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꿈 속에서
“처음 만났던 날이요…?”
말을 뱉는 목소리가 내가 느끼기에도 비정상적으로 흔들렸다. 라엔이 말하는 처음 만났던 날은 내가 퀘스트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렸던 그때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첫 만남에 기절부터 했던 것을 다시 떠올리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한을 신전에 데려가고 싶지 않아요.”
“왜요?”
“당신을 상처 입혔던 공간에 다시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괜찮아요. 다 예전 일인데요.”
“과호흡은 아무런 이유 없이 오지 않아요. 트라우마나 혹은 그와 필적할 만한 큰 스트레스 때문이겠죠.”
나도 그건 알고 있다. 그런데 과호흡이 갑자기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 설마 내가 과호흡이 왔었다고 생각하는 건….
“물론 그때는 내 탓도 있었겠지만요.”
라엔이 짓씹듯이 내뱉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뭐가요? 그럴 리가요.”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때 일이 아니에요.”
“상황을 다시 짚어 보는 게 중요한 일일 것 같긴 한데요. 지금 좀 오해가 있는 것 같….”
“그렇게 말해 줄 필요 없어요. 내가 고작 지난 일의 죄책감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지금 이한을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혼자서 앓으며 견뎌 내려고 할까 봐요.”
라엔이 허리를 숙여서 내 가슴 위로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댔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선을 따라서 붉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평소 똑 부러진 목소리를 내던 그가 어리광이라도 피우듯이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가기 싫으면 싫다고 해요. 신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문제라면 내가 다른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볼게요.”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고심한 듯했다.
라엔뿐 아니라 다들 많은 정보를 조사해 왔고, 그중에서 신전과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지금껏 뾰족한 방안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쪽 분야는 내가 더 잘 알았다. 나는 신전에 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혼자였으면 가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그런데 아니잖아요. 라엔 형도 같이 가 줄 거 아닌가요? 나를 신전에 혼자 들여보내지 않을 거잖아요.”
“당연하죠.”
“그러니까 괜찮아요. 형을 믿으니까요. 편한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언젠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라엔의 등을 조심히 쓸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형도 마음 놓아요.”
라엔은 그제야 내 가슴팍에 파묻다시피 했던 얼굴을 다시 들었다.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힘들면 말해요. 아직 신전으로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많으니까 더 고민해 봐도 좋고요.”
“알았…. 형, 울었어요?”
“그럴 리가요.”
차분하게 대답한 그는 머리 끈을 풀더니 다시 단정하게 묶었다. 그래도 옆쪽으로 몇 가닥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내가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네요. 이제 잘 시간이에요. 지금은 잠이 오나요?”
누워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본 라엔이 작게 웃었다. 그가 잘 자라며 인사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가가 붉어 보였던 게 내 착각인지 아닌지 한참을 고민했으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
“헉.”
라엔이 나가고 난 후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을 떴다. 깨고 나니 어떤 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가끔 이럴 때가 있었으므로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옆에 송하견이 있었더라면 괜히 내가 깨우게 됐을지도 몰랐다. 굳이 레데오에서처럼 같은 방을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 혼자 자겠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한밤중이네.’
창밖이 아직 깜깜했다. 몸을 일으켜 앉으니 식은땀이 났는지 등이 축축했다. 클린 마법을 쓰자 금방 보송한 상태로 돌아왔으나 찝찝한 기분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을 맞으니까 정신이 들면서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그 자리에 서 있었을까. 문고리가 달칵, 하고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율이 형?”
뒤를 돌아보자 창문을 투과한 뿌연 달빛이 그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열어 놓은 창 안으로 로 들어오는 바람에 연한 금발의 머리가 부드럽게 휘날렸다. 그는 동그랗게 뜬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네가 이 시간에 일어나 있는 건 처음인데.”
“형은요?”
“형은 이미 자고 일어났지.”
“아직 밤인데….”
“그러게. 밤인데 이한이는 왜 지금 일어나 있을까.”
박율이 자기 방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방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뺨을 한번 감싸 보더니 침대에 있던 이불로 내 몸을 꽁꽁 싸맸다.
“몸이 다 식었네. 얼마나 이렇게 있었어?”
“얼마 안 됐어요. 괜찮아요.”
“자다가 깼구나. 어디가 아픈 건 아니고?”
“아니에요. 그냥 꿈 때문에 깬 것 같아요. 기억은 안 나지만요.”
박율은 내 몸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내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창문을 닫고는 내 손에 따뜻한 우유가 담긴 유리잔을 쥐여 줬다. 안에 꿀도 넣었는지 달콤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요?”
그것도 이 야심한 밤에. 언젠가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가 내게 박율에 대한 뭔가를 말하려다가 급하게 말을 돌렸던 게 문득 생각났다.
