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마법약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요.”
“텔레포트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으면 제가 갔을 겁니다.”
“텔레포트로 데려온다는 말도 한 적 없고요.”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라엔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목소리이긴 했으나 민주혁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라엔과 민주혁의 성향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 둘의 의견이 엇갈리는 일이 많다는 건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작 나를 데려오는 일로 이럴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일단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므로 내 어깨 위에 얹어진 민주혁의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선이한.”
“어?”
민주혁도 라엔처럼 내게 한 소리를 하는가 싶었으나, 그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내 어깨를 더 강하게 움켜쥐더니 내게 더 가까이 붙었다. 그러고는 박율과 송하견이 있는 쪽으로 나를 이끌며 걸음을 옮겼다.
“걸어오는 데 안 힘들었어?”
“응. 얼마 걷지도 않았어.”
“내가 이한을 힘들게 했을 리가 있나요.”
옆에서 걸음을 맞춰 오는 라엔의 차분한 목소리에 민주혁은 잠깐 말없이 있다가 ‘그건 그렇습니다.’ 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엔을 부르는 송하견의 목소리에 라엔이 한발 앞서 걸어가자, 민주혁은 슬슬 걸음을 늦추더니 내게로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갑자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민주혁과 시선이 그대로 맞았다. 그가 잠깐 놀란 것 같은 표정을 하더니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몸을 뒤로 물렸다.
“데리러 가는 걸로 왜 샘을 내나, 하는 표정이었거든. 네가.”
“샘났어?”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
“내가 그렇게 보였다고?”
민주혁이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건 둘이서만 있을 때 말할 거야.”
“이렇게 궁금하게 해 놓고…? 지금 말해 주면 안 돼?”
“어. 안 돼.”
여지를 주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얼마나 중요한 얘기길래 철저하게 비밀로 하려는 것일까 싶어서 더 캐묻지 않고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내가 기회를 잡을게.”
“뭐를?”
그러나 민주혁의 대답을 듣기 전에 목도한 광경에 자연스레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게 뭐예요? 이것도 균열이에요?”
“맞아. 지금까지 봤던 거랑은 조금 다르지.”
박율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의 끝부분을 허공에 갈라져 있는 균열 속으로 살짝 집어넣었다가 빼냈다.
“틈이 더 벌어져 있어. 게다가 원래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건 가능했어도 그 반대는 불가능했거든.”
“그런데 방금은….”
“이렇게 다른 것들보다 크기가 큰 균열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야.”
“…조심해야 돼.”
송하견이 손에 든 노트에서 시선을 떼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모든 균열이 이렇게 변하고 있는 건가요?”
“아직은 아니야.”
“그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기는 하니까요.”
“맞아. 그래서 이한이도 상황을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 않아도 돼.”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섬뜩한 일이었다. 물론 자의로 저 안에 들어갈 일은 없을 테지만, 이쪽에서 넘어가는 것도 가능하다면 자칫 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이제 균열을 닫을게. 하견아, 괜찮지?”
“응. 기록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라엔과 민주혁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박율이 허공에 묶어 두었던 마물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시커먼 덩어리가 진 곳에 검을 박아 넣었다. 마물이 재가 되어 흩날리는 것과 동시에 균열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균열이 닫히는 걸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에요.”
“아, 생각해 보니까 그렇겠다.”
“라엔 형이 예전에 설명해 줬던 거랑 똑같아요.”
천을 꿰매는 것처럼 공간이 울며, 시커먼 암흑을 보이던 균열이 조금씩 아가리를 다물었다. 라엔이 베개를 찢어서 보여 주긴 했지만, 울퉁불퉁하고 허술하게 다물어진 것 같은 균열을 실제로 마주하니 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섣불리 만지지 말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박율이 내 팔을 부드럽게 잡아채고 나서야 내가 균열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내 팔을 놓았다.
“곧 여기 열린 균열을 모두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했던 거 기억나?”
“기억나요.”
“방금 그게 마지막이었거든.”
놀랄 만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전하는 박율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일이면 떠날 수 있겠다.”
“다음 장소로 바로 이동하나요?”
“그럴 거야.”
걸음을 돌려서 다시 텐트로 향하다가 뒤를 돌아봤다. 지금은 닫혀 있는 상태지만, 금방 전까지만 해도 균열은 선명하게 열려 있었다. 어쩐지 균열 속의 끝없는 암흑이 떠오르는 듯해서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눈으로 훑다가 다시 발걸음을 뗐다.
◇
그날 새벽,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새로운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에 대한 긴장 때문인지 저절로 눈이 떠졌다. 한쪽에서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대화가 들려왔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원형의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송하견과 민주혁이 보였다. 내가 바스락대는 소리를 내기라도 했는지 둘의 시선이 한 번에 내게로 향했다.
“일어났네. 시끄러웠어?”
