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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83화 (83/150)

083화.

포기할 리가

“…그래.”

잠깐의 공백을 둔 후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내 질문에 긍정하는 건지 부정하는 건지 명확하게 알 수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으니 굳이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내가 민주혁을 봐주고 있다는 걸 이제 송하견도 똑똑히 알게 되었을 테니까.

“이한, 걷는 거 안 불편해요?”

생각 사이로 들려오는 라엔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라엔이 내 옆에서 걸음을 옮기며 내 발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왜요?”

“모래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아.”

신발에 모래가 들어갈 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라엔의 말을 듣고 보니 발아래로 까끌까끌한 모래가 느껴지는 듯했다. 인식하고 나니까 또렷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썩 좋지는 않구나 생각할 때 라엔이 웃음기 스민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처로 들어가면 모래가 안 들어가도록 마법을 걸어 줄게요.”

라엔이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 행동에 어느 것 하나 어색한 부분이 없었다. 라엔이 나를 안는 것에 익숙해진 것인지, 혹은 내가 안기는 것이 익숙해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지 살짝 고민했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먼저 간 박율이 만들어 둔 거처의 위치를 살폈다. 커다란 텐트가 멀지 않은 곳에 보였다.

“그냥 걸어갈게요, 형. 가까우니까요.”

“가까우니까, 잠깐 이렇게 있어요.”

반박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하기도 했고 그다지 싫은 것도 아니었기에 가만히 라엔의 품에 기댔다.

앞서 걸어간 송하견과 민주혁은 이미 텐트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안겨 있는 내 무게도 있을 테니 라엔의 걸음이 느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발에 모래가 안 들어가게 하는 사소한 것도 마법으로 가능한 건가요?”

“마법이라는 건 응용의 학문이니까요. 기본이 되는 마법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면 돼요.”

학자다운 말에 속으로 조용히 감탄하고 있을 때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건 아니에요.”

“마법으로 하기 어려운 것도 있나요?”

내가 지금껏 봐 왔던 마법이라는 건 거의 만능에 가까웠는데. 가능하지 않을 만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네. 내가 가장 갈망하고 있는 건 마법 같은 걸로는 이룰 수 없으니까요.”

불어오는 바람이 라엔의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붉은 머리칼을 좇아 시선을 올리다가 라엔과 눈이 마주쳤다. 라엔은 걸어가는 목적지가 아닌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건가요?”

“불가능해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형 말에 따르면 마법은 계속 발전하는 거잖아요.”

“그걸 마법으로 이루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요.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하지 않을 거예요.”

언젠가 박율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과정이기에 마법을 쓰지 않고 직접 뭔가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고. 라엔이 말하는 것과는 조금 결이 다른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같은 맥락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요? 포기하나요?”

“아니요. 포기할 리가.”

어느새 텐트 앞에 도착한 라엔이 입구의 천을 걷어 내고 안으로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계속 노력할 거예요. 노력하고 있고요.”

현재 진행형의 말이었다.

“형은 지금도 노력하고 있나요?”

“어떤 것 같아요?”

‘그걸 왜 나에게 묻나요?’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에게 확신하기 어려울 때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올바른지 타인에게서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이럴 때 어떤 말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그런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형이 항상 노력하고 있는 걸 내가 봐 왔으니까요.”

“…….”

“믿어요, 라엔 형.”

한참을 말을 고르며 입을 달싹이던 라엔이 마침내 환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래요. 더 힘내야겠네요.”

나를 텐트 안에 있는 침대 위에 앉힌 라엔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러고는 내 발목을 쥐고 조심히 들어 올려서 신발 위로 마법을 걸었다.

“이제 모래 위를 다닐 때도 괜찮을 거예요.”

“고마워요.”

스카프와 고글을 벗어서 무릎 위에 올려 두고 텐트 안을 둘러봤다. 밤이 내린 숲에 있을 때와 내부 구조가 비슷했다. 다른 점은 그때보다 조금 더 넓었고, 한쪽에 조그만 원형 나무 테이블이 있었다는 점이다.

내 옆에 풀썩 앉은 박율이 미지근한 차가 담긴 유리잔을 손에 쥐여 줬다.

“목은 안 아파? 더 마시고 싶으면 말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박율이 앞에 커다란 지도를 띄웠다. 그의 손끝을 따라서 지도 위로 까만 선이 그어지며 동선이 표시됐다.

“여기에 거처를 두고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는, 중심이 될 곳을 여러 군데 정하고 옮겨 다니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바람도 거센 듯하고, 동선을 봤을 때도 그게 제일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쪽 구역에서는 이 부근이 중심점이 될 수 있겠네요.”

“그래, 여기가 좋겠다.”

“…동선도 가까운 쪽 먼저.”

지도 위에 조그만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박율이 아까 그어 놓았던 까만 선을 끌어와서 다른 동선으로 바꾸었다.

이어지는 얘기를 들으며 지도를 보다가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 건물 모양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는 어디예요?”

“옛 신전이라고 하던데요. 이한은 알고 있나요?”

“아, 그게 여기에 있던 거였나 봐요.”

