기도 벅찰 만큼 너른 탓에 달라붙어 있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어쨌거나 안기는 했다.

박율은 잠깐을 말없이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는 서늘했고 나는 뜨거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가 필요했고 그는 내게 뭐든 해 주겠다고 했다.

“아까는 춥다면서.”

“내가요?”

“응. 안 추워?”

“네. 지금이 좋아요.”

그러나 사람은 욕망의 동물이라서 현재에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더 큰 것을 바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옷 위로 맞닿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그의 옷 속으로 꾸물대며 파고들었다. 그렇게 그를 다시 안고 나니까 내 소매도 말려 내려가서 맨살에 그의 단단한 등이 닿았다. 그의 근육과 호흡마저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래.”

귓가에 스치는 박율의 목소리가 뭔가를 참아 내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화난 건 아닌 듯했으므로 안심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차분하지만 어쩐지 침착함을 애써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듯한 호흡. 조금 빠른 듯한 심장 소리. 맞닿은 살결과 나를 안정적으로 받치고 있는 몸. 의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정신이 열에 푹 잠긴 것처럼 나른해서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지금 나는 떨림과 안정감의 기묘한 중간 지점에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건지 차리고 싶지 않은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잘 거야?”

“네….”

“약은?”

“괜찮아요.”

“조금만 이렇게 있다가 약 먹자.”

박율에게 고개를 기댄 채 느릿하게 끄덕였다. 어차피 페널티가 곧 끝날 테니까 괜찮았다.

“그래, 착하다.”

도대체 뭐가 착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박율의 목소리가 간지러워서 싫지는 않았다. 아, 그런데 잠깐만.

“내가 여기서 잠들면 형은 어디서 자요?”

“같이 잘까?”

“음… 네….”

그러면 괜찮을 것 같다. 박율이 재미있다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한결같네. 형 걱정은 하지 말고, 이한이는 푹 쉬고 편하게 자자. 아프지 말아야지.”

“네에.”

이제는 말꼬리도 제멋대로 늘어졌다. 반쯤은 이미 잠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희미한 의식 사이로 박율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아까 지하실 앞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

“보고 싶어서요.”

“형을?”

그러면 달리 누구일까. 내가 대답 없이 고개를 다시 끄덕이자 박율이 푸흐, 하고 웃었다.

“하견이 방에는 아까 형이 쪽지 두고 왔어. 네가 없어도 놀라지 않을 거야.”

“고마워요.”

그러고선 박율은 내 입에 약을 조심스레 흘려 넣었다.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약을 꿀꺽 삼키게 되어서 조금 당황하긴 했으나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 덕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박율은 턱으로 흘러내린 끈적한 물약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그러고는 물까지 몇 모금 마시게 한 후, 등을 찬찬히 쓸어서 소화까지 제대로 시켜 준 다음에 나를 침대에 살포시 눕혔다.

“같이 안 잔다면서요.”

“맞아.”

“그러면 왜 옆에 누워요?”

“이한이 자는 거 보려고.”

이제야 알았는데 박율의 베개는 내 것보다 조금 낮았고 덜 푹신했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베개에서도 이불에서도 그의 향기가 났다. 봄처럼 연한 꽃향기.

내가 박율을 향해 돌아눕자 자기 팔을 베고 나를 곧게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과 바로 얽혔다. 그는 내 눈을 다시 감겨 주고는 등허리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페널티가 끝나는 것까지는 확인하고 자려고 했는데.’

멍하니 생각하다가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쳤다.

날이 밝고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박율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는 익숙하게 내 몸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직접 만든 죽을 가져왔다.

나는 박율의 침대에 기대어 앉은 채로 그가 만든 죽을 먹었다. 이제는 괜찮으니 이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으나 박율의 단호한 모습에 어쩔 수가 없었다.

“형. 오늘 신전에 간다고 했었죠.”

“오늘은 아니고, 조만간.”

“원래 오늘 오후쯤 떠날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 그런데 더 쉬었다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이한이도 몸이 좀 나아지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후자의 이유가 더 클 것이 명백했다. 물론 일정이 조금 늦춰진다면 내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높은 확률로 나는 오늘 새벽까지 박율의 순응 퀘스트를 해결하지 못할 거고, 그러면 메스꺼움 페널티를 받게 될 테니까.

페널티를 받는 상태에서 신전으로 길을 떠나거나 신전에서 머무는 건 꽤 쉽지 않은 일일 듯했다. 그렇지만….

“이미 오늘로 약속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약속보다 네가 중요해.”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박율 때문에 속으로 기겁했다.

“괜찮아요. 바로 가요. 나 때문에 지체되는 건 싫어요.”

“이한이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야. 형도 알아볼 게 있어서. 그리고 다들 준비할 시간이 더 생기면 좋을 거고.”

“그래도….”

박율이 여기에 대해서는 더 얘기할 것도 없다는 듯이 무릎에 놓인 책을 팔랑팔랑 넘겼다. 그러나 내가 끈질기게 주장하자 결국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면 오늘 상태를 지켜보고 신전에는 내일 출발하는 걸로 하자.”

“네, 좋아요.”

내일 출발하면 페널티를 받은 채로 떠나게 되겠지만, 떠나는 날이 더 늦춰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내 몸 상태를 신경 쓰다가 봄이 다 지날 때까지 출발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잘됐네.’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Ⅲ

성공 시: 박율의 개척 획득

실패 시: 메스꺼움 1일 페널티

제한 시간: 1일

신전에 마차를 타고 간다면 메스꺼움 페널티를 받아도 멀미해서 그런 거라고 둘러댈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어차피 하루인데 좀 메스꺼우면 어떤가.

물론 막상 닥치고 보니 하루쯤은 괜찮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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