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화.
버려진 도시
“괜찮아요.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라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다독였다.
“저것들은 진짜 사람이 아니에요. 가까이 가 보면 알 거예요.”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 확인하니 라엔의 말은 사실이었다.
「‘버려진 도시’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뜬 상태 창을 넘기고 도시를 둘러봤다. 버려진 도시라는 이름처럼 도시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건물에 걸린 천막이 바람에 옅게 흔들리며 내는 사락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렸다.
“이것들은 유령인가요?”
발을 주욱 뻗으며 걷는 듯한 사람의 형체, 텅 빈 가판대 앞에서 허리를 조금 수그려 물건을 살피는 듯한 사람의 형체, 물 한 방울 없이 말라붙은 분수대에 걸터앉은 사람의 형체.
모든 동작은 생동감이 넘쳐 보였으나 그것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얼음처럼 어떠한 색감도 움직임도 없이 흐릿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푸집에 반투명한 석고를 넣고 찍어 낸 조각상 같아 보였다.
“…이건 유령 같은 게 아니고 그냥 그림자야.”
“맞아. 빈 껍데기로 남은 흔적일 뿐이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
박율이 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서 바로 옆쪽에 있는 형체에 가져다 댔다. 달리는 자세처럼 한쪽 발이 땅에서 떨어진 형체에 내 손끝이 통과하며 퐁, 하고 맑은 소리를 냈다.
“어때, 아무렇지도 않지. 그러니까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며 박율을 바라봤다. 다들 잠깐 들렸던 소리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이것 역시 시스템과 관련된, 내게만 들리는 소리인 듯했다.
“이 도시는 왜 버려졌나요?”
“사람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모두 차근차근 떠나간 건지 한순간에 증발하듯 사라진 건지 알 수는 없지만요.”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다들 관심조차 없으니까.”
“라엔 형이 줬던 책에도 관련된 내용이 없나요?”
“형님이 너한테 책을 줬어? 언제?”
내가 라엔이 선물해 준 책을 넣어 둔 품을 가리키며 말하자 민주혁이 옆에서 그걸 듣고는 불쑥 물어 왔다.
“그냥 지난번에. 형이 여러 지역에 대한 설명이 담긴 책을 선물로 줬어.”
내 대답을 들은 민주혁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잠깐 풀 죽은 얼굴을 하더니 이내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민주혁이 내게 기대할 만한 것이 있었나 고민하다가 재빨리 정답을 찾아냈다.
“아, 네가 준 노트도….”
가만. 내가 거기에 어떤 걸 썼더라. 생각날 때마다 뭔가를 적어 두긴 했는데 민주혁이 바란 용도는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그림은 안 그렸지만 나름 알차게, 소중히 썼다고 말해도 민주혁은 좋아할 것 같긴 한데.’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가 재빨리 털어 냈다. 나는 대체 무슨 근거와 자신감으로 순간 확신했던 걸까.
“내가 준 노트도?”
“잘, 쓰고 있어.”
“말투가 좀 어색한데.”
하여튼 눈치는 빠르다니까. 어떤 대답을 할지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뻣뻣하게 내뱉었으니 그게 표가 난 듯했다.
“잃어버린 건 아니지?”
“설마. 네가 준 걸 내가 어떻게 잃어버려. 항상 소중하게 쓰고 있어.”
“말만이라도 고마운데. 근데 정말 괜찮아. 잃어버렸으면 새로 주려고.”
민주혁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금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가 줬던 선물을 내가 소홀하게 다뤘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걸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러나 내가 속지에 뭘 적어 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기에 노트를 직접 꺼내서 증명할 수는 없었다. 내가 노트를 펼쳐서 민주혁의 손에 들려 주지 않더라도, 민주혁이라면 내 손에서 노트를 순식간에 낚아채서 휘리릭 펼쳐 볼 가능성이 컸다.
‘잠깐. 꼭 꺼내서 보여 줄 필요는 없잖아.’
내가 품에 노트를 잘 가지고 다닌다는 것만 확인하게 하면 될, 간단한 일이었다.
“안 잃어버렸어. 네가 만져 봐.”
“뭐…? 아니, 왜, 내가? 너, 뭐를?”
민주혁의 손을 잡아채서 내 품속으로 끌어당겨 넣으려고 하자 그가 펄쩍 뛰며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내게서 한 발자국 크게 멀어졌다.
“너는… 네가 그러니까 나는….”
“왜? 노트 잘 가지고 있다고. 품에 넣고 다니니까.”
내 말을 들은 민주혁이 순간 몸을 굳히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큼직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횡설수설했다.
“아니, 그거 때문에… 알았어. 이제 믿어. 진짜로. 근데 너 막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 나한테는 괜찮아. 괜찮… 괜찮나…?”
“무슨 일이에요?”
민주혁이 하도 소란을 피운 탓에 저 멀리서 균열을 관찰하던 세 사람이 다시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에요. 민주혁이 괜히 그러는 거예요.”
“응. 그래 보이네.”
민주혁에게로 향하는 송하견의 담담한 목소리에도 민주혁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내가 아까 라엔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다시 꺼내자 그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렇네요. 내가 기억하기론 그 책에는 여기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아요.”
“사실 나도 그럴 것 같긴 했는데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였어요.”
