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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01화 (101/150)
  • 101화.

    라벤더 차

    다행히도 피를 토하고 나니까 정신은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미래시 스킬이 사용되었던 상황이 일전에도 있었으므로 침착하게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우선 박율에게 상황을 빠르게 해명해야 한다. 그리고 밖에 나간 모두를 찾아가 봐야 한다.

    ‘잠깐, 찾아가는 게 최선인가?’

    저번에 민주혁의 미래시를 봤을 때처럼 오히려 모두를 찾아갔을 때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도 있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스킬 사용을 실패해서 상황을 아예 알지 못했으므로 신중해야 했다.

    “각혈은 멈춘 것 같은데. 아직 많이 아파?”

    걱정이 담긴 박율의 목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이제 괜찮아요.”

    “물로 입 헹구자. 여기에 뱉어.”

    박율이 건넨 미지근한 물을 입 안에 머금었다가 뱉어 냈다. 진득하게 섞여 나오던 피는 세 번을 헹궈 내고 나서야 자취를 감췄다. 입 안에 맴돌던 비릿한 맛도 사라졌다.

    박율은 내 입가를 천으로 닦아 내고는 내가 봉투에 뱉은 피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더니 손을 내저어서 봉투를 사라지게 하고 내 옷을 물들인 핏자국도 클린 마법으로 지웠다.

    “고마워요.”

    “지금은 어때. 여기가 아파? 뜨거워?”

    박율이 짚은 곳은 내가 아까 손으로 말아 쥐었던 명치께였다.

    “아까는 조금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원래 각혈할 때 그런 증상이 있었어?”

    그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스킬 사용에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증상이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이걸 박율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가끔은요. 그런데, 형 혹시….”

    “그래, 듣고 있어. 계속 얘기해.”

    박율은 내 등을 받치고 허벅지 아래로 손을 넣어서 나를 안은 채로 계단을 올랐다. 머리를 그의 품에 기대고 나서야 내 몸이 이제껏 긴장된 상태였다는 것을 인식했다. 힘을 완전히 풀고 그의 품 안에서 늘어지자 그가 나를 더 안정감 있게 고쳐 안았다.

    “다른 형들은 어디쯤으로 갔는지 알고 있나요?”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

    박율은 방 안으로 들어와 나를 침대에 비스듬히 앉히고는 바로 옆의 의자에 앉았다.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묻기는 하였으나 그는 바로 답을 해 주었다.

    “도시 외곽에 있는 골목으로 갔어. 길이 복잡해서 전체적인 지도를 만들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위험한 장소는 아닌 건가요?”

    “그건 아직 알 수 없지만, 마법을 써서 지상에서 조금 떨어진 공중으로 다니면 공격받을 일은 없을 거야.”

    완벽한 안전은 없다. 위험한 지역에 긴장하고 들어서는 것보다 오히려 안전하다고 생각한 장소에서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이 돌발 상황이 일어났을 때 대처하기가 더 어렵다. 이번에도 그런 상황인 걸까?

    “이한아. 갑자기 뭐가 그렇게 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 없어. 몸에 탈 날라.”

    박율이 내 손에 유리잔을 쥐여 줬다가 내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자기가 가져갔다.

    “진정시켜 주는 약인데, 마실 수 있겠어? 한 모금이라도 마셔 볼까? 억지로는 말고.”

    유리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맑은 액체를 바라봤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 보자면 저건 분명히 잠이 오는 약일 것이다. 지금 잠들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못 마실 것 같아요.”

    “미안할 필요는 없어. 음, 그 정도로 안 좋구나. 그러면 마시는 약은 안 되겠다. 효과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붙이는 약으로 써야겠네.”

    박율은 손바닥 절반 크기 정도 되는 작은 종이를 허공에 띄워 두고 몇 가지 마법을 걸었다.

    하얀 종이 위로 깜빡깜빡 생겨났다 사그라드는 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까 암흑 속에서 깜빡거리던 미래시 스킬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푹 숙이니 박율이 급하게 내 상태를 살폈다.

    “형.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웅얼거리며 말하자 박율은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는 조금 안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꼭 뭔가 해야 하는 거야?”

    “아마도요. 신력으로 느껴진 게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다칠지도 몰라요. 내가 막아야 해요.”

    박율은 행동을 뚝 멈추고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신력…. 방금?”

    “네. 그래서 지금 밖에 있는 형들에게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러면 각혈한 것도 신력 때문인가?”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 우연히 겹친 걸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그런 종류의 신력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닌걸요.”

    신력을 사용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페널티가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됐다. 박율의 치료 거부가 여기서 더 심화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박율은 떨떠름하지만 일단은 넘어가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시기도 상황도 정확하게 모르는 거잖아. 그렇지?”

    “맞아요. 가까운 미래가 아니라 먼 미래의 일일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무슨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누군가는 늘 다칠 수밖에 없어.”

    박율은 내 상의를 천천히 걷고 가슴의 중간 부분에 방금 마법을 건 종이를 살포시 붙여 놓았다. 이것도 마음을 진정시키는 마법을 걸어 놓은 듯했는데, 살갗에 조금씩 스치는 그의 손길이 간지러워서 호흡이 그다지 안정되지는 않았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이겨 낼 수밖에 없지. 그리고 네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도, 지금까지처럼 네가 몸을 던지는 방법인 거 아니야? 결국은 네가 다치는 거잖아. 형은 그건 말리고 싶어.”

