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나를 믿나요
내게 가장 잘 보이고 싶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형,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나요?”
“맞아요. 뭐일 것 같아요?”
악기점을 빙 둘러봤으나 너무 많은 종류의 악기가 있었다.
“내가 못 맞추면 어떻게 되나요?”
“뭐가 어떻게 되지 않아요. 오늘부터 기억해 줄 거잖아요.”
‘그런데 형이 그렇게 기대하는 얼굴이면 꼭 맞추고 싶잖아요.’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결국 라엔의 손을 덥석 쥐고 그의 손가락을 꾹꾹 눌러 보았다.
“뭐 해요…?”
“굳은살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책에서 본 것 같아서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오래 연주한 건 아니어서 굳은살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손은 언제까지… 싫은 건 아닌데 조금….”
내가 잡은 손을 놓지 않자 라엔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체념한 것처럼 내가 잡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 피아노. 맞죠.”
방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라엔의 시선이 악기점 중앙에 놓여 있는 검은색 피아노에 닿은 것을 분명히 봤다. 피아노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자리했기에 다른 악기와 헷갈렸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형이랑 잘 어울려서요.”
라엔이 옅게 미소 지은 채 피아노 앞에 섰다. 그가 건반을 가볍게 누르자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책으로만 봤지 이렇게 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기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놓은 지 한참 되긴 했는데 그래도 노력해 볼게요.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요.”
라엔은 네모나고 기다란 의자에 나를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앉았다.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는 감을 되찾으려는 듯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건반을 가볍게 두드렸다.
악기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라엔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라엔에게 음악은 마음의 안식처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나 그런 건 필요하니까.
곧이어 라엔의 손가락이 피아노 위를 미끄러지며 선율을 만들어 냈다. 차분하고 매끄러운 곡조에 넋을 잃고 감상했다. 악기점이 작은 공간이 아니었음에도 음악 소리로 꽉 차는 것 같았다.
“아.”
곡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내 목소리에 라엔이 나를 돌아봤다. 쏟아지는 노을이 그만을 비추는 것 같았다.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완벽하게는 못 쳤네요.”
“아니요, 전혀요. 좋았어요.”
“더 좋은 곡을 들려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에요.”
고개를 저으며 라엔의 손을 다시금 덥석 쥐었다. 이번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했지만, 손을 끌어당겨 내 가슴께에 붙이자 그가 당황해하는 게 보였다. 라엔의 손바닥 아래에서 내 심장이 뛰었다. 그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잊지 못할 거예요. 사실 책으로만 봤지 피아노 연주를 들어 본 적은 없었거든요.”
“내가 이한에게 처음인가 보네요.”
“네. 좋아하는 악기는 딱히 없었는데 오늘부터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라엔은 미동도 없이 굳어 있다가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욕심내게 되잖아요.”
라엔은 내 손을 끌어당겨 피아노 위에 올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라엔은 때때로 이럴 때가 있었다.
“잠깐이면 돼요. 알려 줄게요.”
나와 라엔의 손가락이 얽혔다. 평소 그의 손은 차가운 편이었는데 어쩐지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내 손보다 더 큰 그의 손이 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누르며 움직였다. 그와 내가 만들어 내는 멜로디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예전에 형이 뭘 좋아하는지 나한테 안 알려 줬었죠. 직접 보여 주고 싶다고요.”
“…기억하고 있었나요?”
“잊어버릴 리가 있나요. 형은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나요?”
“좋아했어요. 유일한 취미였거든요.”
“그런데 왜 그만두게 된 거예요?”
라엔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내게 걸려 있는 기대가 많았고 나는 잘 해내야 했으니까요.”
“누가 형에게 많은 일을 시켰나요?”
“아니요, 아무도요. 그냥 내 욕심이었어요. 나는 늘 욕심이 많았거든요.”
라엔이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며 멜로디를 이었다. 힘이 실린 목소리와 달리 그는 내 손을 전혀 아프게 누르지 않았다. 제 마음보다 나를 더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매일 오전, 수업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에 나는 교수진 앞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몇 가지 마법을 사용했어요.”
“아카데미에서요?”
“맞아요. 그렇게 하고 나면 교수들은 내게 그다음 단계의 마법을 알려 줬죠. 가끔은 내가 쓴 마법을 보고 노트에 뭔가를 적기도 했고요.”
“형만 그렇게 했어야 했나요?”
“네. 나는 마나량이 많아서 그 과정을 버틸 수 있었어요.”
“형이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들었어요. 그건 그런 뜻이었나요?”
“글쎄요. 이런 건 다른 사람에게는 딱히 말한 적 없어서요. 리더 형은 알고 있겠지만요.”
라엔은 그렇게 말하고 살짝 웃었다.
“형도 수석이고 재능이 있어서 그런 요구를 받았었는데, 몇 달 하다가 그만뒀대요. 일반적인 마나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그냥 자료를 보고 추가적인 공부를 하는 걸로 합의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그냥 뛰어난 학생에게 제안하는 관행 같은 거였나요?”
“비슷한 거였죠. 버틸 수 있으면 버티고 아니면 말아라, 그런 느낌으로요. 나는 마나량 하나는 많았으니 괜찮았어요. 그런데 내게 걸린 기대는 좀 버거웠던 것 같아요. 사실 나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거든요.”
이게 라엔의 의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뿌리 깊은 의심.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운이 좋았던 것뿐이죠.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노력해도 모자랄 수도 있죠.”
라엔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기에 나는 그가 이런 생각을 아무런 타격 없이 익숙하게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음정마저도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뭔가를 해내고 있다는 것 아닌가요?”
“좋게 봐 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좋은 점만 보여요. 그리고 사실 조금 실수하거나 그러면 어떤가요. 그것도 뭔가 해 나가는 과정일 뿐이잖아요.”
