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너를 믿는 나를 믿어
송하견이 언제 라벤더 차를 우려냈는지 손에 유리잔을 쥔 채로 내게 입을 열었다.
“…이런 것도 좋아했구나. 다음에는 내가 만들어 줄게.”
“네, 좋아요.”
송하견이 차를 만드는 걸 자주 봐 왔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처음은 형이었다는 거 기억해 줘, 이한아.”
나를 바라보는 박율의 눈동자에 갇힌 것처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손에 들려 있는 차의 온기가 선명했다. 이 향기까지도.
“형에 대한 건 아무것도 안 잊어버릴 거예요.”
다짐하며 말을 뱉었다. 그래도 언젠가 박율에 대한 모든 것들을 잊게 되는 걸까, 생각을 하니 손이 조금 차게 식는 것 같아서 부러 찻잔을 꾹 움켜쥐었다.
◇
<필수!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Ⅳ 실패!
페널티 ‘간헐적 코피’가 지속 시간 ‘2주’ 동안 유지됩니다.
<필수!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Ⅴ
성공 시: 송하견의 직면 획득
실패 시: 간헐적 각혈 2개월 페널티
제한 시간: 2개월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눈앞에 뜬 퀘스트 창을 바라봤다. 이제는 익숙했다. 그렇다고 해서 썩 유쾌한 건 아니었지만.
“어? 표정이 왜 그래. 이 미술품은 마음에 안 들어? 뭐, 그럴 수도 있긴 하지.”
민주혁이 내 앞에 놓인 하얀 조각상을 유심히 살폈다.
나는 지금 민주혁과 둘이서 작은 화랑에 와 있다. 미술품에 딱히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막상 와 보니 좋았다. 이곳 특유의 냄새도 마음에 들었다. 나무와 물감이 섞인 듯한 냄새. 언젠가 레데오에서 민주혁의 화실에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했다.
“내 표정이 왜?”
“썩 유쾌하지 않다는 얼굴이어서.”
민주혁의 추측은 놀랍게도 정확했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고, 잠깐 다른 걸 생각했어.”
“뭔지 알 것 같다.”
설마 이번에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하게 맞추려나? 조금 긴장한 채로 민주혁을 바라보자 그가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이 석고 조각상, 밖에 있는 형체와 비슷하게 보여서 그런 거지?”
“오, 거의 맞췄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모습이 어쩐지 조금 귀여워 보였다. 민주혁이 조각상을 손끝으로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비슷하긴 하지. 근데 저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거고, 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거잖아.”
“그건 그래.”
벽 한쪽에 걸려 있는 나무 액자에 담긴 커다란 유화 그림을 살펴봤다.
“너도 나중에 이런 전시회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내 그림으로? 당연히 좋기야 하겠지. 그래도 딱히 전시회 같은 거 안 해도 상관은 없어. 그냥 내가 즐거우면 된 거 아냐?”
“그러면 너는 그림 그릴 때 즐거워?”
“당연하지.”
확실히 그래 보이기는 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즐거웠어. 저번에 네가 나를 그려 줄 때도.”
“나는 언제든 환영이야. 아, 네 그림도 빨리 완성해서 줘야 하는데.”
“천천히 해. 앞으로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뭐.”
“그건 알지만….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시간이 흐르면 당시의 모습은 지나가 버리는 거라고. 올해도 벌써 거의 끝나 가잖아.”
“바빠서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변해 가는 모습을 남기는 것도 의미 있지 않겠어?”
“그래. 너도 참 많이 컸다. 처음에는… 아니야. 나는 그때의 너도 좋고 지금의 너도 좋아.”
민주혁이 내 뺨을 재빨리 주욱 늘리고는 저쪽으로 몸을 피했다. 내가 마음이 더 넓으니 봐주기로 했다.
미술관 한쪽에 뚫린 창문을 내다봤다. 이렇게나 평화로워 보이는데. 하얀 형체 사이로 열린 균열이 선명했다. 그러다가 불시에 눈앞에 상태 창이 떴다.
「C구역 동쪽 4번째 건물 2층.」
순식간에 사라지는 상태 창을 보니 이건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가 내게 전하는 말인 듯했다.
「네 옆에 있는 아이에게 텔레포트 부탁해서 와. 마물에 잠식당한 형체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어. 건물이 넓어. 나는 상황을 대략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지,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야, 민주혁. 우리 지금 가야 할 곳이 있어.”
민주혁에게 상황을 그대로 전하자 그가 망설이며 물었다.
“확실한 거야?”
민주혁의 시선이 내 목의 흉터로 향했다. 언젠가 마을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에게는 내가 다쳤던 상황이 트라우마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나를 믿어.”
“너는 믿어. 나를 못 믿는 거지.”
“그러면 너를 믿는 나를 믿어.”
민주혁이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웃었다. 그러고는 뒤에서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렇게 가자. 아니면 내가 불안해서 텔레포트를 못 쓰겠어.”
장난스럽게 말하려는 듯했으나 민주혁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가볍게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괜찮으니까 가자.”
민주혁은 한 번에 건물 2층으로 텔레포트하지 않았다. 밖에서 상황을 살피고 안으로 들어갈 요량인 듯했다. 건물 바로 앞에서 허공에 뜬 채로 아래를 바라봤다. 온통 검게 물든 형체 여럿이 삐걱거리며 건물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기척을 숨기려는 거야. 마물이 접근하면 느껴지는 기척이 저것들에게는 느껴지지 않아.”
“그러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겠네.”
“그렇겠지. 그렇게 접근하고 나서 순식간에 저 안에서 튀어나와서 공격할 거야. 저 모습은 효율이 떨어져 보이니까.”