    “그래도….”

    “그래. 그래도, 잘 말했어. 형한테 말해 줘서 고마워. 이제 너 혼자가 아니라 같이 고민해 볼 수 있잖아.”

    박율이 기특하다는 것처럼 내 머리칼을 쓸었다.

    “형 생각에 오늘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많이 걱정된다면 형이 다녀와 볼게.”

    몸을 일으키는 박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형이 안 갔으면 좋겠어?”

    박율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의 옷자락을 간절하게 붙잡고 있는 내 손이 보였다. 뭐, 아니, 뭐라고?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어 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했다니.

    나는 내심 박율이 내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란 걸까? 그렇다면 그건 박율이 가서 오히려 위험해질 상황을 걱정한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왜 오늘은 다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늘은 정말 위험하지 않을 일정이거든. 그리고 하견이도 라엔이도 주혁이도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아. 게다가 세 명이나 되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충분히 신호를 보낼 수 있어.”

    박율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근거 없는 말을 내뱉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상황을 전달받고 나니까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 그냥 옆에 있어 주세요.”

    “그래, 혼자 두지 않을게.”

    박율이 맑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처럼 그날 다들 아무 일 없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다. 내가 미래시 스킬 사용 실패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 것도 다음날이 되어서였다.

    「잠깐 밖으로 나와 봐.」

    갑자기 눈앞에 떴다가 사라지는 상태 창에 곧바로 몸을 일으켜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는 건물 바로 앞쪽 도로에 서 있다가 내가 나오자마자 나를 환영 속으로 끌어 들였다.

    「네가 밖으로 나올 기미가 안 보이길래 내가 먼저 불렀어.」

    “어제 몸이 조금 안 좋아서 다들 나를 안 내보내려고 하더라고요. 나는 괜찮지만요. 그래서 급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요?”

    「상황이 변해서 네게 알려 주려고 했어. 거리에 있는 하얀 형체에 마물이 스며들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됐거든.」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그래서 어제도 신력을 빌려서 네게 말을 전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뭔가 겹친 건지 네 앞으로 상태 창이라는 걸 띄울 수가 없더라고.」

    「멀리 있을 때 그런 방식으로 말을 전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어서 다시 시도해 보진 못하고 이제야 네게 말하게 됐네.」

    그가 내 앞으로 끌어와 보여 주는 하얀 형체의 다리 부근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과 상태 창에 떠오르는 글자를 번갈아 가며 살피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신력을 사용하는 데 뭔가 겹쳐서 하려던 걸 실패할 수도 있나요?”

    상태 창에 간결하게 ‘그렇던데.’ 하고 적히는 문장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그렇다면 어제 미래시 스킬이 실패한 이유가 운 나쁘게도 그가 신력을 사용하려 했던 시기와 일치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내가 그것 때문에 어떤 고생을 했는데.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어제 시스템을 불러 보았으나 미래시를 다시 볼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고민해야 할 건 앞으로의 일이었다.

    “거기에 마물이 스며들면 어떻게 되나요?”

    「글쎄. 처음 보는 상황이라 나도 알 수가 없네. 무슨 일이 있다면 네게 곧바로 알려 줄게. 너희도 상황을 알아야 할 테니까.」

    “알았어요.”

    선택받은 용사는 내 대답을 듣고는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나를 공간에서 내보냈다.

    내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오늘까지 숙소에서 쉴 거라고 했던 박율이 나를 반겼다. 내가 금방 돌아오자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이었다.

    “거리에 있는 형체에 마물이 물들어 가는 것 같대요.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구나. 다들 돌아오면 모두에게도 전할게.”

    내가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를 만나러 갔다는 것을 미리 들었던 박율이 빠르게 수긍했다.

    “형, 그런데 그 꽃은 뭐예요?”

    “라벤더야. 여기에 원예 설비가 갖춰져 있는 상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더라. 오늘 아침에 꺾어 왔어. 향 맡아 볼래?”

    “다른 꽃향기보다 좋아요. 독특한 것 같아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차로도 마실 수 있거든. 지금 만들어 줄게.”

    연한 보랏빛의 찻물이 진한 향기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다들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온 후에 부럽다는 눈빛을 보낼 정도로.

    “선이한, 좋냐?”

    “어, 좋아.”

    “오늘 내가 남았어야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민주혁. 율이 형은 어제오늘 처음으로 쉬는 거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천천히 마셔라.”

    민주혁이 내 머리칼을 헝클이려고 하자 라엔이 민주혁의 손목을 잡아챘다.

    “지금 차 마시고 있잖아요. 건드리지 마요.”

    “고마워요, 라엔 형. 그런데 괜찮아요. 야, 민주혁, 한 모금 마셔 볼래?”

    “저쪽에 라벤더 꽃대 있어, 주혁아. 직접 만들어서 마셔.”

    내가 마시던 찻잔을 건네자 눈을 빛내며 마시려던 민주혁이 박율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입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웃겨서 키득 웃자 민주혁이 ‘네가 웃으면 됐다.’ 하고 터덜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차 안 마셔?”

    “그다지 차가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야. 네가 마시던 거에 관심이 있던 거지. 나는 이제 쉬러 간다.”

    내가 마시던 게 차 아닌가?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새 내 바로 옆에 송하견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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