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85화 (85/150)

085화.

붕대

송하견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한테만?”

“네. 형한테만요.”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송하견이 자기 옷자락을 쥔 내 손을 흘끔 보더니 내가 이끄는 대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뗐다.

“이한아.”

“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박율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내게로 향한 시선이 순간 내 생각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날카로워졌으나, 그는 순식간에 그런 분위기를 지우고는 평소처럼 웃으며 입을 열었다.

“2층으로 올라와. 거기에 있을게.”

“복도 첫 번째 방 말하는 거죠? 알았어요.”

걸음을 옮기는 박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잡고 있던 송하견의 옷자락을 놓았다. 다들 어느 정도 멀어졌으니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무슨 얘기?”

“뭐냐면… 아, 맞다. 미안해요, 형. 아팠죠.”

다시 송하견에게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피로 물든 그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그의 손을 붙들고 치료했다. 아무리 다른 데 정신이 팔렸다지만 이렇게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니.

내 시선이 계속 한곳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송하견이 와이셔츠에 묻은 핏자국을 클린 마법으로 지웠다.

“…고마워. 그래서?”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형, 지금도 붕대 가지고 있어요?”

“…그건 왜?”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말을 이으며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를 정해 둔 것이 아닌데도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방향이 별관 쪽이라는 걸 인식하고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습관이 무섭다 이거지.

“누구한테?”

“딱히 누군가한테 필요한 건 아니에요.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그러니까 왜?”

“나는 소환 마법 같은 걸 못 쓰니까요. 레데오에서 형이랑 방을 같이 썼을 때 책상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요. 기억나서 형한테 물어봤어요.”

전에 라엔이 말한 적이 있다. 송하견이 가지고 있는 붕대가 피 냄새를 막아 준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 붕대를 감았을 때 알아채지 못했었다고.

내 상처를 알고도 모른 척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알지 못했다며, 라엔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어쨌거나 상처를 낸 후에 완벽하게 숨기려면 그 붕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네가, 굳이 지금, 붕대를 가지고 있겠다고.”

“‘굳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기억났을 때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잖아요.”

송하견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차갑게 변한 듯해서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그렇게까지 무리한 부탁을 한 건 아니었으니, 그의 변화는 내 기분 탓일 가능성이 컸다.

“형, 여기가 별관이에요. 딱히 여기로 오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온 김에 잠깐 들어와 볼래요? 나는 별관에서 며칠 지내기로 했어요. 여기가 익숙해서요.”

“…….”

들려오지 않는 대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방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책상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손끝에 먼지 한 톨 묻어나지 않는 걸 보니 박율이 아까 여기서 나설 때 클린 마법을 써 주고 간 듯했다.

그때 뒤에서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등불 같은 건 켜져 있지 않았기에 한순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내가 등을 돌리기도 전에 송하견이 내 어깨를 쥐고 몸을 틀어서 자기를 마주 보게 했다.

“하견 형?”

코앞에서 내게 시선을 맞추는 그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리 집요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목울대를 움직였다. 손을 뻗어서 책상 옆쪽을 더듬어 보았으나 당연하게도 스탠드는 그곳에 없었다. 여기는 내가 원래 쓰던 신전의 방이 아니었으니까.

“선이한.”

나를 부르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잣말을 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가 방 안에서 작게 울렸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그제야 손끝에 스탠드가 만져졌다. 곧바로 스위치를 켰다. 스탠드는 오래된 듯 몇 번 깜빡거리더니 불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뭐 해요? 왜 옷을….”

송하견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옷감이 사락거리며 스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보여?”

“…뭐가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굴렸다. 송하견이 내 손목을 쥐더니 자기 어깨 쪽으로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살갗의 온기가 생경해 손을 빼내려고 뒤틀었으나 송하견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여기 있던 상처. 다 나은 거, 보여?”

“아.”

“네가 붕대가 필요할 일이 어디 있어?”

“어… 그러게요.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음, 그래도….”

“너한테밖에 없겠지.”

“잠깐, 그건 아니에요.”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내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송하견과 곧바로 시선이 맞았다. 다급하게 변명할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송하견이 피 냄새가 나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말해. 어디 다친 건지.”

“없어요. 형도 알잖아요.”

“몰라.”

송하견이 강조하듯이 말을 덧붙였다.

“네가 말 안 하면 몰라.”

“안 다쳤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너는 항상 제대로 말을 안 하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은 서로가 각자의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를 밀어붙이듯이 거리를 좁혀 오는 송하견에게서 조금씩 뒷걸음질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믿어 줄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마.”

“네?”

더 물러날 곳이 없어 뒤에 있던 침대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송하견이 자연스럽게 내 옷을 쥐더니 벗겨 내려는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잠깐만요, 하고 급하게 입을 열었으나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혹은 한 귀로 흘리고 있거나.

내 상의를 조심히 걷어 내리는 송하견을 가는눈으로 쏘아봤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자기가 알아서 확인하겠다는 뜻이었구나.

“이럴 필요 없어요.”

“…응.”

“어차피 형 마음대로 할 거면.”

