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기다리고 있었지
송하견의 손에서 노트가 팔락이며 넘어갔다. 순식간에 내용을 훑은 그가 입을 열었다.
“거리에 마법 약 상점이 있어. 그곳에서 판매할 약을 여기에서 제조했던 것 같아.”
“그 노트에 적힌 조합법이 상점에서 파는 마법 약의 조합법인가요?”
“응. 보고 싶어?”
궁금하긴 했다. 송하견이 이렇게 묻는 것을 보니 상점에 아직 몇 개쯤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마법 약을 내게 보여 주려는 심산일지도 몰랐다. 온실에 원형 그대로 보존된 약초가 많았던 것처럼 상점에도 마법 약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러면 송하견이 마법 약을 사용하는 모습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가 내게 보여 줬던 폭죽이 떠올라서 설핏 웃음이 지어졌다.
“네, 보고 싶어요.”
내가 송하견을 바라보며 키득 웃자 그가 내 머리 위로 손을 턱 올려서 헤집었다. 송하견이 내게 이러는 건 처음이어서 저절로 눈이 크게 떠졌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그는 그제야 자기 행동을 자각한 듯 재빨리 손을 떼어 내고는 눈을 슬쩍 피하며 말을 이었다.
“만들어 줄 수 있어.”
“정말요? 음, 그런데 노트에 적힌 마법 약 이름만 보고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직접 만들어 주겠다는 말인 줄은 몰랐다. 물론 좋았지만 송하견을 번거롭게 하기는 싫었다. ‘굳이 만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고 말을 이으려는데 송하견이 더 빨랐다.
“내가 알아서 만들게. 너한테 어울리는 걸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송하견은 말수가 적어서 늘 진중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진중하다기보단 오히려 열의를 띤 얼굴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그는 모르는 듯했지만.
가끔 이렇게 소소한 일에도 열의를 보이는 송하견이 나는 싫지 않았다.
“고마워요. 조금 기대하고 있어도 돼요?”
“많이 기대해도 돼.”
듣기에는 장난처럼 가벼운 말이었으나 송하견의 고요한 목소리에는 이유 모를 믿음직함이 어려 있었다. 절로 고개가 세차게 끄덕여졌다. 송하견은 온실에 있었던 재료 몇 가지에 자기가 소환한 재료 몇 가지를 조합해서 마법 약을 금방 만들어 냈다.
“빠르네요.”
“빠르다고 대충 만든 건 아니야.”
“알아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대단하다고 생각해서요.”
“나도 알아. 그냥 너한테 말해 주고 싶어서. 선물해 주는 거니까.”
내 손에 쥐어진 투명한 빛의 남색 마법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선물해 주는 거예요?”
“응. 사용하는 건 나가서. 여기는 너무 좁으니까.”
“고마워요. 여기 어딘가에 마법 약 상점으로 통하는 또 다른 통로가 있을 거라고 했던가요?”
“맞아. 다들 지금 상점이 있는 큰길가에 있을 테니까, 마주칠 수도 있겠네.”
주변을 둘러보던 송하견이 얼마 안 가 통로를 찾아냈다. 통로를 따라서 걸음을 옮기니 그의 말대로 마법 약 상점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창밖을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했다. 송하견이 가게의 불을 마법으로 켜고 나서야 주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작은 상점 안의 선반 위에는 꼬리표가 붙여진 플라스크가 드문드문 놓여 있었고, 바구니에 얼기설기 담겨 있는 조그만 약병들도 보였다.
“이건 뭐예요?”
“조그만 것들은 장난용 마법 약이야.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건 1분 동안 머리카락 색을 바꿔 주는 마법 약. 그 옆에 있는 건 한 뼘 정도 크기의 회오리바람을 몇십 초 동안 나타나게 하는 거고. 아까 조합법 노트에 적혀 있던 것들이야.”
“…신기하네요. 그리고 생각보다 소소하고요. 하긴, 복잡한 마법이 담긴 마법 약은 만들기 까다롭다는 얘기를 들었었어요.”
“써 보고 싶은 건 없어?”
“있어요. 다른 거 말고, 형이 선물로 준 거요.”
내 말에 송하견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상점의 나무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흠칫 떨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나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민주혁?”
“어, 뭐야. 선이한? 여기만 불이 켜져 있길래 와 봤는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민주혁이 상당히 놀란 눈치로 나와 송하견을 번갈아 봤다.
“들어가는 것도 못 봤는데…. 형님이 텔레포트를 쓴 거라면 라엔 형님이 마나를 감지하고 바로 왔을 거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하견 형, 마법 약 상점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 일인 건가요?”
“흔한 것도 희귀한 것도 아니야. 이렇게 작은 규모의 상점이라면 마법 약을 만드는 공간이 따로 필요하고, 웬만하면 그 공간과 이어져 있는 게 더 편하니까.”
상황을 이해한 민주혁이 그제야 수긍한 얼굴을 했다.
“제가 마법 약 분야는 잘 알지 못해서 처음 들어봤습니다. 어쨌거나 이제 이곳은 거의 마무리돼서 이제 숙소로 돌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같이 가시죠.”
“민주혁.”
“네, 형님.”
상점 구석진 곳에 놓인 상자를 빤히 바라보던 송하견이 말을 이었다.
“먼저 나가 있어.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어떤 겁니까? 같이 보겠습니다.”
“아니. 밖에서 선이한에게 마법 약 써 주고 있어. 금방 나갈 거야.”
