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미워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리에 선 채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박율의 모습을 보고 애써 입을 열었다.
“어…. 안 자고 뭐 해요?”
“그건 형이 물어보고 싶은 건데.”
“형, 조금 오해가 있….”
차분하게 가라앉은 박율의 목소리에 재빨리 말을 덧붙이는 순간, 박율이 쓴 마법에 내 손안에 있던 칼이 소리도 없이 저쪽으로 날아갔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며 챙강, 하는 소리가 울렸다. 텅 빈 손을 가만히 쥐락펴락하며 멍하니 말을 이었다.
“…있어요.”
가까이 다가온 박율이 몸을 낮춰서 자리에 앉아 있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미소와는 달리 눈빛은 나를 샅샅이 뜯어보는 듯 형형했다.
내가 두려움에 굳어 있는 사이 박율이 내 왼쪽 소매를 마저 걷어 냈다. 말릴 새도 없이 드러난 내 살갗에 그의 올곧은 시선이 박혔다. 커다란 손이 내 팔뚝에 새겨진 선명한 흉터를 덧그리듯이 훑고 지나갔다.
“무슨 오해?”
“저, 신전에서 살았었잖아요.”
박율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짐작이 가긴 했다. 전에 라엔이 이러한 나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던 것처럼 박율도 지금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번에는 늦지 않게 제대로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신력을 빌려 오기 위해서는 다들 그렇게 해요.”
미래시 스킬을 한 단계 올리기 위한 일이었다. 어쨌든 시스템이 신의 힘인 것 같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뭘 하려고 했냐면요.”
“형도 알고 있는데.”
“네?”
저쪽 어딘가로 칼이 날아갔을 텐데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하는 한가로운 생각을 하며 저편으로 돌렸던 시선을 재빨리 바로 했다. 내가 박율을 보며 입을 달싹이고만 있자 그가 친절하게 말을 덧붙였다.
“지금 네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어.”
박율이 손끝으로 석판 위를 가볍게 두들겼다.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듯 조급함 하나 없이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다.
“…그러면 왜요? 뭔가 잘못됐나요?”
“글쎄. 잘못됐다기보다는….”
박율이 손을 멈추자 시계 초침처럼 일정하게 울리던 작은 소리가 일순 멈췄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형은 네가 이렇게 하는 게 싫어서. 이유가 뭐일 것 같아?”
“모르겠어요. 나는 괜찮아요, 형.”
“그러면 이한이 몫까지 형이 안 괜찮은가 보다.”
내가 박율의 손을 마주 잡자 그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나를 가볍게 일으켰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상처부터 내려고 하지 말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알았어요.”
“이한아.”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 박율이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대로 갔다가 다시 몰래 오겠다는 얼굴인데.”
“…빨리 확인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이게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야.”
“그렇다고 어려운 일인 것도 아니니까요. 언젠가는 해야 되는 거니까, 그냥 지금 신의 힘을 빌려서 확인해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봐 달라는 마음을 담아 박율의 눈치를 살짝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의 손목을 잡아 들어 올린 후, 그의 손에 내 손을 맞대며 와인 잔을 맞부딪치는 시늉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건 바로 하라면서요. 형이 그랬잖아요.”
박율이 생각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내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고개를 들어 올리게 했다.
“잘 기억하고 있었구나.”
“당연하죠. 안 잊어버렸어요.”
“그래, 잘했어. 형이 이런 방향을 바랐던 건 아니긴 하지만.”
“어… 그런가요?”
“뭐든 네 마음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건, 네가 너를 좀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이었어. 이렇게 너를 다 내던지는 게 아니라.”
박율이 이번에는 내 뒷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자기 품 안으로 나를 끌어당기듯이 안았다. 그에게 배어 있는 꽃향기가 내 몸을 연하게 감쌌다. 몸이 맞닿아 있는 탓에 그의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나에게까지 작은 울림이 전해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삼키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지금 그렇게 말한 거예요.”
“그래. 형이 그걸 알고 있어서 더 마음이 아프네.”
박율이 한 손으로 내 등을 다독였다. 내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내게서 몸을 떨어뜨리고는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괜찮아. 네가 너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 때까지, 형이 네 몫까지 그렇게 해 줄게.”
어디서부터 대화의 초점이 엇나가기 시작한 것인지 잠깐 고민하다가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은 일단 제쳐 두기로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장갑은 왜 끼워요?”
“혹시 몰라서.”
“그게 무슨 뜻인가요…?”
박율은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가 허공에 만들어 낸 장갑을 내 손에 끼워 주는 걸 가만히 바라봤다. 장갑이 남는 부분 하나 없이 손에 꼭 맞았다.
“형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뭐를요?”
“뭐든. 너무 깊게 발을 들이면 언젠가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박율은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음에도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그가 내 양손을 그러잡으며 잠깐 쥐었다가 펴자 찰나의 순간 장갑 위로 빛이 반짝였다.
“그런데 너를 내버려 둘 수가 없네, 이한아.”
“네?”
어떤 맥락으로 이어지는 말인지 아리송해서 멍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박율이 주제를 애매하게 바꾸며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는 그냥 형 마음대로 하려고.”
