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처음 만났던 때
잠시 망설이던 민주혁이 내게 똑같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다음에.’
그러고는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내게 덮어 주는 손길에 더 추궁할 수가 없었다.
“민주혁, 너는 안 추워?”
“어. 너 때문에 더워졌어.”
그건 또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민주혁이 덮어 준 옷이 그의 온기로 데워져 있어서 내 몸도 금세 따뜻해졌다. 그가 나를 껴안았던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분수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옆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걸음을 멈췄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하얀 형체가 왠지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 그 형체가 나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곧장 앞서가던 송하견과 민주혁을 불렀다.
“먼저 가 있어요. 나는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를 만나고 올게요.”
“뭐, 지금? 한동안 안 보였다면서.”
“응, 그래서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지금 꼭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괜찮을 거야. 나도 금방 분수대 쪽으로 갈게.”
형체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떼는 내 손목을 송하견이 붙들었다. 그는 자기의 행동에 스스로도 놀란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잡았던 손을 불에 덴 듯이 곧바로 떼어 낼 리가 없으니까.
“…조심히 다녀와.”
그러나 송하견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형체를 향해 서둘러 뛰어갔다. 내 뒤쪽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마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곧장 내 앞으로 상태 창을 띄웠다. 태연한 말투였다. 거기에 대꾸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부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일부러 자취를 감췄던 거 맞죠?”
「그랬지. 네게 알려 줄 수 있는 게 더 이상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네게 말해야 할 게 생겼거든. 두 가지. 궁금해?」
상태 창 위로 이어지는 문장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내 모습에 그가 큭큭 웃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나는 네 퀘스트에 대한 거야. 현재 네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퀘스트를 살펴봤는데, 지금 진행되고 있는 ‘송하견’의 이름이 들어간 퀘스트 외에도 ‘라엔’과 ‘민주혁’의 이름이 들어간 퀘스트가 각각 하나씩 남아 있었어. 알고 있었니?」
“알고 있었어요. 그건 내가 이전에 받았던 퀘스트예요.”
제대로 수락된 것이 맞는지 확신이 안 섰는데 이제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송하견의 이번 퀘스트도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곧 마지막 퀘스트가 뜰 듯했다.
“아직 남아 있다면 퀘스트를 받아 두길 잘했네요.”
그가 말했듯 퀘스트는 내가 극복해야 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퀘스트를 성공했다는 알림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두 번째로 말해 줄 거는요?”
「내가 마지막에 어떤 말을 했는지 네가 전에 물어봤었지. 기억났어.」
“뭔데요?”
그는 말없이 허리를 숙여서 나와 마주했다. 그러고는 한 손을 들어서 자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표정을 보니까 한 번에 알아들은 것 같네. 좋아, 이제 내 할 일은 끝났어. 뒷일은 네게 맡길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인사도 없이 내 앞에서 사라졌다. 처음 나타날 때처럼 순식간이었다.
그의 행동을 곱씹으며 멍하니 걸음을 옮기니 분수대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잘 다녀왔네, 이한아. 다행이다.”
“오래 기다렸나요? 미안해요.”
“아니, 우리도 방금 왔어.”
“이 장소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을 듣고 왔어요. 잠깐이면 돼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분수대는 물이 끊긴 지 한참이나 되어서 말라붙어 있었다. 그 중앙으로 들어가서 쪼그려 앉아 기둥 아래쪽을 살폈다.
“갑자기 여기서 물이 나오거나 하진 않겠죠?”
“걱정하지 마. 뭐 찾아? 도와줄까?”
“괜찮아요, 저번에 이쯤에 있던 걸 확인했는데…. 아, 찾았어요.”
까만 석판이 손끝에 걸렸다. 그 위에 손바닥을 댔다.
“웃을게요.”
작게 속삭이자 주변이 반짝 빛났다가 사그라드는 반응이 일었다. 역시 이 말이 맞았구나. 손을 털고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거리에 즐비했던 형체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됐어요. 이제 돌아갈까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상태 창이 떠올랐다.
<필수!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Ⅴ 실패!
페널티 ‘간헐적 각혈’이 지속 시간 ‘2개월’ 동안 유지됩니다.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
성공 시:
실패 시:
제한 시간:
이제는 그다지 놀라지 않고 익숙하게 퀘스트를 수락했다.
퀘스트 창이 사라지고 나니 내게로 뻗어진 라엔의 손이 보여 그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렸다. 라엔은 나를 부드럽게 끌어당겨서 내 어깨에 손을 둘러 감싸 안았다. 여기서 숙소까지 텔레포트를 쓸 필요는 없을 텐데도. 그러나 내가 입을 여는 것보다 라엔의 말이 빨랐다.
