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제단
“미워해도 돼.”
망설임 없이 바로 들려오는 대답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박율이 표정 좀 풀라고 말하는 것처럼 손끝으로 내 미간을 살짝 눌렀다.
“왜 미워해도 돼요? 형은 내가 형한테 어떻게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래. 네가 어떻게 하든 형은 너를 미워할 수가 없을 테니까.”
“…왜요?”
박율이 그답지 않게 말을 꺼낼지 말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이한이가 언제쯤 그 이유를 알아줄까 모르겠네.”
박율이 마법으로 물에 젖은 시원한 천을 만들어 내서 내 눈가에 대 주고는 말을 이었다.
“미워해도 되고, 화내도 돼. 이한이는 하고 싶은 대로 해.”
“미웠던 적 없어요. 근데 또 치료도 못 하게 장갑을 씌워 놓거나 하면 좀 미울지도 몰라요.”
‘알았어.’ 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그가 내 눈가를 덮었던 천을 걷어 냈다. 바로 앞에서 나를 살피는 박율의 얼굴이 보였다.
“어디, 이제 다 울었나 볼까.”
“안 울었어요.”
“그래, 이제 괜찮네. 올라가 볼까.”
“네, 좋아요.”
기도실에서 나와서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다들 한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라엔이 내 눈에 대 준 쌍안경을 쥐고 나도 같은 장소를 바라봤다.
“보여요? 저쪽에 모래 폭풍이 몰려 있는 곳이요.”
“어두워서 잘은 안 보이지만 뭔가 있는 것 같긴 해요. 제단 같은 거요.”
“저 높이까지 있어. 봐 봐.”
옆에서 민주혁이 내 손 위로 자기 손을 겹쳐서 들어 올렸다. 거리가 있어서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높이가 꽤 된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박율이 내 어깨 위로 겉옷을 덮어 주며 자연스레 옆으로 와서 섰다.
“이한아, 춥지는 않아?”
“이제 괜찮아요. 고마워요.”
“그래, 다행이다. 다 보고 나서 형한테도 줄래?”
“뭐를요? 아, 이거요.”
박율이 쌍안경으로 눈짓했다. 이미 다 봤기에 바로 박율에게 건네는데, 박율은 쌍안경 몸체가 아니라 내 손목을 감싸 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어정쩡한 자세로 있자 그가 허리를 숙이며 내게 높이를 맞췄다. 이럴 거면 그냥 자기가 드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형, 안 불편해요? 잘 보여요?”
“형은 좋은데. 무거워?”
“아니요. 이거 고작 쌍안경인데요.”
내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옆에서 민주혁이 내 한쪽 뺨을 아프지 않게 잡아서 늘리며 끼어들었다.
“너한테는 무거울 수도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놀리는 거 아닌데?”
민주혁을 떼어 낼 손이 없었기에 가만히 쏘아보기만 하고 있을 때, 박율이 내 손에서 쌍안경을 빼내서 가져갔다.
“다 봤어요?”
“그래. 고마워.”
방금 민주혁에게 꼬집혔던 뺨이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이 분명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정말 안 무거웠어요.”
“알아. 네가 무거워할 만한 거였으면 들도록 시키지 않았을 거니까.”
“그걸 형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다 알고 있지. 그렇지, 이한아?”
내게로 곧게 맞춰 오는 그의 시선에 묘한 기분이 들어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이 내 뺨을 살짝 감싸며 끄덕거림을 멈추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거리가 꽤 되네. 저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형, 그러면 다른 곳보다 저쪽으로 먼저 가 보자.”
송하견이 지도를 앞에 띄워 놓고 동선을 신중하게 살폈다. 슬쩍 지도를 넘어다봤지만 모래 폭풍 속에 숨어 있는 제단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야.”
송하견이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지도 한 부분을 표시하고는 짚어 줬다.
“볼 때도 멀리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지도상으로 보니까 더 먼 것 같아요.”
“응. …그래서 돌아가지 않고 일직선으로 갈 거야.”
거기까지 말한 송하견이 공중에 떠 있던 지도를 없앴다.
“날이 밝으면 출발하자.”
허공에서 비가 흩어지는 소리가 고요하게 들렸다. 밤이 지나고 있었다.
◇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제단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날이 흘렀다. 내가 모래 폭풍이라고 생각했던 게 알고 보니 마물이 스며든 모래바람이었다. 그것들을 처리하느라고 시간이 더 늦어졌다.
「‘간헐적 각혈’ 페널티 적용 중입니다.」
“이한, 괜찮아요?”
이 구역에 있는 마지막 마물을 처리하자마자 라엔이 달려와 내 등을 쓸어 줬다. 예고조차 없이 적용된 페널티를 모두의 앞에서 적나라하게 보였다는 생각에 막막해져 살짝 인상을 썼다.
“지금 많이 안 좋아? 어디가?”
송하견의 물음에 고개를 작게 저으며 서둘러서 표정을 풀었다. 그러자 더 굳어 가는 듯한 모두의 얼굴에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피를 뱉는 와중에도 가만히 헛웃음을 흘렸다.
“너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맞아요. 제단에 올라가 보는 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마요.”
“아니… 커헉, 싫….”