“어…. 그렇죠. 묻어 두고 넘어가면 그게 더 미련으로 남지 않을까요.”
“이한이 말이 맞아. 그럴 것 같아서.”
박율이 내 머리칼을 헝클이며 방금까지와는 달리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건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석판 위의 허공으로 손을 뻗은 박율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곧 붉은 핏방울이 쏟아져 내리며 석판을 적셔 갔다.
“율이 형!”
“괜찮아. 일단 뭔가 바뀌는 게 있는지 지켜보자.”
“왜…. 형이 왜 이렇게 해요?”
“형도 신의 힘을 받았으니까.”
선택받은 용사인 박율도 신의 힘을 받았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박율이 이렇게 하는 건 싫었다.
박율의 팔을 간절하게 붙들고 속으로 시스템을 불렀으나 당연하게도 치료하겠느냐고 묻는 시스템 창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피가 흘러내리는 박율의 손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장갑을 벗으려고 해도 손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가 없었다.
“형, 장갑이 안 벗겨져요.”
“그래. 그럴 거야.”
“일부러….”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구나. 황망한 기분으로 애꿎은 장갑만 벅벅 긁었다.
“벗겨 주세요.”
“어, 이한아. 이것 봐 봐.”
석판 주위를 연한 빛이 감싸더니 핏자국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동시에 콰과광, 하면서 커다란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바깥에서 울렸다.
“조심해야지.”
“아….”
내가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에 놀라 비틀거리자 박율은 피가 떨어지는 손이 아닌 반대쪽 팔로 나를 지탱했다.
“이한이 말처럼 확인해 보기를 잘했네. 밖에 나가 보자.”
“형, 장갑… 벗겨 주세요.”
내가 아까 바닥에 내려놓았던 붕대를 집어 드는 박율의 옷을 붙들었다.
“이러지 말아요. 내가 형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지 마요.”
“이한아, 왜 울어.”
나는 조금 울컥했을 뿐이지 울지 않았다. 박율의 다음 말을 듣기도 전에 기도실 문이 세차게 열렸다.
“리더 형!”
“라엔아. 밖에 소리 듣고 왔구나.”
박율은 내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을 보이게 하지 않으려는 듯 나를 끌어당겨서 내 얼굴을 자기 품에 묻었다. 달래듯이 내 머리칼을 헝클이는 손길과는 달리 마법은 풀어 주지 않을 생각인 건지 여전히 장갑을 벗을 수가 없었다.
다시금 뭐라도 말하기 위해 얼굴을 들려는데 박율이 단단하게 안고 있는 탓에 몸을 떼어 내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박율과 라엔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여기에서 마나와 비슷한 힘의 흐름이 느껴졌어요. 그러더니 밖에서 굉음이 들려서 이쪽으로 온 건데, 무슨 일이에요? 이한은 왜 그래요?”
“나중에 설명할게. 여기 정리하고 곧 이한이 데리고 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서 상황 파악하고 있어. 하견이랑 주혁이한테도 그렇게 전해 주고.”
“알았어요. 이 건물 꼭대기 층에 가 있을게요.”
라엔은 정말 모른 것인지, 혹은 모른 척해 준 것인지 별말 없이 자리를 떴다. 둘만 남은 공간 속에서 박율이 그제야 나를 놓아주며 내 얼굴을 살폈다.
“이제 좀 진정됐어?”
“……. 뭐가요.”
“별일 아니었는데 왜 아직도 울상일까.”
“어떻게 그게 별일 아니에요.”
“어려운 일인 것도 아닌데.”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거예요?”
“이한이한테 별일 아닌 거면 형한테도 별일 아닌 거니까.”
박율이 상처 낸 손을 가볍게 털어 내자 핏방울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가 마법을 썼다. 붕대가 허공에서 훌훌 풀리더니 상처에 저절로 감기고 있었다. 내가 붕대를 잡아채자 팔랑이던 붕대가 한순간에 멈췄다.
“그게 왜 같아요? 나는 아프지 않은데 형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이한아, 너는 형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그러니까 이러지 말아요.”
박율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멈추게 하고는 상처를 내지 않은 쪽 손으로 내 눈가를 조심스레 쓸었다.
“형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형이랑 약속 하나만 하자. 앞으로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에게 상처 내지 말기로.”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일까. 착잡한 표정으로 박율을 바라봤다. 박율의 얼굴이 꽤나 단호해 보여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마음대로 한다던 말은 진심인 듯했다.
“그래. 고마워.”
박율의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아까까지만 해도 꿈쩍 않던 장갑이 저절로 내 손에서 벗겨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박율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의 살갗에 손을 댔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박율의 손바닥에 깊이 나 있던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다. 이렇게 금방 해결될 일이었는데.
나를 보면서 눈웃음을 짓는 박율을 바라봤다. 그가 이제라도 장갑을 벗겨 준 게 고마워서인지, 아니면 장갑을 씌워 놓았던 게 괘씸해서인지, 이번엔 정말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형이 미워?”
“네, 미워요.”
가벼운 목소리로 묻는 박율에게 나도 모르게 본심이 아닌 뾰족한 대답이 튀어나와서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