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만들어가는 의미
내 손바닥 위에서 일렁이는 불빛 조각을 바라봤다. 송하견은 여전히 내 손목을 감싸 쥔 채였다.
“이런 종류의 마법 약은 오랜만에 만들어 봐.”
“왜요? 싫어해서요?”
“그런 건 아니야.”
“그렇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말은 송하견이 할 법했다. 그의 말은 흐릿하고 뿌연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텅 빈 공허함이라기보다 어딘가의 경계에 걸쳐 있는 듯한 불명확함이었다. 왠지 그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전에는 그랬지.”
의외의 대답이었다.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 지금은요?”
“…지금?”
송하견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내 손목을 쥔 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새벽하늘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늘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던 그의 멍한 눈에 한순간 기이한 열망이 담긴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이었기에 내가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 그의 모노클에 비친 불빛을 착각한 것이라든가. 어쨌거나 다시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지금은, 글쎄.”
고민하던 송하견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가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압도되는 듯한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송하견의 시선이 울렁이는 내 목울대로 향했다가 다시 내 눈으로 향했다.
송하견은 그제야 잡고 있던 내 손목을 놓았다. 새벽의 찬 공기가 살갗을 쓸고 지나갔음에도 그가 쥐고 있던 손목에만 열감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평소처럼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단조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의 마법 약 담당 교수님은 내가 더 의욕적으로 배우기를 바랐었어.”
“형이 너무 뛰어나서요?”
“아니. 열정적이지 않은 학생이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의 성격상 이 말은 괜한 겸손이 아닐 듯싶었다.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작은 불빛 조각을 바라봤다. 열정적이지 않은 학생이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런데 형은 마법 약을 잘 만들잖아요.”
“잘하는 것과 의욕적인 것은 별개야. 의욕이 없어도 잘 할 수 있어.”
“그건… 맞아요.”
순식간에 송하견에게 말려들 뻔하다가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다.
“아카데미에서는 과제를 내줬다면서요. 형이 과제가 아닌데도 마법 약을 만들곤 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라엔이 너한테 거기까지 말했나 봐.”
“내가 방금 그게 라엔 형이 해 준 얘기라는 말도 했던가요?”
“아니. 라엔은 거기까지만 알고 있으니까.”
아차, 끝까지 모른 척할 것을 그랬다. 그러나 송하견은 내가 라엔에게서 자기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딱히 개의치 않은 듯했다. 어쩌면 라엔도 송하견의 이런 성격을 알고서 내게 말해 준 것일지도 몰랐다.
“과제가 아닌데도 마법 약을 만들었던 건 그냥 그게 필요했기 때문이야. 내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디에 필요했는데요?”
“…쓸모 있는 곳에.”
잠깐의 공백을 두고 대답한 송하견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쓸모없는 마법 약은 만들지 않았어.”
“쓸모가 있고 없고는 누가 정해요?”
“내가 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
“그러면 누군가 정해 준 건가요?”
“굳이 말하자면 그랬지. 그게 싫지는 않았어. …아닌가. 별로 상관은 없었어. 내 생각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고. 어쨌거나.”
송하견이 평소와 다르게 숨도 돌리지 않고 말을 잇는 탓에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는 바닥에 놓인 플라스크 병을 향해 눈짓했다.
“이것도 쓸모없는 마법 약 중에 하나였어.”
“이렇게 예쁜데도요?”
확실히 평소에는 이런 마법 약을 쓸 일이 많지는 않을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쓸모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매일같이 쓸 수 있는 마법 약은 유용한 것이고, 가끔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약은 특별한 것이다. 단지 쓰임이 다를 뿐, 모두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송하견은 반짝이는 불빛을 잡아채듯이 손에 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건 금방 사라지고 덧없으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그가 다시 손바닥을 편 자리에는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밤이 물든 새까만 허공일 뿐이었다.
나는 송하견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평소 낭만을 부르짖던 민주혁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주혁이 반박해 주기를 바라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같이 있었던 민주혁은 그새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주변이 조용하다 했네.’
고민하다가 송하견의 손바닥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렸다. 손을 맞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고요함을 뚫고 울렸다. 송하견이 조금 놀란 눈치로 나를 바라봤다.
“불빛은 사라졌지만 내 기억에는 남아 있잖아요. 나는 정말 좋았어요. 이 기쁨도 덧없는 건가요?”
“아니. 덧없지 않아.”
송하견이 못 이기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젓자 그의 머리칼이 바람에 옅게 휘날렸다. 그가 내 손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나는 쓸모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의미라는 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바닥에 놓인 플라스크 병을 들어 올려서 송하견에게 건넸다.
“지금도 형에게 의미가 생기지 않았나요? 음, 혹시 형한테는 아니더라도 나에게는….”
“응. 맞아.”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긍정의 대답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봐요, 이렇게 같이 특별한 의미를 만들었잖아요. 사실 형이 다 한 거긴 하지만요. 고마워요.”
“아니.”
송하견이 플라스크를 향해 손을 뻗는 줄 알았는데, 본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는 양 내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채더니 그대로 나를 끌어당겼다.
“지금은 네가 만들어 준 거야. 네가 오롯이.”
