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첫 번째 용사의 기억
박율이 내 겉옷을 제대로 여며 줬다.
“걱정하지 마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건 형이 해야 할 얘기 같은데.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이한아.”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겼다.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리니 바람이 내 등을 떠미는 것처럼 불어왔다.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박율이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왔다. 어느 정도 중앙으로 걸어가자 눈앞에 상태 창이 떴다.
「‘첫 번째 용사의 기억’을 열람하시겠습니까?」
그러겠다고 대답하자 의식이 빨려 들어가듯이 침잠하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미안하구나.】
울려 퍼지는 익숙한 신의 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첫 번째 용사에게 하는 말이었다. 멀리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손에는 박율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기다란 검이 들려 있었다.
“그런 말… 필요…. 마지막이라도 …으니까요.”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단했으나 거리가 멀어서인지 혹은 시스템이 기억을 다시 보여 주는 데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 잡음이 섞여 뚝뚝 끊어지듯 들렸다.
‘시스템. 잘 안 들려.’
내가 부르기가 무섭게 눈앞에 파란 창이 떠올랐다.
「그런 말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도 미련은 없으니까요.」
반짝 떠올랐던 글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여 주는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이 아닌가 싶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대화를 파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장소는 똑같이 이곳 사막이었으나 보이는 모습은 달랐다. 거대한 모래 폭풍이 사방에서 몰아치고, 허공을 찢어 놓으며 곳곳에 열린 균열에서는 검붉은색의 끈적한 액체가 덩어리져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힘은 본래 가졌던 완전함을 잃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단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파란 창 위에서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나 다음으로 잠깐의 간격을 두고 새겨진 글자는 네모난 창을 꽉 채울 정도로 분량이 많았다.
「당신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이 세상에는 완전한 무언가가 있을 리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마기가 쌓이고 있는 것이 다른 곳도 아니고 제 몸인데.」
첫 문장밖에 읽지 못했는데, 유연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시스템은 지금까지와 똑같이 몇 초가 흐르자 상태 창을 눈앞에서 지워 버렸다.
‘…시스템. 속도가 너무 빠른데.’
그러나 지나간 말을 다시 보여 주는 일은 없이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더는 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눈을 크게 뜨고 상태 창을 바라봤다.
「불완전함을 메꾸는 방식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닙니다. 결국에는 마기가 다시 흩어질 테니까, 계속 똑같이 반복되겠네요.」
「나는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거란다.」
「압니다. 그래서 더 안타깝습니다.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했는데.」
「포기하지 않겠다는 건 방치하겠다는 게 아니란다. 방안을 찾겠다는 것이지.」
첫 번째 용사의 눈앞에 놓인 거대한 무언가는 분명 마물일 것이었다. 세상을 삼킬 듯한 마물의 그림자가 그의 위쪽으로 드리워졌음에도 그는 작은 떨림조차 없이 태연하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젠가는 끝난다는 말입니까.」
「그렇단다.」
「뭐,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가 생각보다 가벼운 동작으로 마물에 검을 박아 넣었다. 회색 재가 되어 흩어지는 마물의 잔해 속에서 점점이 떠오르는 붉은빛이 그가 들고 있는 검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났던 아이야. 바라는 것이 있느냐.」
「아이라는 말은 여러 번 들어도 적응이 안 되네요.」
더 이상 이 공간에 존재하는 마물은 없었다. 모든 상황이 끝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긴장한 것처럼 검을 여러 번 고쳐 쥐었다.
「떠올렸을 때 아픈 기억으로 남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이 멸망해 가는 세상 속에서 구원의 빛이라도 되는 양 반짝였다.
「모두가, 잊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눈앞에 움직이던 모든 장면이 멈췄다. 보여 줄 것은 이제 끝났다는 것처럼.
그가 검을 쥔 채 그 자리에서 굳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파란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장이 쓰인 파란 창은 내게 힌트를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적막 속에서 입을 열었다.
“잊을게요.”
그리고 암전이었다.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 오는 빗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나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차가운 빗방울이 내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몸이 젖어 들어 가고 있어서인지 혹은 방금 본 장면에 대한 생각을 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몸 전체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용사의 기억’을 열람하였습니다.」
새롭게 떠오른 상태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내게로 사정없이 쏟아지며 시야를 가리던 거센 비가 뚝 그쳤다.
“이한아.”
박율이 내 위쪽으로 씌운 투명한 막을 타고 빗물이 나를 비껴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물방울이 막에 닿으며 쉴 새 없이 타닥거려 그의 말소리가 묻혔다. 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자 그가 내 바로 앞에 와서 섰다.
박율의 손이 내게 닿자마자 젖었던 머리와 옷이 한순간에 보송하게 말랐다. 마법을 써 주고는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그의 손을 나도 모르게 붙잡았다. 그는 잠깐 놀란 것 같은 눈을 했으나 내 손을 떼어 내지는 않았다.
‘형이랑은 관계없는 거죠?’
두서없이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삼켰다.
시스템이 첫 번째 용사의 기억을 내게 보여 준 것은 정확히 무엇을 전하기 위함이었을까. 채 정리되지 않은 뒤엉킨 생각 속에서 건져 낼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으나, 어느새 쿵쿵 울리고 있는 심장 소리만큼은 선명했다.
“왜 울어.”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뭐가요? …아, 빗물이에요.”
박율도 빗소리 때문에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인지, 나를 꽉 끌어안고 달래듯이 다독였다. 비릿한 비 냄새 속에서 그에게서 나는 연한 꽃향기가 홀로 봄날인 것처럼 부드러웠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축 늘어져 그에게 매달리듯이 안겼다.
“추워? 벌써 몸이 다 식었네.”