민주혁은 내 손에 들린 플라스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상점을 나섰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서 나갔다. 밖으로 완전히 나오자마자 민주혁이 입을 열었다.
“하견 형님한테 받은 거야?”
“맞아. 어떻게 알았어?”
“다른 마법 약이랑 다르게 정교해 보이니까. 색깔부터 다르잖아.”
그러고선 민주혁은 일부러 나 보라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혹시 마법 약 쓰는 방법 몰라? 그래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니, 모를 리가. 나도 나름 아카데미 열심히 다녔는데.”
그가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다니.’라고 말하는 듯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먼저 물어봐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한숨의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면 왜?”
“나는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민주혁이 지금까지 내게 해 줬던 것들이 하나하나 떠올랐으나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다. 민주혁은 내가 그걸 말해 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충분한데. 나는 너한테 받기만 했어.”
“내가 안 충분해서 그래.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자, 여기 봐 봐. 지금 마법 약 써 줄게.”
내 옆에 서서 나와 손을 겹쳐 잡은 민주혁을 슬쩍 올려다봤다. 늘 가볍게 행동하던 민주혁은 가끔 이렇게 묘한 분위기를 풍길 때가 있었다. 진심마저도 가벼운 태도로 금세 넘겨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라도 민주혁이 방금 진심을 말했던 거라면, 나는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오늘, 추운 것 같지 않아?”
“많이 추워? …아하.”
민주혁이 내 얼굴을 보고는 뭔가 알아챘다는 듯이 웃었다. 바람이 찬 건 맞았지만, 사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다른 목적이 있어서 꺼낸 말이었다. ‘담요라도 하나 소환해 주지 않을래.’ 하고 말을 잇기도 전에 민주혁이 내 등 뒤로 나를 덥석 껴안았다.
“왜….”
“춥다면서. 체온을 나눠야지.”
민주혁의 단단한 가슴팍이 등 뒤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내 어깨에 턱을 기댔다. 그러고는 나와 팔을 쭉 뻗어서 플라스크를 쥔 내 손 위로 자기 손을 겹쳤다.
“진작 말하지. 어때, 이제 안 춥지?”
귓가가 간지러웠다. 그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움직임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왠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내가 괜히 춥다고 어리광을 부린 듯한 기분에 그런 걸지도 몰랐다. 민주혁을 마주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꼭 이렇게 하고 있어야 돼?”
“어. 이제 와서 떨어지면 또 추워.”
나는 그걸 말한 게 아닌데. 민주혁이 내게로 몸을 더 밀착시키는 바람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에게도 내 몸의 작은 움직임이 느껴질 것 같아서 괜스레 호흡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아, 됐다.”
플라스크에서 작은 빛이 일었다. 곧 액체가 부글대더니 플라스크 밖으로 흘러넘쳤다. 나와 민주혁의 손을 흠뻑 적신 액체가 서서히 증발하더니 그 자리에 보랏빛 꽃송이가 피어올랐다.
“예쁘다. 이건 무슨 마법일까.”
“응, 예쁘네.”
곧장 대답하는 민주혁의 목소리가 멍해 보였다. 민주혁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내 손등 위로 겹쳐 있던 그의 손이 스르륵 올라가 내 손목을 쥐었다.
“예쁘고, 가느다랗다. 사실은 처음에 금방 부러질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걱정했는데.”
“혹시, 설마… 지금 나 말하는 거야…?”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손목은 그렇게 쉽게 부러지지 않아.”
“…….”
민주혁이 잠깐 침묵했다. 틀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설마 부러뜨려 보려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다. 민주혁이 푸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래. 너는 직접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뭐를? 맞아, 생각해 보니까 너 나랑 둘이 있을 때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서.”
“기억하고 있었네.”
“기다리고 있었지.”
“그렇게 말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
딱히 뭘 배운 적은 없는데.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나를 민주혁이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민주혁은 어딘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조급해 보이기도 했다.
“선이한. 내가 그동안 생각해 봤는데. 나….”
딸랑, 하고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 약 상점에서 송하견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잘 썼네. 마법 약.”
송하견이 내 손에 들려 있는 플라스크를 흘끗 보더니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도 상점 문을 열 때 종이 울렸었나? 상점 문 위쪽에 달린 조그만 종을 바라보았으나 알 길은 없었다.
“네, 민주혁이 금방 써 줬어요. 마음에 들어요, 형.”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민주혁 대신에 내가 말을 꺼냈다.
민주혁은 자다가 찬물을 맞은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 보이기도, 창백해 보이기도 해서 슬슬 걱정이 들 무렵, 민주혁이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을 차리더니 입을 열었다.
“형님은 찾아볼 거 다 찾아보셨습니까?”
“응. 익숙한 게 보여서. 별거 아니었어.”
송하견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지금까지 봐 왔던 꽃을 피어나게 하는 거야.”
다시 고개를 내려 바라보니 어느새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꽃들이 내 손을 스치며 낙하하고 있었다.
“네가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좋아요. 고마워요.”
언젠가 송하견에게 하바리움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그걸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하견이 만든 마법 약의 효과가 끝났다.
“박율 형하고 라엔은?”
“곧 돌아오실 겁니다. 저쪽에 있는 분수대 앞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우리도 슬슬 출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걸음을 옮기려는 민주혁의 소매를 슬쩍 잡았다.
‘아까 말하려고 했던 건?’
민주혁에게만 보이도록 입 모양으로 그렇게 묻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렇게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