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스킬 사용 실패
상태 창에는 잠깐의 공백을 두고 글자가 새겨졌다.
「선택받은 용사의 동료를 제외하고는 선택받은 용사가 죽는 순간 그의 기억을 잃어. 동료들도 인연이 깊게 엮였으니 며칠간의 유예가 있을 뿐 끝내는 잊어버리게 되고.」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요?”
어쩌면 내가 이들과 만나기 전까지 용사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일까. 하얀 형체는 ‘아무렴 어때.’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당신은 생전에 줄곧 여기에 살았던 건가요?”
「맞아. 마물을 처리하러 다니기 전까지는 내가 사랑했던 이도 함께 지냈어. 내가 이곳에 묶인 이유는 이곳이 내게 소중한 장소이기 때문일 거야. 떠나지 못한다면 한이 남은 곳이거나 소중한 장소이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어?」
「슬픈 건 아니지만 가끔 떠올리곤 해. 여기 남은 수많은 형체 중 하나가 그이의 흔적이 아닐까 하고. 뭐, 이제 와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렇군요.”
멍하니 대답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용사는 5년에 한 번씩 선택한다면서. 그런데 용사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건 그들에 대한 기억을 잊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전 대의 선택받은 용사들은 모두 죽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무렵 새로운 상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자, 이제 그만. 여기까지야.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말했다. 더 정보를 줬다가는 너와 함께 다니는 선택받은 용사에게 원망받을지도 몰라. 오늘은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하자.」
“잠깐만요, 이렇게 멋대로 가 버리는 게 어디 있…. 이미 갔네.”
그는 내 앞에서 바람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복잡한 생각 때문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길 저편에서 아침에 나갔던 박율과 라엔, 그리고 송하견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나와 있었네요.”
놀랐다는 듯이 묻는 라엔의 뒤로 송하견이 작게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민주혁은? …네가 이 시간까지 여기에 있게 내버려 뒀어?”
“네? 민주혁은 나를 찾으려고 해도 못 찾았을걸요. 볼일이 방금 끝나서요. 그리고 별로 늦은 시간도 아니니까요.”
다행히 다들 외상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치료는 필요했다. 라엔의 손을 맞잡고 치료한 후에 송하견을 치료하고 있는데 내 등 뒤로 겉옷이 덮였다.
“춥다. 들어가자, 이한아.”
이 주변에는 꽃이 없는데도 연한 꽃향기가 났다. 그렇다면 이건 틀림없이 박율의 체취였다. 박율을 바라보자 아까 하얀 형체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라서 왠지 울컥했다. 아직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괜히 코가 시큰거려 조금 훌쩍였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안아 줄까?”
박율은 싱글 웃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허리를 숙여서 내게 시선을 맞춰 왔다. 나를 안아서 데리고 돌아가려는 것처럼 팔을 뻗는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걸어갈 수 있어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게 아니라….”
왜 이야기가 항상 나를 걱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까.
박율은 열을 재듯이 내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픈 데가 없으니까 이상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상태가 안 좋은데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내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자기 이마를 가져다 댔다.
가만히 눈을 감은 박율을 조심스레 올려다봤다. 차분한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줄곧 밖에 있어서인지 이마에 닿는 그의 체온이 차가웠다. 내 얼굴도 마찬가지로 차가울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뺨이 점점 뜨거워지는 듯해 내가 먼저 몸을 뒤로 물렸다.
“열 안 나는 거 확인했잖아요. 괜찮아요.”
“음, 처음에는 그런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 아닌 것 같네.”
박율이 양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지 진심인 건지 모르겠다. 신중하게 내 안색을 살피는 표정을 보니 후자처럼 보이긴 했으나, 박율은 생각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형 때문에 더워져서 그런 거잖아요.’
속으로만 꿍얼대며 박율의 손목을 잡아 내게서 떼어 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박율과 살갗이 닿은 김에 그를 치료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는 내가 치료하려고 할 때면 끈질기게 피하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번에는 내 상태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던 건지 그대로 내 치료를 받았다.
치료가 끝났는데도 손을 놓지 않는 나를 박율이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내가 잡고 있는 자기 손을 달랑 흔들었다. 내 팔도 덩달아서 힘없이 흔들렸다.
“이건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 있어야 해요?”
“그건 아닌데. 지금은 있어 보이길래.”
어떻게 알았지. 아직 어떻게 말을 꺼낼지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입을 열었다.
“나랑 약속 하나만 해 주세요.”
“그래.”
고개를 잠깐 뒤로 돌려서 라엔과 송하견이 숙소로 먼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지금은 박율과 나뿐이니 말해도 됐다.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주세요.”
