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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88화 (88/150)
  • 088화.

    필요한 건

    나와 박율 사이에 짧은 적막이 흘렀다. 다들 안으로 들어가 있었기에 텐트 밖에 있는 건 나와 그뿐이었다. 괜히 발끝으로 모래 위를 비빚거리다가 곧 시치미를 떼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형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올라갔을 때 표정이 안 좋았던 것 같아서. 아니야?”

    아, 그래서 물어본 거였구나. 박율이 상태 창을 볼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하며 내심 안도했다.

    박율이 내 왼팔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손길은 스치듯이 지나갔다. 나의 온 신경과 시선이 박율에게로 향해 있었기에 찰나의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빛을 읽을 수 있었다. 간절한 것 같기도 했고 집요한 것 같기도 했다.

    “뭐 때문이었어? 솔직하게 말해 줘, 이한아. 형이 도와줄 수도 있고, 같이 해 줄 수도 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잘못 봤던 거 아닐까요?”

    마음은 고마웠지만 안타깝게도 도움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같이 할 수 있는 일이었어도 박율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아니면 높은 데 올라가니까 바람이 많이 불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좀 찡그렸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괜찮아요.”

    “그랬구나. 형이 잘못 생각했나 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다음에 무슨 일이 있으면 형한테 먼저 말해 줘. 약속했던 거 안 잊었지?”

    ‘그때 했던 약속이 그런 약속이었나요?’ 하고 물으려던 말을 삼켰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상황을 어떻게든 넘어가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 그러면 됐어.”

    가볍게 수긍하는 목소리에 살며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없는데.’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무슨 생각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손을 가만히 쥐었다가 폈다. 기도실의 석판 앞에서 박율은 내가 치료할 수 없도록 내 손에 장갑을 씌워 놓았었다. 물론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번에 또다시 몰래 빠져나가는 걸 들킨다면 박율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것을 할 가능성도….

    “이만 들어갈까?”

    “잠깐….”

    생각에 빠져 있다가 반사적으로 박율의 팔을 그러쥐었다. 박율이 텐트 입구를 열기 위해서 뻗던 손을 멈추고는 나를 차분하게 내려다봤다.

    “형, 사실은 그게 아니라….”

    “왜? 말하고 싶은 게 생겼어?”

    기다렸다는 듯이 태연하게 물어 오는 박율을 보니 내가 털어놓을지 말지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던 말은 처음부터 안 믿었던 거죠.”

    “아니, 믿었어. 네가 하는 말이면 뭐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뭐든’이라고 한다면 그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내가 그간 말하지 않고 교묘하게 덜어 냈던 사실들에 대해 떠올렸다. 시스템이나 퀘스트 같은 것들. 무엇을 위한 일인지도 제대로 알려 주지 않은 채 눈앞에 들이밀어졌던 임무들.

    “정말 뭐든지 받아들여 줄 거예요?”

    “그래. 지금까지도 항상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박율을 바라봤다. 그에게 전부 말하고 나면 같이 뭐라도 더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적어도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마음의 짐을 덜어 낼 수라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접었다.

    시스템이나 퀘스트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박율이 믿어 주는 것 이전에, 지금의 모든 순간은 시시껄렁한 게임 같은 게 아니라 현실이니까.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러니까 내 진심과 행동이 다른 목적을 띤 가벼운 것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고마워요.”

    깊이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결국 뱉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아, 그리고 나도 형이 말하는 거라면 뭐든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형도 다 말해 주세요.”

    “글쎄. 그건 좀 고민해 볼게.”

    “어… 왜요?”

    “아직 네가 다 안 컸으니까.”

    박율이 키를 가늠하듯이 내 머리 위로 손을 부드럽게 올려놓았다.

    “그래서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박율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어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잠깐 샛길로 빠졌던 대화의 주제를 다시 끌고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제단의 가장 위쪽에 섰을 때 신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혼자서 오면 보여 줄 게 있다고요.”

    “그래, 제단이 신전과 관련된 것이니 신이 목소리를 전할 수가 있었겠네.”

    시스템 창이 눈앞에 보였다는 것을 그대로 말할 수 없어서 진실을 조금 틀었으나 박율은 그런대로 납득한 듯했다.

    “그런데 왜 굳이 너 혼자서 가야만 하지?”

    “그건 모르겠어요. 내가 신전에서 살았으니까 내게만 말씀하시려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위험한 일도 아닐 테니까 괜찮아요.”

    “네가 너한테 위험할 거라고 여기는 일이 있기는 할까.”

    박율이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혼잣말처럼 내뱉고는 대화를 이었다.

    “너한테 뭘 보여 주려는 건지는 모르고?”

    “첫 번째 용사의 기억이요.”

    “……. 어?”

    박율이 당황한 듯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런 반응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 역시 같은 용사이니, 첫 번째 용사의 기억을 궁금해하리라 여겼다. 말하지 않았어야 했나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아마 뭔가를 제대로 보여 주지는 않을 거예요. 첫 번째 용사의 기억 중에서 나한테 전하고 싶으신 부분이 있는 거겠죠.”

