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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92화 (92/150)

092화.

더 넓은 세상을

박율이 내 손을 잡아 내리고는 손목에 툭 튀어나와 있는 뼈를 둥글게 매만졌다.

“잘 우는 것도 같더니. 왜 정작 울어야 할 때는 그렇게 삼키고 있어.”

“내가요…?”

당황해서 박율을 바라보자 그가 쓰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서?”

박율이 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입을 달싹였으나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니 무엇을 얘기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말을 돌렸다.

“아무튼, 며칠 동안 망설이다가 새벽에 그 복도로 다시 가 봤었어요. 그런데 다 망가졌던 촛대도, 널브러졌던 양초도 다시 멀쩡하게 놓여 있더라고요. 새것인지, 아니면 고친 건지 모르겠지만요.”

전자가 맞을 것 같았다. 신전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물건을 흠집 없이 새것처럼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늦은 밤에 건물 복도를 걷는 건 처음이었어요. 사람도 물건도 없어서 휑한 복도가 촛불만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걸 보고 가장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 뭐였냐면….”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이었다.

“뭐 때문에 초를 켜 두는 걸까, 그게 궁금했어요.”

“응?”

“형은 초를 왜 켜 두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두워서는 아닐 거예요. 신전에는 마나 없이 쓸 수 있는 전등이 있거든요.”

내가 박율에게 전한 이야기 중에 꾸며 낸 말은 하나도 없었다. 초를 켜는 이유를 궁금해했던 것도 맞았다. 당시에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박율은 잠깐 당황하는 듯하더니 진지한 내 표정을 보고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신전이니까 뭔가 신성한 의미일 것 같기도 한데.”

“그럴 것 같기도 해요. 아무도 내게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 그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내가 정말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어깨를 작게 으쓱하고 넘겼다.

“형이라면 이유가 뭐일 것 같아요? 초를 켠다면요.”

박율이 언젠가 보냈던 밤의 기억. 내가 그 기억에 담긴 의미를 알아낼 수 없다면 그에게 돌려서 묻는 수밖에 없다.

“기억하기 위해서일 것 같아.”

“어떤 거를요?”

“뭐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나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 아니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거나.”

“…그렇구나.”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정답일까. 혹은 전부 정답일지도 몰랐다.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박율이 입을 열었다.

“이한아, 졸리면 자자.”

“이거… 졸린 약이었나요?”

“맞아.”

어쩐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긴 했다.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형, 지금 꿈이라면서요.”

이번에는 박율이 아직 그 얘기를 하냐는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꿈에서 해 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어떤 거?”

박율에게 가까이 와 보라고 손짓했다.

그가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서 침대 쪽으로 붙였다. 내 쪽으로 허리를 숙이는 그를 향해서 팔을 뻗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았으나 자세가 조금 애매했기에 오히려 내가 그에게 매달려서 안긴 듯한 모양새가 됐다.

“이한아.”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박율의 목소리가 간지러워서 그의 품에 파고들듯이 고개를 묻었다. 내 몸이 뜨거워서인지 닿아 있는 박율의 살갗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박율은 지금 나와 반대로 뜨거움을 느끼고 있을까.

“하고 싶었던 게 이렇게 안기는 거야?”

“내가 안은 거 아닌가요?”

말은 바로 하자 싶어서 박율의 옷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웅얼거리자 박율이 대답 대신에 팔을 들어 올려서 나를 감싸 안았다.

“알았어요. 내가 안긴 걸로 해요. 그리고 하고 싶었던 건 이거예요.”

손끝으로 박율의 뒷머리를 천천히 헤집었다. 손가락에 머리카락이 스치는 감촉이 부드러워서 작게 웃었다.

“형은 나한테 항상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괜찮죠?”

그가 ‘그래, 그래.’ 하고 달래듯이 말하며 나를 안고는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러고는 다시 허리를 숙여서 나를 침대 위에 바르게 눕혔다.

“그런데 왜 굳이 꿈에서 하고 싶었어?”

“진짜로 그러면 부끄러우니까요.”

“지금 꿈 아닌데.”

놀리듯이 말하는 박율의 목소리를 듣고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러게. 내가 정말 무슨 정신이었지. 아무래도 지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이미 꿈으로 합의된 거 아니었어요?”

“네가 원한다면, 그런 걸로 하자.”

“내가 원하면…? 형이 원하는 건 뭔데요?”

박율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나를 집요하게 훑었다. 그는 잠깐의 공백을 두고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글쎄. 이왕 꿈일 거라면,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네.”

“좋았어요.”

가물가물 내뱉자 박율이 옅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제는 무슨 느낌이기에 박율이 이렇게 자꾸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머리를 맡긴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제단 근처를 떠나서 바쁘게 이동하며 여러 번 전투를 겪었다. 이제 이곳이 마지막 장소인 듯했다.

“이한. 이제 여기를 떠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텐트는 모두가 마물과 전투하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안전한 장소에 있었다. 텐트 앞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을 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까 마물을 처리하러 갔던 라엔이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돌아와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에게 놀란 마음을 감추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네, 그래요.”

태양을 등지고 선 라엔의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무릎을 모아서 안고 있던 자세를 풀고 그에게 양손을 뻗었다. 그는 내 얼굴과 뻗은 손을 번갈아 보더니 옅게 웃고는 내 손을 그러쥐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곧바로 치료하자 라엔의 주위에 퍼져 있던 푸른 빛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주 잡은 손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치료해 달라고 온 건 아니었어요.”