내가 라엔의 손에서 살짝 벗어나서 띵, 하고 이상한 건반을 누르자 라엔이 움찔하며 손을 멈췄다.
“이대로 끝이 아니잖아요. 다시 연주를 이어 나갈 거 아닌가요?”
고개를 돌리자 놀란 듯한 그의 표정이 보였다.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계속 알려 주세요. 나는 이 곡을 처음 쳐 보지만, 사실 내가 오롯이 혼자서 치는 것도 아니지만, 끝까지 연주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왜냐면 형이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나를 믿나요?”
“네. 형이 할 수 있으니까, 나도 할 수 있게 해 줄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네요.”
라엔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연주가 잠깐 끊긴 공백에 나도 라엔도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 사방이 고요했다. 라엔은 가만히 멈춰 있는 내 손을 바라보다가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는 것과 동시에 연주가 다시 이어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피아노를 치는 건 오랜만이에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나한테는 이게 처음이고, 그 처음을 완성해 주는 것도 형이잖아요.”
“모든 게 끝나고 시간이 나면 더 연습할게요. 그때 제대로 알려 주고 싶어요.”
“그래도 형, 이대로도 좋죠? 완벽하진 않지만 같이 해내고 있잖아요.”
“네. 좋아해요.”
라엔의 말과 함께 곡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나를 돌아봤다.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을 정말 좋아해요.”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창은 뜨지 않았지만 라엔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 퀘스트에 진도율 같은 게 있다면 성공에 절반쯤은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
“나 오늘은 정말 나갈 거예요.”
“야, 언제는 잡아 둔 적 있어? 가자.”
“민주혁. 내가 어제 나가려고 하니까 네가 나를 침대에 던져 놓고 한참 동안 이불로 감싸서 안고 있었던 걸 좀 생각해 봐.”
“그러고 있다가 그냥 잠들어 버린 건 너잖아.”
“…어차피 시간도 늦었었고.”
“그러니까 오늘은 가 볼게요, 하견 형.”
“그래요. 우리도 이제 나가려던 중이었어요.”
‘조심히 다녀와.’라는 박율의 목소리까지 들은 후에 문을 닫고 나섰다. 이번에는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를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또다시 나를 환영 속으로 끌어왔다.
「드디어 왔네. 한참 기다렸어.」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건 그가 제자리에 없었던 탓도 물론 있었지만 나를 향한 용사들의 과보호 탓도 있었기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상황을 몰라서 다행이었다.
「다들 너를 참 좋아하는 것 같던데.」
“네? 갑자기 왜요?”
나도 모르게 더듬더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당황한 모습을 보자 하얀 형체가 허리를 굽혀 가며 열심히 웃는 동작을 취했다.
「뭘 그렇게 놀라. 딱 봐도 보이던걸. 다들 네가 어디 갈 때마다 안 떨어지려 하고, 너만 보고 있고.」
「모노클을 쓴 아이는 네가 신력 탓에 아팠을 때 지극정성이더라. 갈색 머리 아이는 온종일 너한테 치근덕거리고.」
「붉은 머리를 묶은 아이와는 지난번에 악기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은 알고 있지.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 중에 내가 모르는 건 없으니까. 그리고 선택받은 용사인 아이는 네가 잘 때마다….」
“그만, 이제 다른 얘기 해요. …아니, 잘 때마다 왜요? 말하던 건 끝까지 해 주면 안 돼요?”
괜히 상태 창 앞에 손을 흔들어서 없애다가 그가 말을 멈추니 괜히 궁금해져서 물었다.
「별거 없어. 그냥 잘 때마다 옆에서 가만히 보다가 갔다고. 너의 안녕과 행복을 빌었어.」
“정말 그게 다예요…? 알았어요. 그게 다가 아니더라도 말해 줄 생각이 없나 보네요. 그건 그렇고 여기에 항상 있겠다면서 없을 때도 있지 않았나요? 몇 번 찾으러 왔었거든요.”
「너희가 온 뒤로 여기에 있는 마물의 상태가 변한 것 같아서 좀 자세히 살펴봤어. 아직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지켜보다가 상황이 달라지면 널 부를게. 너희 쪽에도 유능한 아이들이 많으니 알아차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많이 위험한 건 아니죠? 그러면 궁금한 게 있어요. 여기도 뒤틀린 구역 맞죠? 혹시 뒤틀린 이유를 알고 있나요? 이걸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요?”
「맞아, 뒤틀린 구역. 이유를 물어본다면… 신력 때문이겠지. 더 이상 자세한 건 알려 주지 못해. 너희 쪽 용사에게 혼날지도 몰라. 그리고 내 말의 파장이 얼마나 클지도 알 수 없고. 나는 흔적으로만 남은 존재니 큰 영향을 끼쳐서는 안 돼.」
미래시를 본 이후 그걸 말하지 못하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기에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면 되돌릴 방법만이라도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 소원처럼 뭔가 빌지 않았나요? ‘일어서 줘.’라든가, ‘잊어 줘.’ 같은 거요.”
「그걸 말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구나.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쩌지. 나는 그런 사소한 건 잊어버릴 만큼 여기에 오랫동안 있었거든.」
결국 알려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
“그러면 당신은 왜 이 자리에 남았나요? 지금까지 당신처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어요.”
「여기에 미련이 남았으니까. 사랑하는 이가 있었거든. 아, 그렇다고 그때 그이가 죽었던 건 아니야. 지금은 뭐, 시간이 워낙 오래 지났으니까 이미 존재하지 않겠지만.」
사막에서 봤던 첫 번째 용사의 기억을 떠올렸다. 미련이 남을 만한 일이라면.
“당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가 잊었나요?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