“네가 잘 자고 있나 보러 왔어.”
“왜요?”
“보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을 잃은 채로 우유를 홀짝였다. 박율은 가볍게 웃다가 말을 이었다.
“이것만 마시고 다시 자자.”
“형,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그래. 말해.”
“내가 선택받은 용사를 만났다고 했잖아요.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뭔지 듣고 왔어요. 유언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말은 아니었지만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하는 박율을 돌아봤다.
“형은 마지막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아직 마지막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그래도요.”
언젠가 박율에게 이것과 비슷한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어떤 대답을 했더라.
“글쎄. 적어도 후회가 남지는 않을 것 같아.”
이런 대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신이 죽고 나면 모두가 당신을 잊을 텐데도 아무런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건가? 나는 그를 잊고 싶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박율이 희생되지 않기를 바랐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신전에 가서 신에게 물어야지. 시스템이 처음 보인 날, 내게 용사들의 짐을 나눠 들라고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다 마셨네. 이제 잘 시간이야.”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클린 마법으로 양치까지 한 후에 침대맡에 기대어 앉았다.
“그새 감기 든 건 아닐까 모르겠네. 자다가 앓으면 어쩌지. 음, 형이 옆에 있을까?”
“아니요. 형도 자야죠.”
“형이 네 옆에서 자면 되지.”
그런… 그런가? 태연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박율이 내 옆에 눕는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도 싫은 건 아니었다. 박율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옆으로 슬쩍 비켜 앉았다. 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난이었어. 정말 괜찮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형이 옆에서 보고 있을 테니까 편하게 자.”
“옆에서 보고만 있으면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차라리 같이 자요.”
“하긴, 신경 쓰여서 그렇겠다. 그러면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재워 줘야겠네.”
“…어떻게 재워 줄 건데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일까. 어리둥절한 나를 박율이 다시 자리에 눕혔다. 그러고는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후에 가만히 내 눈을 감겨 줬다.
연한 노란색의 빛. 감은 눈꺼풀 위로 흐릿하게 느껴지는 빛에 눈을 떠 보려고 했으나 박율의 말이 더 빨랐다.
“눈 뜨지 말고 자는 데 집중하자. 그러면 순식간에 잠들걸.”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몸이 점점 따뜻해지며 노곤하게 풀어졌다. 그가 늘 쓰던 빛 마법에다가 보온 마법을 함께 쓴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가 곁을 지켜 줘서 안심되는 것일 수도 있었고.
“…이것도 마법이에요?”
“아니. 그냥 새벽이니까. 졸린 게 당연하지.”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잘 자.”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이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박율이 언젠가 나를 이렇게 재워 준 적이 있던가 생각해 봤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그가 새벽에 뒤척이는 나를 매번 다시 재워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치듯이 들었다. 물론 밀려오는 수마에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
레데오로 다시 돌아온 이후 길지도 짧지도 않은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해가 바뀌는 첫날, 전처럼 똑같이 눈이 쏟아져 내렸고 박율은 전과 똑같은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 주고는 그날 내내 보이지 않았다.
“율이 형은 이번에도 지하실에 있나요?”
“네. 오늘이 지나면 나올 거니까 자고 일어나면 볼 수 있을 거예요.”
“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나는 오늘 밤에 연구실에 가 있을 거야. 아프거나 하면 참지 말고 내려와.”
“고마워요, 하견 형.”
그날 밤이었다. 송하견은 그의 말처럼 연구실에 가 있었기에 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그는 바빠 보였지만 내 머리맡에 잠이 잘 오게 하는 디퓨저를 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날따라 유난히 잠에 빨리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꿈속이구나.’
밝은 금발. 그의 앞에 놓인 거대한 마물. 언젠가 미래시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흐릿함도 모호함도 없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걸 보니 이건 미래시가 아닌 듯했다. 아마도 그냥 꿈 아닐까. 정확한 건 깨어나 봐야 알겠지만.
미래시에서는 그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으나 이번에 나는 측면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율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허공으로 얕게 떠올라 마물을 향해 여러 번의 마법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마물에 검을 박아 넣었다.
마물의 붉은빛이 박율의 검으로 흡수되는 것과 동시에 박율은 찬찬히 땅에 내려앉았다.
‘상당히 세세한 꿈이네.’
박율이 마물과 전투하는 모습을 옆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꿈은 현실의 무언가를 토대로 구현되는 거니까. 그런데 그런 거라면 왜 주변에 다른 용사들은 없는 거지. 나는 박율이 오롯이 혼자서 마물과 싸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이야.”
그때 박율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빠져나와서 그와 마주하듯이 허공에 둥실 뜬 채로 멈췄다. 칼날의 끝이 박율의 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