신전에서 읽었던 책에 짤막하게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말이야 옛 신전이지, 버려진 신전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맞다. 이제는 신전 터를 옮기게 된 이유조차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버려지고 나서 시간이 오래 지났을 텐데 건물이 아직 남아 있나요?”

“응. …멀쩡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면 확인해 볼 수 있을 거야.”

박율이 텐트의 한쪽 측면으로 손을 뻗어서 허공에 대고 네모나게 그었다. 그러자 그곳이 투명한 막으로 변하며 바깥이 보였다. 해가 떨어져 가고 있는 황량한 사막의 모래바람이 텐트를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주변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면 옛 신전에 가 보자.”

“형들은 거기에 가 본 적이 있나요?”

“아니. 처음이야.”

그렇다면 박율의 말처럼 일단 가 봐야 상태를 알 수 있겠지만, 다른 곳은 몰라도 기도실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새벽, 순식간에 떨어진 기온을 체감하며 잠에서 깼다. 연한 불빛이 텐트 안을 메우고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야, 왜 지금 일어났어.”

멍한 정신에 멀리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민주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나도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하며 박율이 침대 머리맡에 놓아 준 겉옷에 팔을 끼워 넣었다. 해가 떨어지면 추워질 거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민주혁은 나무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에 떠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뾰족한 흰색 물체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다. 맞은편의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안 자고 뭐 해?”

“나야 자고 일어났지. 선이한, 추워?”

“아니.”

사방이 조용했기에 작은 속삭임도 선명하게 들렸다. 민주혁이 내 대답을 듣고는 내가 아까 챙겨 입은 겉옷을 흘끗 보더니 숨죽여 웃었다. 그 소리가 똑똑하게 귀에 들어왔다.

“이제는 안 춥다는 말이었어. 옷 입었으니까.”

“알아. 잘했다고.”

그것 때문에 웃은 게 아닌 것 같은데. 민주혁을 가만히 바라보자 그는 별말 않고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손을 달라는 듯한 동작이어서 그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렸다.

“옷이 크네.”

그러면 그렇지. 또 이걸로 놀릴 생각이었구나.

“율이 형이 크게 만들어 준 거야.”

“누가 뭐래?”

“아, 내가 작다는 말인 줄 알고.”

“그것도 맞긴 하지.”

“…손 놔.”

살짝 째려보면서 손을 털어 내려고 하자 민주혁이 뭘 또 그렇게까지 하냐는 얼굴로 얄밉게 웃고는 내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놓으라고 했어.”

“이제는 나한테 완전 막 하네….”

“내가 언제.”

“지금.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고 황당한 눈으로 민주혁을 바라봤다.

“편해졌다는 거니까. 너는 네가 처음이랑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는구나.”

“같이 오래 지냈으니까…. 그리고 사람은 원래 변해. 한결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는 내게서 달라진 부분을 찾을 수 없는데, 민주혁이 내가 처음과 많이 달라졌다고 하니까 조금 긴장됐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일어난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일지 부정적인 방향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니까.

“어, 그래서 좋다고.”

“다행이다.”

“…뭐가?”

“나쁜 쪽으로 달라진 건 아니라는 말이잖아.”

민주혁은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잠깐 뜸을 들이더니 표정을 금세 풀고는 가볍게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헐렁해서 손을 다 덮고도 조금 남던 겉옷 소매를 민주혁이 한 번 접어 올렸다. 그러고는 한 번을 더 접어 올리려는 듯하다가 나를 흘끔 보더니 그만뒀다. 그가 소매를 만지며 마법을 걸었는지 옷에 따뜻한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럴 거라고 말을 하지.”

민주혁이 내가 아까 놓으라고 한 말을 그대로 하겠다는 듯 내게서 곧바로 손을 떼자 민망한 마음에 괜히 민주혁이 접어 놓은 옷을 만지작거렸다.

“따뜻해?”

“응, 고마워.”

“내 손이 더 따뜻하지 않았어?”

내게로 다시 뻗은 큼직한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서 민주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맞아. 너는 열이 많은 체질인 것 같더라.”

“…그게 끝이야?”

목소리가 영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들렸으나 내 대답은 끝난 게 맞았다.

“민주혁, 그런데 아까부터 왜 속삭여?”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도 장단을 맞추는 중이었다. 민주혁은 그게 이제야 궁금해졌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민주혁이 내가 일어났던 침대가 아닌 다른 침대를 가리켰다. 그 위로 이불을 정갈하게 덮고 누워 있는 인영이 보였다. 그리고 빛이나 소리를 차단하려는 것처럼 얼굴을 덮은 로브도.

“얼굴에 덮고 있는 거 로브 맞지? 라엔 형이야?”

“바로 알았네.”

“형 원래 저렇게 하고 자?”

라엔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숨은 쉴 수 있나, 하는 걱정에 눈이 잘게 찌푸려졌다.

“어. 그게 편하신가 봐.”

“편할 리가.”

“습관처럼 굳어진 거라면 몸에 익었을 테니까.”

“음,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깨를 으쓱한 민주혁이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내 손을 잡고 일으켰다.

“선이한, 더 안 잘 거면 나랑 잠깐 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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