‘그냥 대답을 하지 마요.’라는 뒷말은 삼켰다. 송하견이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와중에 내가 정말로 다친 것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혹여나 내가 아플까 봐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손길이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무리 조심스러운 손길이라도 내가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송하견은 다 드러난 내 복부와 허리께를 신중한 눈으로 샅샅이 살폈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잡고 몸을 틀어서 등까지 들여다봤다. 어쩐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눈가까지 빨갛게 익은 듯 화끈거렸다.

“여기에는 상처가 없… 울어?”

“…….”

우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런 거다. 그렇지만 별로 정정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입을 꾹 다물고 송하견을 올려다봤다.

“선이한.”

송하견이 반쯤 벗겨 냈던 내 옷을 다시 입히며 제대로 정돈해 주고는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그러고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내 뺨을 눈물을 닦아 내듯이 찬찬히 쓸었다.

평소에 표정 변화가 없었던 송하견의 얼굴에 미안하다는 빛이 떠올랐다. 딱히 우는 건 아니라고 정정해 줄까 하는 사이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다리까지 확인하고 제대로 사과할게.”

“형….”

허리를 푹 숙이며 얼굴에 손을 묻었다. 애초에 내가 다짜고짜 붕대를 찾은 것이 문제였다. 부탁하면 들어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송하견이 나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기에, 이 상황이 민망하긴 했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괜찮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전혀 믿지도, 듣지도 않는 건 좀 답답했다. 유치하지만, 어쩌면 나는 지금 삐진 걸지도 몰랐다.

송하견은 나를 달래듯이 내 머리 위로 손을 잠깐 얹었다. 그렇다고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은 송하견이 내 옷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발목부터 맨살이 드러나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 그렇게 말했으면 됐을 텐데.’

이제야 변명할 말이 떠올라서 숨을 하, 하고 내뱉었다.

“발목을.”

내 무릎까지 옷을 걷어 내던 송하견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발목을, 살짝 삔 것 같아서. 그래서 붕대로 감아 두려고 했어요.”

“나 봐.”

송하견이 내 진위를 가늠하려는 듯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디?”

“붕대 주면 내가 할게요.”

“감는 방법은 알고?”

“음….”

송하견이 내 왼쪽 발목을 손에 쥔 채 조심히 움직였다.

“부었네.”

“어, 아닐 텐데. …아니, 부은 정도는 아닌 줄 알았어요.”

분명히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내가 정말 발목을 삔 건지, 아니면 평소보다 오래 걸었다고 그새 부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고통이 없으니 어느 쪽이든 딱히 상관없긴 했다.

송하견이 내 발목 위로 얼음주머니를 가져다 댔다.

“왜 처음부터 말 안 했어.”

“별거 아닌데 괜히 걱정할까 봐요. 그리고 형이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어요.”

“……미안.”

송하견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작은 죄책감과, 붕대 하나 얻으려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는 착잡함을 애써 내리눌렀다. 송하견은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말을 더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얼음찜질을 어느 정도 한 후에 송하견이 붕대를 풀어서 내 발목에 감아 줬다. 감는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서 붕대 끝을 잘 고정한 그가 앉은 자세 그대로 나를 올려다봤다.

“심한 건 아니어서 금방 가라앉을 거야. 그래도 더 아파지면 말해.”

“네, 고마워요.”

“화났어?”

“아니요.”

“…네가 하고 싶으면 네가 해. 내가 언제든 해 줄 수 있으니까 부탁해도 되고.”

잠깐 고민하던 송하견이 내 손에 새 붕대 하나를 쥐여 줬다. 그게 꼭 서툴게 사과하는 것 같아서, 진심 반 과장 반으로 조금 삐쭉거리던 것도 잊고 나도 모르게 웃었다.

“화난 거 아닌데. 안 믿을 거면서 왜 물어보는 거예요.”

“…몰라.”

자기도 모르는 걸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고마워요. 그래도 다음에는 내 말도 들어 줘요, 형.”

“그래.”

송하견의 대답이 진심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손에 들린 붕대를 품 안에 넣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들키지 않고 몰래 행동하기 적합한 시간대를 며칠에 걸쳐서 확인했다. 공기마저 고요히 가라앉은 밤, 방에서 나와 발걸음을 뗐다. 순조롭게 기도실 안으로 들어가서 지난번에 봐 뒀던 석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품에서 붕대를 꺼내 바로 옆에 내려 둔 후 숨겨 뒀던 조그만 칼을 꺼내 손에 쥐었다. 언젠가 필요하게 될 줄 알았다.

‘머리카락을 기를 걸 그랬나.’

제물로 머리카락을 바치는 것도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짧은 머리카락을 자르면 티가 많이 날 게 분명했다. 괜히 의심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다가 놓았다.

그래도 가장 확실한 방법은 피를 제물로 바치는 것일 테니까.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큰 쪽이 나았다. 빨리 확인해 보자 싶어서 왼쪽 소매를 걷어 내고 망설임 없이 칼끝을 가져다 댔다.

여기서 흉 하나 더 늘더라도 티가 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탁, 하고 발 딛는 소리와 함께 문 앞에 그림자가 졌다.

“이한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일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