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84화 (84/150)

084화.

옛 신전

라엔이 자고 있는데 여기서 계속 떠드는 것보다는 나을 듯싶었다. 아무리 속삭이며 말하더라도 잠귀가 밝으면 깰 수도 있으니까.

“그래. 다른 형들은?”

“지금은 주변을 돌아보고 있어. 네가 깨기 조금 전에 나랑 라엔 형이랑 교대했거든.”

텐트 입구의 천을 걷어 내자 찬 바람이 몸을 감쌌다. 그리고 비릿한 물 냄새가 공기 중에 옅게 퍼져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민주혁이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서 위쪽 봐.”

“왜? …어, 뭐야.”

얼핏 들리던 빗소리는 내 착각이 아니었던 듯하다.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에 머리 위로 손을 가져다 댔으나 내게 빗방울이 닿는 일은 없었다. 빗물이 허공의 어느 지점 즈음에서 증발하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손바닥을 편 채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내 옆에서 민주혁이 손뼉을 치듯 내 손에 자기 손을 짝, 소리가 나게 겹쳐 올렸다.

“날이 어두워지면 이렇게 비가 내려. 그래서 밤에 기온이 확 떨어지기도 하고.”

“빗방울이 그냥 사라지는 거야?”

“어. 저기 어디쯤에서.”

손을 높이 뻗어 보았으나 빗방울이 사라지는 지점이 그보다는 더 위쪽에 있는 듯했다.

“높이 올라가면 비를 맞을 수도 있어?”

“그렇겠지. 왜, 비 맞아 보고 싶어?”

“아니,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아.”

“그러면 다행이고.”

이번에도 내게 장난치는 듯한 목소리에 나도 민주혁처럼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가. 내가 쓸데없는 짓 안 해서?”

“아니. 너랑 같이 비 맞아 줘야 하나 했거든.”

허공에서 흩어지는 빗소리와 발아래로 건조한 모래가 사박거리며 밟히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것이 어쩐지 누군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 같아서 마음이 간질거리는 듯했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아.”

“야, 민주혁.”

계속 말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민주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만약에 내가 비를 맞고 싶다고 했더라도, 너까지 같이 그럴 필요가 있어?”

“내 마음인데.”

그게 뭐야, 하고 말하려는데 이런 상황에 들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시스템의 알림음이 커다랗게 울렸다.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 실패!Ⅴ

페널티 ‘간헐적 각혈’이 지속 시간 ‘2개월’ 동안 유지됩니다.

순간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딸꾹, 하고 숨이 급하게 들이켜져서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

수락/거절

‘수락할 거야.’

이것과 비슷한 라엔 퀘스트도 수락했었고, 그때도 별일 없었으니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

성공 시:

실패 시:

제한 시간:

점멸하던 퀘스트 창이 눈앞에서 저절로 사라졌다. 동시에 민주혁이 내게 말을 건넸다.

“놀랐어?”

“뭐… 히끅, 아니.”

“그러면 공기가 너무 찬가.”

고개를 저었으나 민주혁은 내 얼굴을 살피더니 내 겉옷 위로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둘러 줬다.

“돌아가자. 원래 비 오는 거 보여 주려고 했던 거였고, 시간도 꽤 지났으니까.”

가는 길에 민주혁이 답지 않게 조용했기에 내가 딸꾹질하는 소리만 간간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양쪽 어깨 위로 턱 얹어지는 거센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자리에서 굳은 채로 민주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해.”

“안 놀라네.”

“놀랐어.”

“그렇네. 딸꾹질 멈췄다.”

민주혁이 내 손목을 잡아끌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고마워. 고마운데, 굳이 그런 방법으로 멈추게 해야 했어…?”

“이렇게 하는 게 빠르잖아. 아니야?”

내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민주혁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는 듯했지만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운 기분이어서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도착했는지 가까운 곳에 텐트가 보였다. 민주혁에게 뭔가를 물어보려면 단둘이 있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뒤늦게 상기했다.

“아까 텐트에서, 내가 일어나기 전에 혼자서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딱히 생각한 건 없는데. 그냥 앞으로 어떻게 할지 보고 있었어. 왜?”

“그냥 궁금해서.”

“음…. 진짜 그게 다인데. 지도라도 보여 줄까?”

내가 정말로 묻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으므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후회되는 건 없어?”

“뭐야, 나한테 궁금한 게 많네.”

가볍게 웃던 민주혁이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항상 그렇긴 하지.”

“…왜?”

“지나간 일은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잖아.”

“그래서 모든 것들이 후회돼?”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그렇지.”

민주혁이 내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서 흉터가 있을 부분을 천천히 쓸었다.

“이것도 그렇고.”

역시 아직도 그러고 있었구나 싶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민주혁의 손을 꾹 눌러서 내 어깨에 밀착시키자 그가 당황한 듯이 손을 빼내려고 했다.

“왜… 너 뭐 해.”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왜 네가 그걸 후회하고 있어?”

가만히 멈춘 채로 한참을 생각하던 민주혁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너는 왜 괜찮을까.”

“지금 내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민주혁이 텐트 입구의 천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쉿, 하고 조용히 하라는 듯한 동작을 하는 민주혁에 나도 입을 다물었다.

민주혁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얘기를 꺼낸 건지 알고 있는 걸까. 내가 말하지 않은 마음을 민주혁이 알 리가 없었으나, 그래도 조금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지내는 거처 주변의 마물을 정리하는 데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근방에는 균열이 몇 없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네.”