    “…그 전하고 싶은 부분이 뭘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가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사실 기회를 봐서 새벽에 몰래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이미 형한테 다 말했으니까요. 그냥 지금 다른 형들한테도 말하고….”

    “아니.”

    박율이 내 어깨를 붙들고 가늠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걸 알 필요는 없으니 네게 가지 말라고 말해도… 너는 어떻게든 가려고 하겠지?”

    내가 어색하게 웃자 박율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를 붙잡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까. 내 어깨를 쥔 박율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거 같았다. 아니 내 기분 탓일 것이다. 아마도.

    “그러면 따로 말하지 말고 다들 잠든 다음에 가자. 형이랑 둘이서.”

    잠깐 고민하던 박율에게서 나온 대답이 내가 생각했던 범위에서 한참 벗어나 있어서 당황했다.

    “형이 같이 가겠다고요?”

    “응.”

    “혼자여야 된다고 했는데요…?”

    “상층이라고 짚어서 말했으니까. 형은 어느 정도까지만 너를 데려다주고, 가장 위쪽으로 올라가는 건 네가 하면 되지.”

    “음, 혼자서 다녀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런 방법도 있겠다 싶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박율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고. 너 혼자서는 못 보내.”

    “꼭 필요한 일인데도 안 보내 줄 거예요?”

    “못 보내는 거야. 형한테 필요한 건 너니까.”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가볍게 웃었다.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유일한 힐러니까. 게다가 박율은 팀의 대표 격인 입장이니 힐러를 더욱 필요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아요.”

    “정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차분한 미소를 띤 박율을 바라봤다. 숨소리조차 들릴 적막 속에서 내게 시선을 떼지 않는 박율 때문에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여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알아요. 아니, 몰라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내 머리칼을 헝클이는 박율의 손길이 느껴졌다.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으므로 짧게 심호흡하고 진정한 후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허리를 숙여서 나를 살피려는 듯하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형이… 같이 가 줄 거라면, 다른 형들 몰래 행동할 필요가 있나요?”

    놀라서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 나를 박율이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둘이서만 다녀올 거니까.”

    “왜요? 그냥 모두에게 말하고 지금 바로 다녀와도 괜찮지 않을까요.”

    “뭘 보게 될지 모르니까. 알리는 건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음… 알았어요.”

    “그래. 다녀오는 건 오늘 밤이 좋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박율이 텐트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향해서 물었다.

    “내가 형한테 말하지 않고 나갔으면 화냈을 건가요?”

    “화냈을 리가. 그냥….”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내게로 고개를 돌린 박율이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바람이 많이 부네. 이만 들어가자.”

    끝내 박율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날 밤, 박율을 제외한 모두가 밖을 둘러보러 나갈 거라고 했다. 그전까지 잠든 척하고 있으려는 생각이었지만 이불이 너무 포근해서인지 정말로 선잠이 들었다.

    “다녀올게요, 이한. 잘 자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초점이 맞기도 전에 곧바로 라엔이 그의 손바닥을 내 눈꺼풀 위로 덮어서 시야를 가렸다.

    “더 자요.”

    “…라엔. 네가 깨웠어.”

    “목소리 낮춰요. 그리고 지금까지 깼던 적 없단 말이에요.”

    “아. …그렇다고 나를 때려?”

    전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감은 눈 위에 있던 불빛이 한층 연해진 게 느껴졌다.

    “형님들, 이만 갑시다.”

    민주혁의 손가락이 내 이마를 콕 찍는 느낌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라엔이 말을 이었다.

    “그냥 자게 내버려 둬요.”

    “이 정도로는 안 깹니다. 아마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조금 억울했으나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점 내게서 멀어졌다.

    “알아요. 그런데 방금은 잠깐 일어났다고요.”

    “그러면 그건 제가 아니라 형님이 깨우신 거잖습니까.”

    “그래요.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해 봐요.”

    “아이, 또 왜 그러십니까.”

    민주혁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텐트 입구의 천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들렸다.

    “형, 가 볼게.”

    “그래. 다녀와.”

    박율의 대답을 끝으로 적막이 들어찼다. 곧이어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한아. 일어났네.”

    “…계속 깨어 있었어요.”

    “피곤하면 오늘은 그냥 잘까?”

    “아니요.”

    조금 멍했던 정신을 바로 깨우고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자 박율이 내 어깨 위로 겉옷을 덮었다. 자연스럽게 내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손바닥을 이마에 댄 박율이 말을 이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안 힘들겠어?”

    “네. 괜찮아요.”

    내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박율이 나를 안아 들었다.

    “텔레포트로 이동할 거야.”

    센 바람이 몸을 감쌌다. 나와 박율은 제단의 계단 위로 올라와 있었다. 박율이 나를 땅에 내려 주고는 조그만 등불을 만들어서 내 손에 쥐여 줬다. 어두웠던 주변이 조금 밝아지자 그가 손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보여? 여기서 스무 걸음 올라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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