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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98화 (98/150)
  • 098화.

    네가 원하는 것

    며칠은 쉬어야 할 것 같다는 박율의 말을 웃어넘긴 후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를 찾으러 갔으나 그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조차 없었다. 주변의 큰길가를 돌아보았으나 역시 찾을 수 없었다. 필요하면 오라고 한 건 자기였으면서.

    결국 이틀간 허탕을 쳤다. 그동안 잊고 있던 퀘스트 창이 눈앞에 뜬 것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필수!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Ⅲ 실패!

    페널티 ‘메스꺼움’이 지속 시간 ‘2일’ 동안 유지됩니다.

    <필수!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Ⅳ

    성공 시: 송하견의 직면 획득

    실패 시: 간헐적 코피 2주 페널티

    제한 시간: 2주

    금방 끝날 페널티 때문에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밖에 다녀와서 피곤하다며 둘러대고 저녁도 거른 채 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내 딴에는 평소처럼 행동했으나 뭔가 걸릴 만한 것이 있었는지 곧이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한아.”

    박율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휙 돌려 창밖을 내다보니 까만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지금 시간과 내 체력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자고 있을 만했으니, 침대에 누워 이불을 파고든 후 눈을 감았다. 누우니까 속이 더 울렁이는 것 같아 절로 찌푸려지려는 얼굴을 가다듬었다.

    끼익, 하고 문이 찬찬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가 상황을 살피러 들어온 듯했다. 발소리가 침대 바로 옆에서 멈추더니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침대 한쪽이 푹 꺼졌다.

    “자는구나.”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길을 따라 내 앞머리가 쓸려 올라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서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주어 고정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하마터면 평정을 잃고 얼굴에 표정을 그대로 드러낼 뻔했다.

    “저번에 보니까 흉이 크게 졌더라. 한 번은 제대로 확인해야겠다 싶었는데.”

    박율이 내 옷깃을 한쪽으로 젖히자 찬 공기가 옷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몸을 살짝 떨자 그가 곧장 옷깃을 다시 여며 주고는 잠깐 침묵했다. 그러더니 ‘이쯤에도 있었지.’ 말하며 손끝으로 내 허리께를 가볍게 훑었다.

    “여기는 옷을 벗겨 봐야 보이겠네.”

    태연한 박율의 목소리에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귀를 의심했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들은 듯했다. 그는 기어이 내 옷을 벗겨 내려다가 바로 직전에 손을 멈췄다.

    “음,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안 깨는구나.”

    “…….”

    “아니, 이한아. 안 되겠다. 형이 졌어. 이러다가는 내가 큰일 나겠네.”

    박율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하며 내 몸 위로 이불을 잘 덮어 주고는 두어 번 다독였다.

    “안 자는 거 알고 있으니까 일어나 보자.”

    침대에 앉아 있던 박율이 바로 옆의 의자로 옮겨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곧장 눈을 뜨고 바라보는데도 그는 하나도 놀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 모를 리가. 아무리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해.”

    “상관없어서요.”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정말인데요. 형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다지 못 보여 줄 것도 아니어서요. 볼래요?”

    옷을 최소한만 들춰 허리께의 흉터 부위를 보여 주자 박율은 처음에는 조금 놀라는 듯하다가 이내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가져다 댔다.

    “알고는 있었는데 직접 보니까 마음이 아프네. 형은 네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거야. 흉터는 더더욱.”

    “사실 내가 멋대로 나선 거라서요. 아프지도 않았는걸요. 형, 그런데 왜 가까이… 흣.”

    순간 내 허리께를 매만지던 박율의 손이 등 쪽으로 깊게 파고들어 왔다. 맨살이 스치는 생경한 느낌과 함께 허리가 들어 올려졌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천천히 일으켜 앉혔다.

    “왜? 형은 괜찮다면서.”

    박율은 나를 여전히 한 팔로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그가 나를 일으켜 지탱하는 동시에 내 등 뒤로 베개를 대어 주는 중이라서 이런 자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쩐지 안 괜찮은 것 같았다.

    그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내 등에 닿은 팔 근육이 맥동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울렁이는 게 마음 때문인지 페널티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읏’ 하고 묘한 신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박율이 그런 나를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속이 좀 안 좋아?”

    “아니, 형, 지금 왜….”

    “귀는 다 익었는데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어서.”

    나는 박율의 행동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상하지 않은 그 행동에 내가 괜히 부끄러운 마음을 느낀 거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박율은 말없이 유리잔에 차를 따라서 건넸다.

    “조금 마셔 볼래? 열이 심하게 난 후에는 꼭 아무것도 못 먹더라. 지켜봤는데 오늘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길래 미리 준비해 왔어.”

    “…고마워요.”

    이번을 제외하면 두 번뿐이긴 했지만 퀘스트가 그렇게 이어져 왔기에 찔리는 마음으로 차를 받아 마셨다. 다행히 박율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추우면 말해. 속이 많이 안 좋아도 말하고.”

    박율이 나를 이불로 돌돌 감싼 채로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찬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숨이 조금 트였다.

    전보다 맑게 갠 정신으로 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박율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박율에게는 아직 퀘스트가 없었다. 그에게는 극복하지 못한 무언가가 없는 걸까. 혹은 아직 퀘스트가 뜨지 않은 것뿐일까.

