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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91화 (91/150)

091화.

차라리 울었으면

“율이 형…?”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 말을 뱉은 이유는 그가 나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내 쪽을 향한 그의 시선에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스템, 당장 나와 봐. 이거 상호 작용도 가능한 거였어? 내가 꿈꾸면서 보는 게 아니라?’

이 상황에 대해 뭐라도 해명해 보라고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시스템은 잠잠했고 바뀌는 것 역시 없었다.

박율은 이제 내 쪽으로 시선을 두는 걸로도 모자라 손을 뻗어 오기까지 했다. 긴장으로 몸이 굳어서 가까워지는 손끝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잠깐만. 그럴 리가 없잖아.’

순식간에 이성이 돌아왔다.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자 박율의 손이 향하는 곳이 제대로 보였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등이 내 바로 옆에 있었구나.’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박율은 당연하게도 내게 관심조차 두지 않고 전등을 가볍게 두드려서 껐다. 순식간에 새카매진 방 안에 타오르는 촛불만이 연한 빛을 냈다.

불이 꺼지기 직전 마주했던 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나는 박율의 시야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내 쪽을 향하고 있지만 나에게서 비껴간 눈. 우스울 정도로 익숙했다. 신전에서 숱하게 마주했던, 나를 향한 신관님들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겁니다.”

생각에 빠져 있다가 박율의 조용한 목소리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고개를 돌리자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는 양초를 앞에 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촛불의 주황빛이 어른거리는 그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박율은 그렇게 말을 맺었다.

“무슨 뜻이에요? 형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대답할 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웃음기가 지워져 있는 듯한 박율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목소리가 나왔다. 내 질문을 마지막으로 적막이 내려앉았으나 공기가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창문 안으로 밀려 들어온 찬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헝클여 놓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듯한 밝은 금색 머리칼이 보드라워 보여서 문득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현실이었다면 행동으로 옮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이 아니었고,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든 박율이 알 방법은 없었다.

“형도 매번 나한테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죠?”

듣는 이도, 보는 이도 없었지만 변명하듯 말하며 그에게로 조심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에 아무것도 닿지 못한 채로 눈을 떴다.

「‘용사님이 보낸 시간’ 보상을 사용하였습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상태 창을 바라봤다.

‘현실로 돌아온 건가?’

반투명한 상태 창 뒤로 텐트의 천장이 비치는 걸 보니 정황상 그런 듯했다.

어떻게 그 시점에서 나를 현실로 내쫓을 수가 있지. 몇 초만 더 있었더라면 만져 볼 수 있었을 텐데. 시스템을 더 원망하고 싶었으나 잠이 덜 깬 것처럼 정신이 몽롱한 느낌이어서 괜한 데 정신력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아쉬움을 묻어 두고 눈을 굴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꿈에서 봤던 것처럼 새까만 밤이었고,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주황색의 불빛이 주위를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내 옆으로 인기척 하나 없이 앉아 있는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율이 형이… 왜 여기서 나를 보고 있지?’

옆에 박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였다.

‘나를 보고 있는 건가? 아닌 건가?’

상황이 꿈에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니 어쩌면 눈앞에 상태 창이 뜨긴 했지만 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아직 꿈인가?”

피로가 덜 풀린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생각만 하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한순간 동그랗게 뜨인 박율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맞아. 꿈이야.”

나긋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

“꿈에서는 그렇게 친절하게 꿈이라고 직접 말해 주지 않으니까요.”

“직접 말해 줄 수도 있지.”

박율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하며 내 이마 위로 손바닥을 짚었다.

“춥지는 않아? 머리는 안 아파?”

“조금 쌀쌀한 것 같기도 하고…. 머리는 괜찮아요. 왜요?”

“아무래도 열이 더 오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지금도 미열이 좀 있어서. 잠깐만 일어나 볼까?”

감기가 다 낫지 않았다는 송하견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아무리 나 자신은 괜찮더라도 겉으로는 안 괜찮아 보일지도 모르니 더 신경 썼어야 했다.

박율이 내 등을 단단하게 받쳐서 천천히 일으켜 세워 앉혔다.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감기가 낫지 않을 정도로 무리했던가?’

그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지금껏 무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송하견이 챙겨 주는 약을 안 먹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물론 혼자였다면 딱히 약까지 먹을 필요는 없었겠지만, 나 때문에 일정이 지체되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약도 열심히 다 마셨다. 송하견이 내가 약병을 비울 때까지 옆에서 떠나지 않기도 했고.

‘…해결책이 없구나.’

원인이 외부에 없다면 내부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보다 더 건강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한 체질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막막한 기분에 숨을 크게 들이쉬자 박율이 내 등을 천천히 다독이며 손에 유리잔을 쥐여 줬다.

