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용사님이 보낸 시간
“괜찮아요. 자고 일어나면 나아요.”
갈라진 목소리로 애써 말을 뱉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나 때문에 괜히 발이 묶여 있는 걸 원하지 않기도 했고,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괜찮았다.
다들 할 일 하러 가라고 손짓하며 이제 나는 잘 거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고 있으면 열 더 오르겠다.”
웃음기 스민 목소리와 함께 이불이 허리까지 끌어 내려졌다. 감기 때문인지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어서 나름대로 이불을 쥐고 버티려고 했지만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아마 내가 힘을 줬다는 걸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뒤로 대화하는 듯한 목소리가 간간이 이어졌으나 내게 하는 말은 아니었기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띠링, 하고 울리는 경쾌한 소리에 눈을 떴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민주혁’
치료하기 / 가져오기」
이게 왜 갑자기 눈앞에 있지.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상태 창이 꽤나 뜬금없어서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꿈이든 현실이든 나쁠 건 없었으므로 일단은 치료하기를 선택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어, 뭐야. 일어나 있었어?”
상태 창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민주혁의 목소리에 눈동자를 그쪽으로 굴렸다. 그가 축 늘어진 내 손을 붙들고 이리저리 조몰락대는 듯하다가 재빨리 손을 놓았다. 아무리 잠결이었다지만 이러고 있는 걸 느끼지도 못했다니.
“뭐 해…?”
“아까 하견 형님이 하시길래 따라 해 봤어. 나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
‘당연히 그렇겠지. 방법이 틀리니까. 하견 형은 그렇게 만지작대지 않았어.’ 하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말을 뱉을 힘이 나질 않는 것을 보니 아직 감기가 떨어지지 않은 듯했다.
“너는 일어나자마자 치료 먼저 하면 어떻게 해. 너부터 신경 좀 써라.”
내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주혁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정말 믿음직스럽다.’ 하고 말하며 내 이마를 짚었다.
“아까보다 더 뜨거운 것 같은데.”
“…어디 다녀왔어?”
“다녀왔지. 라엔 형님이랑 좀 전에 교대했어.”
“그… 콜록. 그렇구나.”
주제를 돌리려는 작은 시도가 눈치 없이 튀어나온 기침 때문에 다 망쳐져서 눈을 살짝 찡그렸다. 민주혁이 그 찰나의 순간을 봤는지 바로 물어 왔다.
“물 마실래?”
“응.”
“일어날 수 있겠어?”
“응. …아니.”
내 상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재빨리 말을 바꿨다. 민주혁이 내 등 뒤로 팔을 넣어서 나를 조심스레 일으켰다.
“나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장난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로 얼굴 옆에서 들렸다.
“고마워.”
“뭐야, 새삼스럽게.”
일어나 앉는 것밖에 하질 않았는데도 어쩐지 피곤해졌다. 몸이 몇 배나 무거워진 것 같아서 고개를 숙여 민주혁의 어깨에 묻고 몸을 기댔다.
“많이 어지러워?”
곧바로 진지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작게 저었다.
“너 열이 너무 안 떨어지는데.”
민주혁이 클린 마법을 써서 땀에 젖었던 내 옷을 말려 주고 등을 두어 번 다독였다.
“하견 형님 불러올게. 잠깐만 누워 있어.‘”
“안 돼.”
몸을 일으키려는 민주혁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쥐었다.
“너 지금 상태 심각해. 약은 또 먹어도 될지 모르겠고.”
“싫어…. 가지 마.”
“그러면 이대로 있겠다고?”
“가지 말고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나 때문에 송하견을 불러오겠다니. 도움이 되지는 못할 망정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물수건으로 몸 닦아 주는 것밖에는 없어.”
“응. 괜찮아. 좋아.”
민주혁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긍정의 대답을 내어놓자 그가 자기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잠깐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좋아.”
“…안 가고 같이 있어 주는 게?”
“그게 왜 좋아?”
“너는 싫어…?”
“그럴 리가. 좋아. 좋은데, 그래서…. 아냐, 됐다. 네가 뭘 알겠어.”
민주혁이 내 윗옷을 천천히 걷어 냈다. 그렇지 않아도 오한이 들 거 같았던 살갗이 공기에 닿는 면적이 늘어나자 온몸이 떨려 왔다.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민주혁의 품을 파고 들어가서 안겼다.
“…추워.”
민주혁이 뒤로 물러나려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자리에 굳은 듯이 멈췄다. 그리고 긴장하고 있는 듯 뻣뻣한 손길로 나를 마주 안았다.
“조금만 참아. 많이 추워?”
내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주혁이 옷을 어느 정도 다시 끌어 올려서 입혀 주고는 나를 자리에 눕혔다. 몸이 녹아내리고 흐물흐물해져서 침대에 달라붙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알았어. 그러면 천천히 할게. 잠깐 있어 봐.”
민주혁이 따뜻한 물수건으로 내 손끝부터 천천히 훑으며 올라왔다.
“온도 어때? 뜨거워?”
“…아니.”
“뜨거우면 말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차가워도 말하고.”
민주혁은 내 목을 살짝 들어 올려서 목덜미도 따뜻하게 데우고는 다시금 내 옷을 쥐었다.
“이제 옷 벗어도 괜찮지?”
“응….”
따뜻한 물수건이었기에 견딜 만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혁이 옷을 천천히 걷어 내다가 손을 멈추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진짜, 내가 지금 많이 참고 있는 걸 알까 모르겠어.”