    “형.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응?”

    박율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살포시 웃었다.

    “형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어떤 말이든 해 줄 수 있어.”

    “그게 아니라….”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내가 우물쭈물하자 박율이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나는 형한테 신전에 있었을 때 얘기를 했었잖아요. 형 얘기는 들은 적 없는 것 같아서요. 형이 아카데미에 있을 때 얘기라든가요.”

    “아카데미 얘기가 궁금해?”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형이 어떻게 지냈는지가 궁금해서요.”

    “형에 대해서 더 알고 싶구나?”

    “네, 맞아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니 박율이 오히려 당황한 듯했다.

    “음, 그건 별로 재미없을 텐데.”

    “왜요?”

    확신에 찬 말투였다. 박율은 답지 않게 말을 고르는 것처럼 몇 번을 망설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뭐, 그야 공부만 했으니까. 재밌을 틈이 없었지.”

    “그러면 지금은 재밌나요?”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목숨을 걸고 마물을 처리하고 있는데 재미있을 리가. 박율이 내 미간을 손끝으로 살짝 짚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지을 필요 없어. 무슨 뜻으로 물어본 건지 아니까.”

    “…네에.”

    “재미는 모르겠네. 그런데 의미는 찾은 것 같아.”

    “무슨 의미요?”

    박율의 시선이 내게 진득하게 머물렀다. 그게 어쩐지 그가 찾은 의미가 나라는 것 같아서 다시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지금이 밤이라서 다행이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일 테니까.

    “형은 지금까지 운명이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운명으로라도 엮여 있으면 좋았겠다 싶은 건 처음이거든.”

    “그런 게 없어도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알아. 네게는 정해진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너는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박율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가 능력을 썼을 때 나에게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던, 그 얘기를 하는 걸까.

    “이한이가 원하는 게 형이었으면 좋겠다.”

    “…왜요?”

    “잠깐은 바라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왜 잠깐이에요?”

    “원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박율은 창문을 닫고 잘 자라며 이불을 덮어 주고서 돌아갔다. 내가 자기를 원했으면 좋겠다는 건 그는 이미 나를 원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고민을 거듭했으나 잠들기 전까지도 아무런 결론을 지을 수 없었다.

    메스꺼움 페널티가 끝나자 몸 상태가 순식간에 좋아졌다. 탁자에 이마를 대고 종일 골골대던 내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자 바로 앞에 있던 라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한? 왜 그래요?”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요. 금방 나갔다 올게요.”

    “네? 잠깐,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아직 안색이 그렇게 창백하면서 어디를 나가요.”

    라엔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붙잡았으나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면 같이 가요.”

    “그건 괜찮은데, 내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어요.”

    내가 선택받은 용사의 형체를 만났을 때 송하견은 나를 볼 수 없었으니까.

    “…그건 좀 곤란한데. 이한이 그렇게 가 버리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아요.”

    라엔이 내 옷자락을 말아 쥐었다.

    “오늘만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이한이 다 나았다고는 하지만 나는 하루 정도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일 가요.”

    “하루 정도면… 네, 알았어요.”

    어차피 지금은 시간도 애매하니 내일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라엔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같이 바람 쐬러 갈래요? 다들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아서요.”

    “그렇게 나가는 건 괜찮은 거예요?”

    “내 옆에서 안 떨어질 거잖아요. 그러면 괜찮아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라엔에게 하마터면 나도 수긍할 뻔했다. 어쨌거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라엔이 나를 자연스럽게 안아 들고는 걸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멍하니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

    “텔레포트 쓰는 거 아니었나요? 아, 써 달라는 건 아니에요. 궁금해서요.”

    “별로 안 멀기도 하고, 바람도 쐴 겸 해서요. 밖에 노을도 지고 있어요. 지금 춥나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도 아직 몸이 다 안 나았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라엔이 마법을 써서 자기가 입고 있던 로브를 부드럽게 펼쳐 내 몸 위로 덮었다. 하긴 나라도 이틀을 내내 앓다가 느닷없이 멀쩡해졌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것 같긴 했다.

    건물에서 나와 노을이 물든 길을 두 블록 정도 걸어가자 조그만 상점이 나왔다.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요.”

    “네, 알아요.”

    라엔이 나를 한 손에 안고, 다른 손을 들어 자물쇠에 가져다 대자 딸깍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내가 멀뚱하게 바라보자 라엔이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마법으로 풀 수 있는 거면 자물쇠를 걸어 놓는 의미가 있을까요?”

    “당연히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풀 수 없죠. 원래는 이렇게 들어오면 안 돼요. 지금 여기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지만요.”

    “그러면 형은 어떻게 열었나요?”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마법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당당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악기점인 듯했다. 관리가 잘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악기가 낡아 보이지는 않았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노을빛에도 악기 위에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악기점 내부를 살피는 내게 라엔이 물었다.

    “좋아하는 악기가 있나요?”

    “음… 글쎄요. 뭐가 뭔지는 알아요. 아마도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달칵 열었다. 현을 건드려 볼까 하다가 아무리 이제는 주인이 없다고 해도 망가트리고 싶지는 않아서 그만뒀다.

    “아, 바이올린 연주는 아마….”

    라엔은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 누구요?”

    “그건 말 안 할래요. 지금은 이한에게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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