“응. 서두르자. 지금 바로 상대하기에는 위험하니까 돌아가자는 말을 전해야겠어.”
민주혁이 건물 안으로 텔레포트했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찾아왔어?”
민주혁은 어떻게 알았는지 곧장 박율과 라엔, 송하견이 있는 곳으로 내려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우리 때문에 다들 당황한 듯했다.
“돌아가요. 상황이 달라졌….”
서둘러 입을 열었으나 곧장 다시 닫을 수밖에 없었다.
「‘간헐적 코피’ 페널티 적용 중입니다.」
하필 이 시점에서 페널티라니. 일단 되는 대로 소매를 들어 올려서 흘러내리는 코피를 대강 훔치며 말을 이었다.
“상황이 달라졌어요.”
“야, 괜찮아?”
“괜찮아. 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사색이 되어서 안절부절못하는 민주혁의 뒤로 박율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았어. 일단 나가자.”
“…선이한. 고개 숙이고 있어.”
“나한테 기대요.”
라엔이 내 곁으로 다가와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건물 밖으로 텔레포트했다.
“…이게 뭐야.”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왔던 거였구나.”
“기척이 없네요. 전혀 알지 못했어요.”
“이런 상황이라면 전략을 새로 짤 필요가 있겠습니다.”
라엔이 자기가 입고 있던 로브를 내게 덮어 주며 송하견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고개 조금만 숙여 볼래요? 잘했어요. 이렇게 손수건으로 꾹 누르고 있어요.”
박율이 내 소매에 묻은 핏자국을 마법으로 순식간에 지웠다.
“여기부터 숙소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어. 지금 텔레포트를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이한이에게 부담이 갈까 봐.”
“텔레포트는 안 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까 제가 텔레포트를 쓴 직후에 코피가 난 것이기도 하니까….”
“아니, 괜찮아요.”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안다고 열심히 설득한 끝에야 텔레포트로 숙소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까 그 건물 안에서 쓸 만한 책을 찾았어.”
“관광 안내 책자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까 지도입니까?”
“맞아. 샛길 같은 것도 자세하게 나와 있더라. 유용할 것 같아.”
관광 책자까지 있다니 번영한 도시였던 듯했다.
“이한아, 여기 잠깐 앉아 볼래?”
박율이 손수건을 떼어 내고 잠시 살피더니 다시 손수건을 내 코에 가져다 대고 아프지 않게 힘주어 눌렀다.
“몇 분만 더 있으면 멈출 것 같아.”
박율의 말처럼 코피는 잠시 후에 멈췄다. 그는 ‘많이 놀랐겠다.’ 하고 나를 다독이며 내 손에 따뜻한 꿀차를 쥐여 줬다.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으나 꿀차는 맛있었다.
다들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을 짜느라 여념이 없는 듯했다.
선택받은 용사가 일러 준 덕분에 빠르게 상황을 대처할 수 있었다. 감사 인사라도 전할 겸 그를 만나러 갈까 했다가 그만뒀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
◇
여러 날이 흘렀다. 다들 새로운 전략으로 마물을 잘 해치우는 중인 듯했다. 이제는 이곳에 열린 균열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는 이제 보이지 않아?”
“네. 지난번 이후로 만나지 못했어요. 이 뒤틀린 구역도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는데 그건 조금 아쉽네요.”
떠나기 전에 그를 한 번은 더 만나고 싶었는데. 나는 그동안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를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설마 내가 그때 곧바로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아서 화나기라도 한 걸까, 잠깐 고민했으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견 형, 그래서 여기를 약초 온실이라고 부른다고요?”
“응. 정해진 이름은 없어. 그냥 그렇게 불러도 돼.”
이곳은 둥근 돔 모양의 건물로, 사방이 유리여서 햇빛이 곧장 들어왔다. 파릇한 약초가 가득해서인지 송하견에게서 나는 풀 향기와 비슷한 청량한 향기가 주변에 온통 퍼져 있었다.
“오랫동안 버려진 도시였는데 어떻게 약초가 그대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시설은 그대로 유지된 것 같아.”
송하견이 허리를 숙여서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풀 하나를 땅에서 뽑아냈다.
“죽은 약초도 많아. 살아 있는 것들이 상대적으로 많을 뿐이지. 살아남기 좋은 것들만 심겨 있어.”
“형은 잠깐 봤는데도 그런 걸 다 알 수 있다니 대단해요.”
“…응. 모르는 거였어도, 공부해서라도 알아냈을 거야. 네가 물어본 거니까.”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주변을 신중하게 살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어딘가에 마법 약 제조 공간으로 이어진 통로가 있을 거야.”
“모든 약초 온실에 통로가 있나요?”
“보통은. 아, 찾았다.”
송하견이 한쪽 구석의 허공에 대고 뭔가를 읊조리자 바닥이 진동하더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지하였으나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 아래로 향하는 통로에 박힌 초록색 발광석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어서 오히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들어가 봐도 될까요?”
“응. 나만 따라오면 돼.”
송하견이 망설임 없이 계단을 몇 칸 내려가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렸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네, 고마워요.”
송하견은 나를 단단히 지탱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빛을 내는 상자를 주위에 여러 개 띄웠다.
“천천히 내려와.”
계단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아래에 있는 공간에는 커다란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개의 플라스크와 실험 도구처럼 보이는 기구들이 잡다하게 놓여 있었다. 그 사이로 두꺼운 노트가 눈에 띄었다.
“이건 뭘까요? 표지에 ‘조합 공식’이라고 적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