“내일 여기를 떠날 거예요.”
“빠르네요.”
“그거 말고 다른 기분은 안 들어요?”
무슨 기분?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라엔을 바라보자 그가 입을 달싹이더니 흐릿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은 푹 자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어요.”
“그렇겠네요.”
“그래서 방까지 데려다주려고요.”
“…네?”
옆에서 나와 발을 맞추어 천천히 걷는 라엔을 올려다봤다. 내일 떠나는 것과 나를 방까지 데려다주는 것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심지어 바로 옆방인데. 라엔은 아직도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였다. 나를 데려다주기 전까지는 놓지 않을 듯싶었다.
다들 저만치에서 앞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지금 일부러 느리게 걷고 있는 건가요?”
“내가 원래 걸음이 좀 느려요.”
지금껏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는데 설마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라엔이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자는 심산으로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숙소에 도착해서 나를 방 안에 들여놓을 때까지도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늘 고생했어요. 잘 자요.”
내가 침대에 눕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는 라엔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는 놀란 듯 몸을 경직시키더니 나를 돌아봤다. 당황한 그의 표정이 꼭 ‘왜요?’ 하고 묻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아직 안 졸려요.”
“음, 그러면 따뜻한 차라도 마실래요?”
“아니요, 그런 거 말고요. 밤은 아직 한참 남았잖아요.”
라엔이 누워 있는 내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내 얼굴과 그의 손목을 잡고 있는 내 손으로 번갈아 가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 후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내 눈 위로 손을 가볍게 덮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자요. 잠이 안 오는 거면 옆에 있어 줄게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다.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나 보다.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지금 잠들지 않으면 내일 피곤할까 봐 망설이고 있었구나.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형이 지금 뭘 하고 싶은지만 생각해요. 나도 그걸 바라고 있거든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
“걱정하지 마요, 형. 하루 늦게 잔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아요. 잘할 수 있어요.”
“뭐를…. 아니, 왜 갑자기….”
내일 일정도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물론 내 체력에 문제가 있었기에 걱정하는 라엔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을 제대로 듣기 전까지는 잠도 안 올 듯싶었다. 그러니 이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 이한. 혹시 뭔가 잘못 먹었나요? 어디가 아픈가요?”
“아니요? 멀쩡해요.”
“그러면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요?”
라엔의 목소리가 곤란해하는 건지 울먹이는 건지 모를 정도로 떨렸다. 내가 뭔가 큰 잘못이라도 한 건가 싶어서 내 눈을 가리고 있던 그의 손을 떼어 냈다. 마주 본 라엔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달아올라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켜서 바로 앉았다. 그의 흔들리는 시선이 내 행동 하나하나를 찬찬히 훑었다.
“어, 나는 그냥 형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했어요. 아까 숙소로 오면서부터 말하려던 게 있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해도 된다고 얘기한 거였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 안 자도 괜찮아요.”
“아.”
라엔이 짧게 목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형? 왜 그래요, 괜찮아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른세수를 하는 그의 등에 손을 올려서 살짝 두드리자 그가 깜짝 놀라 몸을 파드득 떨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나를 다시 자리에 천천히 눕혔다. 이제는 그가 입술을 짓씹는 모습이 익숙했다.
“잠시만요.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요.”
라엔은 침대 옆에 걸터앉아서 내 가슴께를 가볍게 다독였다. 진정해야 할 건 자기면서 꼭 나를 진정시키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서 푹신한 이불이 눌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맞아요. 하려고 했던 말이 있어요.”
잠시 정적이 흐르던 방 안에 라엔의 고요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달리 차분한 것을 보니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이 안정된 듯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요. 괜히 잠을 설치게 할까 봐 다음에 하려고 했는데, 이한이 다 눈치챘다니까 그냥 말할게요.”
“네. 듣고 있어요.”
“레데오로 돌아간 다음에 잠깐 휴식을 취할 거예요. 그러고 나서 어디로 갈지 알고 있나요?”
“신전으로 간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맞다면요.”
내 가슴께를 다독이던 라엔의 손이 순간 허공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 찰나의 순간처럼 망설임을 담은 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전으로 가는 거, 괜찮나요?”
안 괜찮을 이유가 있던가?
물론 신전이라는 공간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신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은 신전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신전에 머무르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니라 용사 일행의 일원으로서 잠시 들르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다지 꺼려지지는 않았다. 머릿속을 갈무리하고 ‘괜찮아요.’라고 대답하려는데 라엔의 말이 더 빨랐다.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