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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06화 (106/150)
  • 106화.

    순응하지 말아요

    눈앞의 상황은 그냥 꿈일 뿐이었고, 미래시가 아닌 꿈은 앞으로 일어날 일과는 관계없는 허상이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손이 떨려 왔다.

    연한 녹색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정면에 위치한 칼이 서서히 움직였다.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고 했으나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허억.”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선득하게 흘러내렸다. 누가 내 목을 조르기라도 했던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내 눈앞을 파랗게 물들이는 상태 창이 이질적일 정도로 선명해서 호흡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 위에 쓰인 글자를 서둘러 읽어 나갔다.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Ⅰ

    성공 시: 박율의 개척 획득

    실패 시: 기절 1분 페널티

    제한 시간: 1분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퀘스트 창 외에 다른 상태 창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미래시는 아니었다.

    그렇게 안심하고 나서야 퀘스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박율이 무엇에 순응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방금 꿨던 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꿈이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지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았다. 내 발은 어느새 방을 박차고 나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저 박율을 지금 당장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지하실 문 앞에 멈추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닫힌 문 앞에서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잠깐 망설였다. 지금 시간도 알 수 없었고, 박율이 지하실에서 이미 나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박율은 지하실에 누가 들어오는 걸 싫어한다고 했으니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일단 돌아가자. 좀 진정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손잡이에서 손을 떼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보고 싶던 이가 서 있었다. 바깥에 눈이 쌓여 있어서인지 창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이 다른 때보다 환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긴장이 절로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한아? 왜….”

    당황한 듯한 그의 목소리가 띠링, 하는 알림음에 묻혔다. 눈앞에 상태 창이 떴다.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Ⅰ 실패!

    페널티 ‘기절’이 지속 시간 ‘1분’ 동안 유지됩니다.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Ⅱ

    성공 시: 박율의 개척 획득

    실패 시: 고열 1시간 페널티

    제한 시간: 1시간

    그동안 고작 1분밖에 안 지났다니. 체감상으로는 몇십 분은 지난 듯했는데. 단단한 품 안으로 몸이 무너졌다. 그에게서는 꽃향기와 함께 얼핏 바깥의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곧 의식이 끊겼다.

    지하실 문을 열고 나온 박율은 뜻밖의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이한아? 왜….”

    헐떡이는 숨. 급하게 뛰쳐나온 듯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 가느다란 체형이 다 비쳐 드러나는 하얀 잠옷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이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선이한은 크게 놀란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이내 안심이라도 했다는 양 말갛게 웃었다. 티끌 하나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넋을 놓고 있기도 잠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선이한을 급하게 받아 냈다.

    식은땀이라도 흘렸던 건지 혹은 복도에 오래 있었던 건지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색도 창백했다. 이름을 불러도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다행히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다.

    편안한 표정의 선이한을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몸이 안 좋아도 한계가 오기 전까지는 잘 드러내지 않았기에 알 수가 없었다.

    선이한은 곧잘 피를 토하거나 열이 오르거나 의식을 잃었다. 그러기 전에 자기가 먼저 말한 적은 드물었다. 몸이 안 좋다거나, 힘들다거나,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가 실이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신전에서 지낼 때도 자주 아팠는지 알아봐야겠어.’

    그게 아니라면 신력에 대한 부작용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더 숨기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선이한에게 조바심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이 작은 머리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늘 애가 탔다.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건 비단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시선이 선이한에게로 향해 있는 이유가 달리 뭐가 있을까.

    하지만 선이한이 성년이 될 때쯤에 나는 이 자리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영영 전하지 못할 마음이었다.

    선이한을 안고 계단을 오르며 몸을 데워 줬다. 품 안에서 축 늘어진 가벼운 몸을 조심스레 다독이며 2층 방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선이한과 송하견이 같이 쓰는 방….’

    어차피 깨어날 때까지 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내 방에 눕혀 둬도 괜찮을 듯싶었다. 이것도 독점욕이라면 독점욕일까.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행동은 그렇지 못했고, 그걸 자각하면서도 결국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한아, 그거 알아? 형이 방 안에 누구를 들이는 건 처음인데.”

    선이한이 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조용히 속삭였다.

    내 방의 침대 위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선이한의 모습은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떠난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그 무엇도 들여놓지 않은 방이었음에도 선이한의 존재 때문인지 더 이상 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율이 형.”

    “더 자.”

    졸음이 꽉 찬 눈을 가물가물 뜨는 선이한의 눈꺼풀을 다시 가려 줬다.

    “진짜 율이 형이구나.”

    “응. 진짜 형이야.”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선이한이 푸스스 웃었다.