한 문장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시간상으로 지금쯤 끝나갈 때가 되긴 했다. 마른 모래를 적셔 가는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민주혁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야, 뭐가 그렇게 급해. 저거 어디로 안 없어져.”
“갑자기 땅에서 솟은 건데, 다시 땅으로 꺼질지 어떻게 알아.”
“그렇긴 한데…. 그럴 가능성은 적어.”
피를 토하는 양이 점차 줄어 가서 소매로 입가를 닦아 냈다. 그날 박율과 나는 모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민주혁도 저 제단이 어떻게 솟아나게 된 건지 알고 있기에,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 채로 말을 맺었다.
“괜찮아? 물이랑 차 중에서 뭐라도 마셔 볼까?”
내가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자, 박율이 내 손에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의 물이 담긴 유리잔을 쥐여 줬다. 입 안을 한 번 헹궈 내고 물을 삼키자 목이 훨씬 편해진 듯했다.
“이제 멀쩡해요.”
“이한. 그럴 리가요.”
괜찮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라엔의 목소리를 넘기고 말을 이었다.
“아직 해 떨어지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저 위쪽까지 살펴보고 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래, 다녀오자.”
“형님, 정말 선이한도 데리고 갑니까?”
예상외로 빠르게 결정한 박율이 당장 가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 결정에 의문을 가진 민주혁과 라엔이 박율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송하견이 내게 조용히 물었다.
“업어 줄까?”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어서 반가웠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으므로 바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마법으로 띄워 주는 건?”
“음….”
송하견이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질문을 해 와서 고민됐다. 마법으로 띄워 준다는 건 저 계단을 직접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닐까. 송하견에게 부탁하기로 결심할 무렵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들겼다.
“바로 가고 싶었던 거 맞지?”
“네, 맞아요.”
내 대답을 들은 박율이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율이 형…?”
“지금 몸 상태로 걸어서 저 위까지 올라가는 건 안 돼.”
“알았어요. 그런데 율이 형은 안 힘들어요? 하견 형이 마법으로 띄워 준다고 했었는데.”
“…아니. 괜히 멀미할 수도 있겠다.”
송하견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 뒤 내 머리칼을 정돈해 줬다.
“형, 부탁할게.”
“그래, 하견아.”
박율에게 안겨 제단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높이가 꽤 되는데도 박율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힘든 내색조차 없었다. 그건 박율뿐만 아니라 다들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가 직접 걸어 올라갔더라면 절반도 못 가서 몇 번쯤 쉬어야 했을 것이다.
꼭대기까지 올라와 보니 가장 위쪽에는 평평하고 넓은 공간이 있었다. 어떠한 구조물도 없는 텅 빈 바닥이었다. 라엔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뭔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형님, 뭐 느껴지는 게 없으십니까?”
“지금으로서는 그래요.”
“숨겨져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럴 가능성이 크겠네요. 문제는 그걸 어떻게 찾느냐인데.”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박율이 나를 여전히 안은 채로 내게만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지럽거나 하지는 않아?”
설마 골짜기에 있을 때 내가 갑자기 높은 곳에 올라간 탓에 아팠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문득 걱정이 들었으나 이제 와서 오해를 바로잡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재빨리 생각을 지워 버렸다.
내가 괜찮다고 대답하며 박율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그는 내 얼굴색을 살피더니 그제야 나를 바닥으로 내려 줬다. 그리고 동시에 시스템 창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첫 번째 용사의 기억’을 열람하시겠습니까?」
파랗게 깜빡이는 창을 바라보다가 재빨리 마음속으로 수락했다.
「제단 상층에 ‘선이한’님 외 다른 인물이 있을 경우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곧바로 떠오른 상태 창의 담담한 문구를 보면서 이마라도 짚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몰래 해야 하는 거구나.
“리더 형, 뭔가 찾았나요?”
“음, 아니. 형은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는데.”
“여기서 며칠 더 머무르면서 조사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한다고 나오는 게 있을까?”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속으로 민주혁을 응원하고 있을 때 박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길게는 말고, 며칠만 머무르는 걸로 하자.”
“알았어요.”
며칠쯤 시간이 생긴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순식간에 몸이 번쩍 들렸다.
“하견 형.”
“응.”
송하견이 아까 올라올 때 나를 안아 들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망설임 하나 없이 나를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형, 내려갈 때는 내가 알아서 갈게요.”
“원래 내려가는 게 더 위험해.”
“그런가요…?”
“응.”
“그렇구나….”
길지 않은 설명에도 이제는 그러려니 수긍하게 돼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은 그동안 대답을 고민하기라도 한 건지 한참이 지난 후에 입을 열었다.
“경사가 져 있으니까.”
“아.”
그럴싸한 대답에 빠르게 동의했다. 송하견의 걸음이 느릿했기에 나와 송하견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제단 근처에 텐트를 쳐 둔 상태였다. 전과 같이 텐트는 하나뿐이었기에 이번에도 움직이기가 수월하지 않을 듯했다.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해 두고 있을 때, 박율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이한이는 형한테 할 얘기 있지 않아?”
“무슨 얘기요?”
“아까 위에서.”
박율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차분하게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바라보며 표정을 애써 침착하게 유지했다. 짚이는 것은 하나뿐이다. 그런데 박율이 그걸 알 리가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