“아니. 그냥 눈이 떠졌어.”
“…다시 자.”
“괜찮아요. 잠이 다 깨서 이제 안 졸려요.”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민주혁은 손에 쥔 채 보고 있던 송하견의 노트를 다시 송하견에게로 건넸다. 그러고는 의자 하나를 소환해서 자기 가까이에 끌어다 놓았다.
“아직 해 뜨려면 한참 멀었는데. 일단 앉아.”
“…뭐라도 마실래?”
송하견의 바로 앞 허공에서 빙빙 돌던 플라스크 세 개가 탁자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내가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유리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서 내 손에 쥐여 줬다. 연한 풀 향이 나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시니 몸 전체가 따뜻하게 데워지는 듯했다.
탁자에 놓인 플라스크 안에는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오묘한 빛깔을 내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아무런 외부 자극이 없는데도 조금씩 찰랑이는 액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형이 마법 약 만드는 걸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응.”
“원하는 게 있으면 만들어 달라고 해 봐. 형님이 다 만들어 줄 수 있으실걸.”
앞에 있는 송하견에게 다 들릴 텐데도 굳이 한 손을 올려서 무슨 비밀을 속삭이듯이 말하는 민주혁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민주혁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밤에 웃으니까 낮이랑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아.”
“그냥 어두워서 그런 거 아닐까.”
“아니야. 뭔가 좀 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지 고심하던 민주혁이 송하견에게 의견을 묻듯이 고개를 돌렸다. 민주혁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송하견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맞아. 달라.”
그의 시선이 줄곧 내게로 향해 있었기에 민주혁에게 대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게 직접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달라요?”
“봐. 내가 괜히 그런 게 아니었지, 선이한.”
민주혁이 송하견의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민주혁의 이런 말을 받아 줄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하견을 바라봤다.
“뭐가 다른데요?”
“나쁘다는 말이 아니야.”
“그러면 좋다는 말인가요?”
“응.”
간결한 대답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민주혁이 내 어깨를 쿡쿡 찌르더니 눈짓으로 탁자 위에 놓인 플라스크를 가리켰다. 맞다, 아까 이 얘기를 하다 말았지. 내가 플라스크를 빤히 바라보자 내 시선을 눈치챈 송하견이 물었다.
“마법 약. 궁금해?”
“궁금해요.”
내가 바로 대답하자 송하견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공중에 플라스크 하나를 소환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안에 여러 가지 액체를 넣고 마법을 쓰더니 뭔가를 완성시켰다.
“나가자.”
“네?”
“여기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플라스크의 목 부분을 쥔 채로 의자에서 일어나는 송하견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내 어깨 위에 덮인 두툼한 담요에는 방금 마신 차와 같이 은은한 약초 향기가 배어 있었다.
“다른 형님들이 돌아오시려면 아직 좀 걸릴 거야. 잠깐 다녀오자.”
“어디로?”
“멀리는 안 갈 거야.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맞아.”
민주혁이 담요 앞에 달린 끈을 묶어 주고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 손에 이끌려서 얼떨결에 텐트 밖으로 나갔다.
“와… 예쁘다.”
“그렇지? 날이 맑아서 그런지 밤에 별이 많이 보이더라.”
새벽하늘에 작은 점처럼 촘촘하게 박힌 별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송하견이 내 손에 플라스크를 쥐여 줬다.
“어떻게 쓰는 건지 알려 줄게.”
“내가 쓸 수 있어요?”
“아니. 나랑 같이.”
송하견이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그런데 이거 어떤 마법 약이에요?”
“지금 보여 줄게.”
송하견이 플라스크의 입구를 내게서 떨어진 곳으로 살짝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스크 안에서 밤하늘처럼 보랏빛이 도는 어두운색의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손을 떼어 내는 송하견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괜찮아.”
“어… 알아요.”
“무섭다고 말해도 되는데.”
송하견이 굳은 표정을 풀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평소엔 차가운 분위기라서 몰랐는데, 이렇게 웃는 얼굴도 그와 잘 어울려 보였다.
“같이 잡을까?”
“아니요. 괜찮아요.”
호기롭게 말했으나 곧이어 펑,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
플라스크 밖으로 색색의 불빛이 기다랗게 피어올랐다. 이전에 이들이 신호로 쓰던 불꽃보다는 훨씬 연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이제 내려놓아도 돼.”
바닥에 플라스크를 내려놓고 나서도 불꽃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민주혁은 자기가 더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때? 신기해?”
“응, 신기하다. 너는 이런 거 자주 봤었어?”
“그렇게 자주는 아니야. 마법 약을 자주 쓰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신나 보이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송하견이 내 손목을 쥐고 팔을 들어 올렸다.
“형, 왜요?”
그는 대답 대신 허공에 피어오른 불빛 조각을 내 손바닥 위로 끌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