    “내가 얼마나 잤나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삼십 분쯤. 얼마 안 됐어.”

    “그렇구나….”

    “몸은? 불편한 데는 없어?”

    “괜찮아요. 그냥 졸려서.”

    그 말에 딱히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선이한의 말처럼 달리 불편한 데는 없어 보였다. 표정이 괜찮은 걸 보니 속도 나쁘지 않은 듯했고, 열이 나기보다는 오히려 몸이 좀 차가웠는데 그건 침구에 보온 마법을 걸어 주니 나아졌다.

    이불 속에 폭 파묻힌 선이한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었다. 몸은 괜찮은 건지, 갑자기 왜 쓰러진 건지, 지하실 앞으로 와 있던 이유는 무엇인지. 혹시, 나를 보러 왔던 것인지.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잠을 깨워서까지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더 자도 돼. 괜찮아. 형이 방으로 옮겼어.”

    “아니… 일어나야….”

    선이한은 눈을 뜨려했지만 내가 눈가에 덮은 손을 치워 주지 않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말캉한 뺨을 손끝으로 살짝 눌러 보았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깊이 잠들었구나.

    책을 한 권 들고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신전에 대한 정보가 적힌 책이었다. 정보가 많지는 않았지만 곧 신전에 들를 테니까 뭐라도 알아 둘 요량이었다.

    「신전의 위계는 엄격하다.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고, 대신관은 그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자로서 사실상 신을 제외한 신전의 최고 권력자이다.」

    「대신관은 다른 신관들과 달리 신과 간접적인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계시나 암시가 아닌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선이한이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이한의 스승이라는 이가 대신관이다. 그렇다면 선이한의 몸에 담긴 신력을, 스승이라서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 대신관의 지위로 어떻게든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야.’

    옆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서 책을 급하게 덮었다. 불을 좀 더 환하게 밝히니 찡그린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선이한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싶었으나 이마를 짚어 보니 델 듯이 뜨거웠다. 아까 깨워서라도 몸 상태를 정확하게 물어봤어야 했나. 약이라도 먹이고 재울 걸,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이한아, 선이한. 형 말 들려? 잠깐 일어나 볼래?”

    “……추워요.”

    보온 마법을 걸어 둔 이불을 걷어 내자 선이한이 간절하게 이불을 붙들었다.

    “이불 덮고 있으면 열이 더 오를 것 같아서 그래. 약 먹고 자자.”

    “으응….”

    영 맥을 못 추고 몸을 웅크리는 선이한의 이마에 열을 떨어뜨리는 패치를 붙였다. 열이 이렇게 높으니 정신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깨워서 미안해. 약 한 모금만 마셔 보자.”

    천천히 일으키자 선이한은 열이 오른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많이 힘든지 고개를 푹 숙여 내게 기댔다.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살살 달래듯이 등을 토닥이자 선이한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약은 필요 없어요.”

    가느다란 음성이었음에도 선이한 특유의 자기 확신을 기반으로 한 고집이 어려 있었다.

    “약은 필요 없어? 그러면 뭐가 필요해.”

    “조금 있으면 나아요. 그래서 약은 괜찮고…. 필요한 건, 형이요.”

    “응?”

    그래도 약은 먹어야 돼, 하고 단호하게 뱉으려던 말을 까맣게 잊고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선이한은 잠결에 투정 부리는 것처럼 아무런 맥락도 없이 말을 이었다.

    “형이 필요해요. 그런데 형은 아무것도 안 말해 주잖아요. 내가 먼저 물어봐도 돼요? 그러면 다 말해 줄 거예요?”

    귀엽다.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오물거리는 입술도.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서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선이한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몸을 흠칫 떨고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나요?”

    “형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박율이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대답에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피가 차게 식을 리는 없었다. 고열 페널티 때문에 몸 전체가 뜨거웠으니까.

    “정말로요?”

    “응. 그런 비슷한 말이었어.”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니. 열에 시달린 채로 되는 대로 말해서 뭐라고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건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부끄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열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필수!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Ⅱ 실패!

    페널티 ‘고열’이 지속 시간 ‘1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눈앞의 상태 창은 내가 확인하자마자 저절로 사라졌다. 페널티는 내가 잠든 사이 시작된 듯했는데, 아직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지 여전히 지속되어 정신이 몽롱했다. 일단은 박율이 뭔가를 더 말하거나 물어보기 전에 말을 돌려야 했다.

    시야를 넓혀서 방 안을 둘러보니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방이었다. 실제로 본 게 아니라 시스템을 통해서 봤었다. 물건이랄 게 별로 없는 널찍한 방.

    “여기… 형 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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