“서둘러야 하나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빠르게 처리하는 것보다는 조금 늦더라도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맞습니다. 마음이 급하면 될 일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박율이 내게 고글을 씌워 준 후, 쓸어 넘겼던 앞머리를 정리해 줬다.

“이제 옛 신전으로 가 볼 거야.”

“거리가 멀지 않으니까 걸어서 이동할 거예요. 힘들면 꼭 얘기해요.”

“아까 지도를 보니까 정말 가깝던데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박율의 옆에서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로 모래가 밟혀 사륵거리며 흩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이한아, 신전을 왜 옮긴 건지 알아?”

“아니요. 사실 나도 옛 신전이 있다는 걸 몰랐었어요. 신전에서 책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됐는데, 그 책에도 자세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 잊히는 거야 한순간이니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궁금하지는 않아?”

“처음에는 궁금하긴 했는데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까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어요.”

내 대답을 들은 박율이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는 것처럼 잠깐 놀란 듯하다가 금방 눈을 접어 웃었다.

“왜요? 더 고민해 봤어야 했나요?”

“아니. 걱정했는데 이미 잘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이미 잊힌 거면 사소한 일일 테니까,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힘들잖아.”

“…다 왔어.”

내가 박율에게 뭔가를 더 묻기 전에 송하견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신전 입구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래바람에 풍화된 듯 군데군데 깨져 보였지만 내 예상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였다.

“이 근처에도 균열이 있나요?”

“바로 주변에는 없을 거야. 여기를 거처로 삼고 움직이면 될 것 같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근방을 둘러보고 올게요. 리더 형은 이한과 여기 있어 주세요.”

“…다녀올게.”

손을 가볍게 흔들고 걸음을 돌리는 민주혁을 마지막으로 이곳에 박율과 둘이 남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내부를 돌아보니 내가 있던 신전과 구조가 비슷했다. 곧장 걸음을 옮기는 내 옆으로 박율이 발걸음을 맞춰 왔다.

“익숙해 보이네.”

“네, 내가 있던 신전과 구조가 비슷해서요. 하긴, 같은 신전이니까 당연한 것 같기도 해요.”

“지금은 어디로 가 보려고?”

“기도실이요. 거기도 멀쩡할까 해서요.”

“형 생각에는 제대로 있을 것 같아. 여기를 보니까.”

“내 생각에도 그래요.”

중앙 건물로 들어가서 1층에 있는 기도실의 묵직한 문을 여는데, 덜커덕 소리를 내며 열리던 문이 중간에 덜컥 멈췄다. 다행히 잠깐 어긋났던 것뿐인지, 박율이 나 대신 손잡이를 잡고 가볍게 끌어당기자마자 문이 제대로 열렸다.

안에는 먼지 쌓인 채로 텅 빈 홀과 두 단 정도 높은 단상이 있었다.

“여기 구조는 완전히 같구나.”

“형, 신전 기도실에 가 본 적 있어요?”

“용사로 선택받고 나서 신전에 갔을 때 기도실에 들어갔었거든.”

단상의 한쪽 끝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파여 있는 석판이 놓여 있었다. 그 앞에 앉아서 가까이 살펴봤으나 해석할 수는 없었다. 글자가 너무 작기도 했고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암호문을 나열해 놓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원래 이런 것도 있었나요?”

“그건 잘 모르겠네. 형은 자세한 건 못 봤거든.”

“나는 신전에서 이런 건 본 적 없어요. 형은 여기 있는 글자를 해석할 수 있나요?”

내 바로 옆으로 다가온 박율이 허리를 숙여서 석판 앞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먼지와 모래 냄새로 가득했던 주변에 순간 꽃향기가 스쳤다. 진지한 표정을 지은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형도 안 보이네. 파인 부분이 너무 오래돼서 부식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파여 있는 글자를 손끝으로 쓸었다. 옛 신전, 기도실의 단상, 그리고 거기에 놓인 처음 보는 석판. 신전에 있는 물건이라면 해가 될 만한 것은 아닐 듯싶지만 미심쩍긴 했다. 이건 나중에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것에 대해 알아볼 방법 중에서 내가 해 볼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긴 했다. 전에 미래시 수련을 했을 때처럼 제물을 바치면 되겠지. 들키지 않도록 기회를 봐야 하긴 하겠지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기도실에서 나와서 신전 내부를 둘러보다가 별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 여기 있는 동안에는 아까 2층에 있었던 방에서 지낼 거라고 했잖아요.”

“맞아. 그랬지.”

“혹시 내가 얘기했었나요? 신전에 있을 때 별관에서 지냈다는 거요.”

“응, 알고 있었어. 왜?”

“그러면 나는 며칠만 혼자 별관에서 지낼게요.”

내가 한밤중에 빠져나와도 아무도 눈치채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으나 그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익숙한 곳에서 있어 보고 싶어서요.”

“이한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다가 같이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으면 그래도 되니까.”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관 밖으로 나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라엔과 송하견과 민주혁이 돌아왔다. 송하견의 어깨와 가까운 팔뚝 쪽의 와이셔츠가 붉게 물들어 있어서 다급하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견 형, 괜찮아요?”

“…응. 잠깐 방심해서. 큰 상처는 아니야.”

피가 번진 면적을 보니 그런 것 같기는 했다. 라엔과 민주혁이 박율과 뭔가를 얘기하느라 시선이 멀어진 사이 송하견의 옷자락을 쥐고 빠르게 속삭였다.

“형, 그러면 잠깐만 와 줄래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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