“미지근한 물이야. 마셔 볼래? 약은 상황 보고 열이 좀 더 오르면 그때 먹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내가 팔을 들어 올려 유리잔을 쥐었는데도 박율은 여전히 자기 손을 떼지 않은 채였다. 내가 물을 삼키는 속도에 맞춰 그가 유리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물을 다 마시자 그가 내 이마에 작고 네모난 종이를 붙였다. 익숙한 약초 향과 함께 시원함이 느껴지자 그제야 묵직했던 머리가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다른 형들은요?”

“꿈인데 그게 중요해?”

박율은 한결같이 그렇게 주장하는 중이었다. 작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꿈이라면서 왜 이렇게 친절하게 해 줘요?”

“형은 꿈에서도 친절할걸.”

“글쎄요.”

“아닐 거라고 확신하는구나. 왜, 형이 나오는 꿈을 꾼 적이라도 있어?”

“네.”

꿈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내가 박율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곧바로 대답하자 그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물론 표정이 변하거나 한 건 아니었고 그냥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방금이요.”

“그래?”

“네. 형한테 말을 걸었는데 형이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거든요.”

“꿈은 반대라던데.”

“그건 알아요.”

박율은 나를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였다. 그 손길에 나도 박율의 머리칼을 슬쩍 보았다가 손을 말아 쥐며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깬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슬펐어?”

“아니요, 괜찮았어요. 사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어떻게?”

“그건….”

잠깐 말을 멈추고 대답을 고민했다. 건조해진 입술을 살짝 핥고 말을 이었다.

“형이 나를 모른 척할 리가 없으니까요.”

“당연히 그렇지. 그런데 지금 많이 추워?”

침대에 기대앉은 채로 발끝을 움직여 이불을 끌어당기려고 했던 내 행동을 박율이 알아챘다. 고개를 저었으나 그는 이불을 저만치 아래로 치우고는 내 뺨과 목덜미를 차례로 짚었다.

“지금 약 먹어야겠다.”

박율이 조그만 유리병을 만들어 냈다. 플라스크 안에 있는 물약을 조금씩 따라서 섞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사실은 꿈속의 상황이 익숙했어요.”

“그랬어?”

“신관님들은 늘 나를 제대로 바라봐 주지 않으셨거든요. 스승님은 말고요.”

신중하게 약을 계량하던 박율이 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내가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내 자리도, 나도. 여기에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신전 중앙 복도에는 커다란 은색 촛대가 놓여 있었어요. 거기에 두껍고 기다란 하얀색 양초가 항상 올려져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지면 매일같이 초를 켠다고 했어요. 중요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양초 얘기를 하며 박율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별다른 동요 없이 유리병에 담은 약을 잘 섞고 있었다. 그가 계속 얘기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어렸을 때, 까치발을 들면 그 초 끝부분에 간신히 손이 닿았었거든요? 그걸 들어 올려서 바닥에 내동댕이친 적이 있어요. 신관님들이 그 복도를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점심때쯤에, 일부러요.”

“그래? …왜?”

박율이 바쁘게 놀리던 손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물어 오는 목소리가 내심 고마워서 부러 밝게 말을 이었다.

“차라리 야단쳐 줬으면 해서요.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봐 줬으면 했어요.”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열이 올라서 정신이 흐려지면 적당히 둘러대는 법도 잊어버리게 되나 보다. 조금 민망한 기분에 멋쩍게 웃었다.

“철이 없긴 했죠. 그래도 좀 이상한가요?”

“아니. 그래서 어떻게 됐어?”

박율이 내 입가에 유리병을 가져다 댔다. 달콤한 맛이 나는 찐득한 물약을 한 모금 삼키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가 내 입가를 한 번 더 부드럽게 닦고는 물을 몇 모금 입에 흘려 넣어 줬다.

“그냥 내버려 두더라고요. 양초가 바닥에서 굴러다니는데도 신관님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요.”

쨍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딪혀 망가지던 은색 촛대. 하얀 양초가 바닥에서 엉망으로 뒹구는데도 그 어떤 신관님도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가만히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때 무슨 기분이 들었던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다시 정리해 두지도 않고 도망치듯이 방으로 갔었어요. 그 뒤로 아무 일도 없었고요.”

“너의 스승이라는 사람은?”

“스승님도 말씀 없으셨어요. 내가 그랬다는 걸 모르셨을 수도 있고, 모른 척하신 것일 수도 있죠. 이제는 별로 상관없어요.”

박율이 착잡하다는 듯이 숨을 깊게 내쉬더니 내게로 손을 뻗어 양 뺨을 감쌌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이한아. 열은 더 오르겠지만, 형이 어떻게든 해 줄게. 그러니까….”

“네…? 갑자기요?”

“형은 차라리, 네가 그냥 울었으면 좋겠어.”

지금 그러려고 꺼낸 얘기가 아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나를 울리고 싶다는 건 아닐 테고. 내가 울 것처럼 보이나? 아, 뭐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열 때문에 눈이 뜨거워서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그것보다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 얘기를 꺼낸 거였는데….”

내가 손등으로 눈꺼풀을 문지르자 박율이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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