귓가에 스치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처럼 간질간질하게 들렸다.
그가 내게서 몸을 물리고는 마법으로 플라스크 병을 순식간에 없앴다. 나는 송하견이 한 말의 의미를 멍하니 곱씹다가 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저쪽, 민주혁.”
송하견의 시선을 따라서 등을 돌렸다. 민주혁이 쏜살같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와 내 앞에 도착했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그건 뭐야?”
“손 줘 봐.”
민주혁이 내 손을 펼쳐서 기다란 막대기 하나를 쥐여 줬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겼다. 막대기 끝에 빛이 반짝 터지더니 불꽃이 막대기를 타고 서서히 내려왔다. 빛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스파클러야. 그대로 쥐고 있어도 돼.”
“신기하다.”
“그렇지? 더 신기한 거 알려 줄까?”
팔을 쭉 뻗어서 빛을 내는 스파클러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다가 민주혁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뭔데?”
“불꽃이 다 꺼질 때쯤이면 형님들이 돌아오실걸.”
“정말? 그게 더 신기하다. 그런 마법도 있어?”
“마법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어려운 거야.”
그게 무슨 말인지 고민해 봤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에게 물어봐도 명확한 답을 내어 주지 않았기에 전략을 바꿔 송하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이한.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내가 송하견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민주혁이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쥐더니 다시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볼이 눌린 채로 눈을 가늘게 뜨고 민주혁을 바라봤다.
“이거 다 보고 나면 자러 가자.”
“그래. 알았어.”
내가 더 묻는 것을 그만두고 순순히 대답하자마자 송하견이 말을 받았다.
“…그냥 운에 맡기는 거야.”
“아, 형님. 그건 아닙니다.”
민주혁이 과장된 말투로 말하더니 스파클러를 든 내 손 위로 자기 손을 겹쳐 올렸다. 그러고는 스파클러의 끝부분으로 허공에 뭔가를 쓰는 시늉을 하면서 내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니까 형들이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던 시간이랑 스파클러 불꽃이 꺼지는 시간이 대강 맞는다는 거잖아.”
“맞아. 여러 변수가 있지만 결국에는 그 결론에 도달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하잖아. 자기 판단을 믿는 건 마법보다 더 어려운 거라고.”
“음, 그냥 운에 맡기는 거네.”
“그게 아니….”
“그래도 네 판단이니까 같이 믿어 볼게.”
민주혁이 지금까지 자기 말을 듣고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내가 믿어 줘서 좋다는 건지 부담스럽다는 건지 모를 묘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운을 끌어서 쓸 수 있는 거라면 몇 달 치를 지금 끌어와서 쓰고 싶어.”
언제는 운에 기대는 게 아니라면서. 지금 자기가 자기 말을 뒤집은 걸 아느냐는 얘기를 꺼내려다가 그냥 이 상황이 웃겨서 굳이 그런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야, 운을 끌어서 쓸 수 있는 거라면 이런데 쓰지 말고 모아 둬야지.”
“그것도 좋지. 근데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쓰게.”
“이럴 때가 어떤 때인데?”
“그냥, 너랑 같이 있을 때?”
“그러면 모아 둘 틈이 없겠는데. 우리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
“어… 맞지. 그렇네.”
확연히 느릿해진 목소리에 민주혁을 바라봤다. 스파클러의 반짝이는 불빛이 민주혁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였다. 조금 붉어진 듯한 그의 귀가 눈에 들어왔다.
“선이한. 나는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어, 불빛 꺼졌다.”
민주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파클러의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 저만치에서 허공에 연한 등은 띄운 채 걸어오는 박율과 라엔의 인영이 보였다.
“이렇게 시간이 정확히 맞을 줄은 몰랐는데. 네 말이 맞았네, 민주혁.”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민주혁의 어깨를 손끝으로 콕콕 찔렀다.
“맞다. 방금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좋다고.”
“어?”
“네가 믿었던 대로 됐으니까 당연히 좋지. 그러면 이제 자러 갈까.”
민주혁이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스파클러의 불빛은 이미 꺼져 어둠이 내려앉았는데도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의 옆얼굴에는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
날이 밝은 후, 아직 잠이 덜 깨서 멍한 정신인 내게 여러 겹의 옷이 껴입혀졌다.
“날씨가 꽤 추워졌을 거예요. 이제 겨울이니까요.”
“지금 갈 곳은 버려진 도시야.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고… 이한아, 많이 피곤해?”
“아니요. 듣고 있어요.”
내가 눈을 부릅뜨며 대답하자 박율이 겉옷의 매듭을 지어 준 후 내 뺨을 감쌌다.
“가서 쉬자. 버려진 도시긴 한데 사람만 없을 뿐이지 건물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라엔이 내 등에 손을 얹고 텔레포트를 썼다. 순식간에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버려진 도시라는 이름답게 음산하고 텅 빈 도시의 입구가 보였다. 아니, 음산하긴 했지만 텅 빈 건 아니었다.
“혹시… 형들도 저게 보이나요?”
도시 안쪽으로 보이는, 길에 수없이 늘어서 있는 희끄무레한 형체는 분명 사람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흰 석상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 있는 모습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옆에 선 라엔의 로브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