“알아요.”

“그러면 왜요? 먼저 부탁하기 전까지는 치료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내가 감기를 앓은 이후, 어떤 형태로든 내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모두가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이었다.

나도 몸을 함부로 혹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으나, 치료하기 스킬은 그다지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이 아니었다. 치료하기 게이지는 스킬을 사용하는 횟수가 아닌 상처의 경중에 따라서 채워지는 듯했으니까.

“나는 그러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요.”

라엔이 아직 손을 잡고 있는 채여서 느슨하게 들어 올려진 팔을 악수하듯이 가볍게 흔들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건… 일으켜 달라는 뜻인 줄 알았어요.”

“그것도 맞아요. 형이 나를 데리러 온 것 같아서요.”

다시 옅은 미소를 그린 라엔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웠다.

“바로 알았네요. 보여 줄 게 있어서 부르러 왔어요.”

“어떤 건데요?”

“그건 가서 설명해 줄게요.”

라엔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라엔은 말도 그렇지만 행동도 빠른 편인데, 지금 나와 라엔이 걷는 속도가 서로 맞는 것을 보니 그가 내게 걸음을 맞춰 주고 있는 듯했다.

다리를 멀리 뻗어서 보폭이라도 더 크게 걸어 볼까 생각하고 있을 때, 라엔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잠깐 바라봤다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잠깐의 시간을 두고 입을 열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어서 걸어서 가는 건데, 혹시 힘든가요?”

“아니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리고 텔레포트는 마나가 꽤 든다고 했었잖아요.”

“마나 때문은 아니에요. 지금도 이한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데려가 줄 만큼 마나가 충분한데요.”

라엔의 진지한 목소리 때문에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전에 박율이 가까운 거리면 텔레포트를 써도 그렇게 큰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럭저럭 수긍할 무렵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항상 그래요. 그러니까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나한테 가장 먼저 말해 줘요.”

“네, 고마워요.”

“정말요? 약속해 준 거예요.”

인사치레 같은 말인 줄 알고 가볍게 대답했는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라엔은 티가 날 정도로 눈을 반짝였다. 꽤나 진중하게 제안했던 것인지 그는 두꺼운 책 한 권을 소환해서 공중에 둥실 띄웠다.

“아는 만큼 멀리 볼 수 있어요. 시야가 넓어질수록 세상도 넓어지고요.”

라엔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가볍게 손짓했다. 주위로 옅은 빛이 반짝 터지더니 책이 펼쳐졌다. 저절로 휘리릭 넘어가는 책장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요. 모든 게 다 끝나면요.”

세상을 구하고 나서 평화가 찾아왔을 미래를 떠올려 봤다. 그렇게 먼 미래를 벌써 바라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동시에 그 미래가 그렇게 멀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지금도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면. 그때도 나는 당신들과 함께 지금처럼 지낼 수 있는 걸까. 이전에 확신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더 많은 것들을 바라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것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으나 그것보다는….

“좋아요.”

나도 모르게 솔직하게 내뱉고 나서 환하게 웃었다. 나는 이런 작은 순간들이 좋은 것 같았다.

스러져 가는 세상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용사들. 시스템이 내 눈앞에 들이미는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만큼 모두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요?”

라엔이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머리칼이 붉은색이기에 덩달아 그렇게 보인 것일지도 몰랐다.

“네. 사실 내가 보는 세상은 항상 좁았거든요. 신전에만 있었으니까요.”

“…….”

“뭐, 그래도 지금은 형들을 만났으니까요.”

라엔이 내 앞머리를 넘기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눈썹을 살짝 올려 웃었다.

“이 책을 선물로 준다고 하면 더 좋아하겠네요.”

“어… 정말요? 무슨 책인데요?”

“여러 지역들, 도시들,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것이 유명한지. 그런 것들이 적혀 있어요.”

그가 허공에 떠 있던 책을 내 손 위로 얹어 줬다. 맨 앞 장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다음 장에는 잘 정리된 빼곡한 목차가 보였다. 몇 장을 더 넘겨 보니 라엔의 말처럼 다양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좋아할 것 같았어요.”

내가 눈을 반짝이며 본 것이 표가 많이 난 듯했다.

“소중하게 읽을게요.”

“언젠가 줘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생각나서요.”

라엔이 책 가운데에 꽂혀 있던 책갈피를 빼내서 표지와 맨 앞 장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렇게 책 표지를 다시 닫자 내 손에 들린 책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무게도 가벼워졌다.

“가지고 다니기 편하도록 마법을 걸어 뒀어요. 방금 내가 한 것처럼 책갈피를 첫 장에 두고 책을 덮으면 돼요. 원래 크기로 돌릴 때는 책갈피를 빼내면 되고요.”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수첩 정도로 크기가 줄어든 책을 품에 조심히 넣었다.

“아, 이제 다 도착했네요. 보여 줄 게 있었다고 했죠. 그게 뭐였냐면….”

“형님, 갈 때는 순식간에 텔레포트로 이동하시더니 오는 데는 한 세월이 걸리십니다.”

저만치에서 박율이랑 송하견과 나란히 서 있었던 민주혁이 순식간에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어깨에 팔을 가볍게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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