“…그래. 꼭 고백이라도 하듯이 말하는구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형도 장난한 거 아닌데.”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자 박율이 자기는 결백하다는 듯이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이 능글맞게 보여서 눈을 가늘게 떴다. 박율은 그런 나를 보고 그답지 않게 키득거리며 가볍게 웃더니 자기를 향해 서 있던 내 어깨를 쥐고 나를 돌려세웠다.
“형이 너를 두고 어디를 가. 당연히 같이 있지.”
내 귓가에 속삭이는 박율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차마 다시 고개를 돌려서 그의 얼굴을 확인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용사 임기가 끝나고 나서도요. 같이 있기로 약속한 거예요.”
“다들 방금 이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이한이가 형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한담.”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내 옆에서 걸음을 옮기는 박율의 옆모습을 슬쩍 올려다봤다. 찬 바람에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연하게 휘날렸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음에도 묘하게 굳은 듯한 그의 얼굴이 단순히 내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
“율이 형. 형은 오늘 안 나가고 숙소에 있나요?”
“맞아. 형이랑 있어서 좋아?”
“네, 좋아요.”
박율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숙소에 남는 일은 지금껏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층의 네모난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밝은 햇살 아래에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그래도 이런 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다들 교대하며 쉬는데 형은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형이 언제 쉬는지 늘 궁금했거든요.”
“마물을 마지막으로 처리할 수 있는 건 형밖에 없으니까 항상 같이 갈 수밖에 없지.”
“그러면 오늘은요?”
“오늘은 돌아볼 데가 있어서. 위험한 게 아니라 지리를 파악하려는 거거든.”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탁자에 왼쪽 뺨을 대고 엎드렸다. 그 자세로 박율을 멍하니 바라보자 창가에 서 있던 그가 내게 물었다.
“피곤해? 들어가서 잘래?”
“아니요,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졸릴 리가 없는데…. 어,”
‘잠깐만.’ 하는 목소리는 내뱉지 못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정신이 아득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이건 미래시 스킬?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생각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곧 눈앞이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
전구가 다 된 전등처럼 깜빡이는 화면은 심지어 오류가 난 듯 군데군데 깨져 있었다. 최대한 집중해 보았지만 제대로 식별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미래시 역시 흐릿할 때가 있었지만 상황은 지금이 가장 나빴다.
하여튼 시스템이 멀쩡하게 작동하는 법이 없었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순간 아무런 수확도 없이 눈이 떠졌다.
「<미래시 중급> 스킬 사용 실패!」
…뭐? 스킬 사용을 실패할 수도 있는 거였어?
어안이 벙벙한 것도 잠시였다. 명치께가 뜨거워지는 느낌에 가슴 부근의 옷자락을 말아 쥐었다.
“이한아? 갑자기 왜 그래.”
미래시 스킬이 사용되는 동안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듯했다. 아까와 같이 창가에 서 있던 박율이 내게 급하게 다가왔다.
“속이 안 좋아? 체했나?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내가 허리를 펴지 못한 채로 숨을 헐떡이자 박율이 내 등을 위에서 아래로 찬찬히 쓸었다.
“토할 것 같아?”
박율이 봉투를 소환하는 것을 눈동자만 굴려서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토할 것 같은 게 아니었다.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속이 너무 뜨거웠다. 미래시 스킬 사용을 실패한 페널티 같은 건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실패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미래시 스킬이 사용되려고 했다는 것은 뭔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뜻이었다.
“형….”
다들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말해야 하는데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쥐어 짜낸 목소리를 들은 박율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식은땀 좀 봐. 이한아, 잠깐만 형 봐 봐. 조금도 못 움직이겠어?”
“…….”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상체를 아예 푹 숙이고 고개를 무릎에 묻은 채였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박율이 계속해서 내 등을 쓸어내리며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대며 들렸으나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읍.”
속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오르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불쾌한 감각에 손으로 입을 막았으나 박율이 내 손을 잡아서 내렸다.
“괜찮아. 토해.”
아니야. 그게 아니었다.
“흐, 으…. 뜨거워.”
박율에게 잡힌 손을 뒤틀어 빼내서 가슴께를 말아 쥐었다. 사정없이 떨리는 몸을 박율이 제게 기대게 했다.
“읏, 콜록… 커헉.”
막혔던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세 때문에 내가 입고 있던 옷에 뱉어 내고 나서 확인하니 새빨간 피였다.
‘페널티를 줄 거면 제대로 주던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본 건 아무것도 없고.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를 토해 내는 중이어서 그런지 속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조금 덜했다. 고통만 없는 것뿐이기에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시야를 가리기는 하였으나 그건 별로 큰일은 아니었다.
“이한아. 언제부터 안 좋았어? 아니, 이건 나중에. 속은 안 아파?”
큰일은 지금 이 상황이었다. 침착한 목소리였으나 내 등에 닿아 있는 박율의 손이 조금 떨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