“괜찮아요.”
“아닌 것 같은데.”
박율이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내게 입혔다. 추운 건 아니었지만 훨씬 따뜻해지긴 했다. 아까 나올 때부터 걸쳐 입었던 겉옷도 있었으므로 옷을 두 겹이나 껴입게 되긴 했지만, 그의 옷이 생각보다 큼직해서 불편하지는 않았다.
박율이 옷을 그다지 크게 입는 편도 아닌데. 나와 그의 체격 차이를 새삼 느끼며 어쩐지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은 옷을 괜히 매만졌다.
“보내지 말 걸 그랬다.”
“왜요? 아무 일도 없었고, 울었던 것도 아니에요.”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는 기색이어서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지금 내가 뒤틀린 구역을 제대로 돌려놓은 거잖아요. 그렇죠?”
“그래. 맞아.”
박율이 칭찬하는 것처럼 말갛게 웃었다. 그러고는 이제 돌아가려는 듯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으나 바로 텔레포트를 쓰지 않고 내게 물었다.
“이한아, 첫 번째 용사의 기억 속에서 뭘 봤어?”
아직은 섣불리 말할 때가 아니었기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특별한 건 없었고, 이 장소의 뒤틀린 부분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한 힌트를 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기억 속에서 그걸 찾아서 지금 되돌릴 수 있었던 거예요.”
“그랬구나. 다른 건?”
“지금 생각나는 건 없어요.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좀 더 시간을 두고 떠올려 봐야 할 것 같아요.”
잠깐 공백을 뒀던 박율이 안심한 듯 풀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더 생각나거나 얘기할 만한 게 있으면 형한테도 말해 줘.”
“알았어요.”
박율이 텔레포트를 써서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언제 돌아와 있었는지 우리를 보고는 이쪽으로 순식간에 다가왔다.
“야, 선이한. 왜 그래? 형님, 괜찮으십니까?”
“몸이 좀 찬 것 같아서 눕히려고. 하견아, 혹시 모르니까 약도 좀 챙겨 놔 줄래?”
“응.”
순식간에 상황이 진행됐다. 라엔이 내 등 뒤로 베개를 대어 주고 박율이 나를 비스듬히 앉혀 이불을 허리까지 덮어 줬다. 송하견이 손에 쥐여 준 따뜻한 김이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 안에 맴도는 씁쓸한 맛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니, 지금 왜…. 고마운데, 괜찮아요. 잠깐 나갔던 건데요.”
“비도 맞았으니까.”
“예? 그게 정말입니까?”
“율이 형이 바로 말려 줬잖아요.”
박율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그는 내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손바닥으로 내 목덜미를 짚었다.
“이러다가 열 오르는 건 아닐까 싶네.”
“…약은 준비해 뒀어.”
“약은 필요 없어요. 괜찮… 지금 내 말 듣고 있나요?”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더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간의 숱한 경험으로 깨달았기에 다른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제단 위에서 찾을 건 다 찾았어요. 그래서 이제 다른 곳으로 가도 될 것 같아요.”
“뭘 찾았는데?”
“이한이가 이 장소의 뒤틀린 부분을 되돌릴 방법을 알아냈거든.”
“아, 그래서였습니까. 형님이 아까 하늘에 빛을 밝혀서 보낸 신호는 봤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내게서 벗어난 주제로 순조롭게 이어지는 대화를 안심하며 듣고 있는데 민주혁이 내 옆으로 풀썩 앉았다.
“졸리면 자.”
“아니야….”
“너 벌써 반쯤 자고 있는데.”
“아니거든….”
“이러는 건 처음이랑 달라진 게 없냐.”
민주혁이 과장되게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나를 자리에 바로 눕혀 주고는 이불까지 제대로 덮어 줬다.
“편하게 자, 이한아.”
부드러운 목소리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리지 못하고 의식을 놓듯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
“선이한. 괜히 힘 빼지 말고 가만히 있어.”
송하견의 단호한 목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던 행동을 멈췄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니. 물론 눈도 멀쩡히 뜨고 있지는 못했다. 시야가 빙글 돌며 몸이 축 가라앉는 느낌이 들어서 눈을 꾹 감았다.
“많이 안 좋아? 약은 먹고 자야 할 텐데.”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목이 건조해서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말하는 건 포기하고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대강 고개를 젓자 박율이 내 뺨을 감싸서 멈췄다. 시원한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열이 심해서 머리 흔들면 안 돼. 어지러워.”
박율이 나를 천천히 일으켜서 비스듬히 기대어 앉혀 줬다. 곧바로 입술에 차가운 유리잔 같은 게 대어졌다.
“조금씩 삼켜. 못 넘기겠으면 억지로 마시지 말고.”
조심스레 기울여지는 유리잔에 담긴 걸쭉한 액체를 삼켰다. 코가 막혀서인지 어떠한 맛과 향도 나지 않았다.
“목은. 안 아파?”
“…괜찮….”
“말하지 마. 목이 다 갈라졌네.”
목소리는 그렇게 들릴 수 있겠지만 시스템 덕분에 하나도 아프지는 않았다. 그래도 말할 때 불편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군말하지 않고 박율이 입가에 대 주는 미지근한 물도 몇 모금 마셨다.
“야, 비 잠깐만 맞은 거라서 괜찮다던 사람은 어디로 갔어. 어떻게 그새 감기에 걸리냐.”
“안 그래도 아파서 힘들 텐데 괜히 건드리지 마요.”
“……. 맞아.”
“그러면 아프지나 말든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내 이마를 짚어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라엔이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서 쥐었다.
“맞아요. 아프지 말아요.”
그건 아마 누구보다 내가 가장 바라는 일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