“뭘…?”
“그래. 그럴 것 같더라고.”
열 때문에 후끈거려서 여태껏 감고 있던 눈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민주혁이 바로 내 눈꺼풀 위로 손을 덮어서 다시 눈을 감겼다.
“신경 쓰지 말고, 눈 감고 있다가 졸리면 그냥 자.”
민주혁이 물수건으로 내 상체를 느릿하게 쓸고 지나갔다. 잠들듯 몽롱한 정신이었음에도 그 느긋한 손길이 간지러워서 간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콕 찌르기까지 하자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민주혁의 손목을 쥐었다.
“간지러워.”
“흉터, 허리에도 있었네.”
“응. 라엔 형….”
“알아. 보는 건 처음이어서. 이 정도로 큰 상처였구나.”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야…. 그리고 다 지나간 거니까 이제 괜찮아.”
“지나간 시간이 여기 남아 있는 거잖아.”
민주혁은 내 허리를 손바닥으로 살짝 눌렀다. 근육이 없어서 말랑하게 살이 눌리는 게 내게도 느껴져서 민망함에 슬쩍 웃음을 흘렸다.
민주혁은 내 어깨도 손끝으로 살짝씩 누르면서 나를 몇 번 더 간지럽히다가 이내 말없이 물수건으로 내 몸을 닦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내가 잠들기 직전에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자.”
그 말을 듣고 눈을 살짝 떴을 때 본 민주혁의 귀가 어쩐지 붉게 물들어 있던 것 같기도 했다.
◇
“라엔 형.”
“네. 필요한 게 있나요? 뭐라도 먹을래요?”
“아니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나 때문에 여기에 계속 묶여 있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원래 계획이 그랬는걸요.”
내가 생각하기로는 몸에 힘이 어느 정도 돌아와서 완전히 멀쩡해졌다고 주장했으나, 여전히 열이 있다는 송하견의 단호한 말에 이틀째 침대에서 지내고 있는 채였다. 마찬가지로 거처도 계속 이곳일 수밖에 없었다.
“이동 동선을 보여 줄까요? 아니면 짜 둔 계획이 뭔지 알려 줄 수도 있어요.”
“아니요, 고마워요. 이미 충분한 것 같아요.”
라엔이 내 눈앞에 보여 주는 커다란 지도와 그 주위로 순식간에 떠오르는 빼곡한 글자가 적힌 수많은 종이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원래는 오늘이나 내일까지 여기서 머물기로 했었어. 그러니까 푹 쉬는 것만 생각하자, 이한아.”
박율이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금 ‘고마워요.’ 하고 대답했으나 나는 이미 오늘 해야 할 일을 마음속으로 정해 두고 있었다.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그간 받았던 보상 목록을 살펴보고 쓸 만한 게 있는지 생각해 뒀다. 그리고 밤이 되어서 잠들기 전에 적당한 시간이 되어 보상을 사용하기로 했다.
「‘용사님이 보낸 시간’ 보상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홀로 파랗게 반짝이는 상태 창을 바라봤다. 첫 번째 용사의 기억을 본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보상 이름을 보니 연관성이 충분한 듯했다.
「보상을 사용할 용사님이 누구인가요?
1) 용사 민주혁
2) 용사 라엔
3) 용사 송하견
4) 선택받은 용사 박율」
‘선택받은 용사 박율.’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용사가 쥐고 있던 검을 박율이 똑같이 사용하고 있었으니 네 명의 용사 중에서 그와 어떻게든 연관이 있는 이가 있다면 박율일 것이었다. 그러니 박율에 대해서 뭐라도 더 알고 싶었다.
「‘선택받은 용사 박율’에게 ‘용사님이 보낸 시간’ 보상을 사용합니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레데오의 익숙한 방 구조가 보였다. 방 한편을 차지하는 커다란 침대, 벽에 달라붙어 있는 나무 책상, 그리고 바깥이 훤히 보이는 깨끗한 창문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다만 그곳에는 방에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 외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송하견이 책상에 촘촘하게 쌓아 뒀던 플라스크도, 라엔이 방에 놓아뒀던 장식품도, 민주혁이 바닥에 놓아뒀던 그림 도구가 들어 있는 종이봉투도.
그렇다면 여기는….
그 순간 달칵, 하고 방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이는 예상과 다르지 않게 박율이었다. 박율이 허락하지 않은 공간에 내가 멋대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뒤로 슬쩍 물러났으나 당연히 그가 나를 볼 수는 없었다.
“나는 형 방에는 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곧장 창문 앞으로 걸어간 박율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말을 이었다. 전해지지 않을 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고민 없이 생각나는 대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꽃이 아니면 책이라든가요. 물론 서재는 따로 있기는 하지만요.”
박율은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한 뼘 정도 길이가 되는 원통형의 노란 양초를 꺼내어 손에 들었다.
“왜 아무것도 안 가져다 뒀어요?”
딱, 하고 손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창틀에 은색 촛대가 하나 생겨났다. 박율은 그 위에 양초를 올려두고 켰다.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촛불은 꺼지지 않고 조그맣게 흔들릴 뿐이었다. 박율은 한참을 그 앞에서 가만히 선 채 바깥 멀리 시선을 두었다.
“뭐 하는 중이에요?”
“하루가 끝났으니까.”
지금 내 말에 대답을 한 건 아니겠지. 우연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박율의 눈치를 슬쩍 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