“만약 관련 내용이 있더라도 단편적인 내용만 짧게 서술되어 있을 거예요. 그래도 궁금하다면 한번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아까 균열을 살피던 건 마무리 지었는지, 박율이 내 옆에서 걸음을 맞춰 오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뒤틀린 구역을 대하는 방식은 둘 중 하나야. 뒤틀린 부분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않거나.”
“그러면 여기는 후자겠네요.”
“맞아. 바로 알았구나.”
“장소가 뒤틀린 이유가 신력 때문이라면, 그것 역시 신력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거의 확실해.”
큰길가를 따라서 걷다가 여관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건물은 흠 하나 없이 멀쩡하네요.”
“이 비틀린 구역에서는 기이하게 건물도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이 맞아. 어느 한 장면에 그대로 멈춰 있는 것처럼.”
건물 안에는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채였다. 아무리 버려진 도시라지만 건물에 함부로 들어가도 되는 걸까 걱정했었는데, 사람의 온기가 전혀 깃들지 않은 건물 내부를 보고 나서 걱정을 접어 둘 수 있었다.
거리에 바글바글할 정도로 늘어서 있던 사람의 형체가 건물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박율의 추측으로 그 형체는 실내에는 전무할 것이라고 했다.
박율이 이유를 덧붙인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자연스럽게 그 말에 동의했다. 어쩌면 이런 확고함과 믿음직스러움이 리더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이 건물에서 지내자. 이 부근은 큰길가라서 위험하지 않을 거야.”
“골목길은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여기가 어떤 상태인지 좀 더 둘러보려고 하는데, 이한이랑 하견이는 여기서 잠깐 있을래? 이한이는 좀 쉬고. 하견아, 부탁할게.”
“나는 별로 쉬지 않아도….”
“응, 알았어.”
송하견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삼 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여관처럼 쓰이던 곳인지 각 층에 방이 여러 개씩 있었다. 나는 송하견과 꼭대기 층의 커다란 방 안에 들어왔다.
“잘래?”
“아니요. 안 졸려요.”
잘 정돈되어 있는 침구 위에 몸을 눕히자마자 들려오는 송하견의 질문에 곧장 대답했다. 그냥 이불이 푹신해 보였을 뿐이었다. 몸을 일으켜 창가에 서서 창문을 활짝 열자 찬 공기가 방 안으로 불어왔다.
“겨울이 된 게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날이 추워졌으니까. 창문 열고 있을 거면 옷 다시 입어.”
“아, 고마워요.”
송하견이 내가 아까 침대에 누울 때 슬쩍 벗어 놓았던 겉옷을 다시 내 어깨에 걸쳐 줬다. 창틀에 기대서 바로 아래쪽에 있는 거리를 내다봤다.
“율이 형 말처럼 정말 장면이 멈춰 있는 거라면, 계절도 지금처럼 겨울인 걸까요.”
“글쎄. 무슨 옷을 입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맞아요. 그러니까 그림자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움직임 없는 하얀색 그림자요.”
그런데 저게 뭐지. 거리 저편에서 움직임이 느껴져서 그곳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는 이쪽을 향해서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급하게 송하견을 불렀다.
“형, 저기 보여요?”
“뭐가?”
“움직이는 형체요. 마물이 스며든 걸까요?”
“안 보여. 그리고 마물이 물들면 뭐든 새까맣게 변해. 그게 아니라면 마물과는 관련 없어.”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내가 겉옷 소매에 팔을 제대로 끼워 넣고 방문을 나서려 하자 송하견이 침착한 목소리로 나를 붙들었다.
“기다려. 무슨 일인데.”
“미안해요. 내가 설명이 부족했어요.”
송하견의 흔들림 없는 차분한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이쪽을 향해서 손을 흔드는 것 같은 형체가 있어요. 형한테는 안 보이고 내게만 보이는 거라면 신력과 관련 있는 거겠죠. 그렇다면 이 도시의 뒤틀린 부분을 바로잡을 방법을 알 수 있을 거예요. 항상 이런 식이었거든요.”
절반 정도는 맞고 절반 정토는 틀린 말이었다. 저 형체에 접근해서 뒤틀린 부분을 복구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안 돼. 위험할지도 몰라.”
“신력과 관련된 거라면 내게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다들 돌아오고 나서 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게 나으니까.”
“그러다가 놓치면요? 기회는 지금뿐일지도 몰라요.”
여전히 망설이는 듯한 송하견의 모습에 다급하게 목소리를 내자 그가 결심했다는 듯이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러면 같이 가.”
“네? 싫어요. 형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놔주세요.”
“같이 가거나, 안 가거나. 둘 중에서 골라.”
단호한 목소리에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았어요. 같이 가요.”
송하견은 나를 붙잡고 내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따라서 그도 거의 뛰다시피 했다. 여관에서부터 몇 블록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길 한복판에 아까 봤던 그 형체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쪽으로 한 걸음을 디딘 순간, 내 손목을 단단히 쥐고 있던 힘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옆을 돌아보니 송하견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나, 더 이상 내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안녕.」
순간 눈앞에 지직거리는 상태 창이 떴다. 점점 선명히 새겨지는 글자를 보고 삐걱거리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자 그 형체가 내게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