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비 오는 사막
민망함에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박율이 흉터 부근을 가린 내 손을 떼어 내며 그 위를 덧그리듯 쓸었다. 손길을 따라 물에 젖은 옷감이 살갗에 진득하게 달라붙으면서 차가운 느낌이 들어 몸을 잠깐 떨었다.
“다친 데는 없어?”
“네, 괜찮….”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에취, 하며 터져 나오는 재채기에 급하게 입을 가렸다. 추운 건 아니었지만 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는 몸에 침음하며 다시 ‘괜찮아요’ 하고 말을 제대로 마쳤다. 박율이 내 등을 가볍게 다독이며 마법으로 옷을 말려 줬다.
라엔은 저만치에서 귓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는 옷이 말라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내 허리께에 흔들리는 시선을 둔 채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냥….”
내게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민하는 사이 라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한이 갑자기 나무 위에서 떨어졌어요. 그리고 저기, 보여요?”
라엔의 쭉 뻗은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하늘에서부터 길게 뻗어 내려왔던 구름 기둥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뿌연 안개 하나 없이 맑게 갠 주변과 이제는 정상적으로 물이 흐르는 골짜기도 시야에 다시금 들어왔다.
“원래대로 돌아왔네요.”
“네, 뒤틀린 구역이 정상화됐어요.”
뒤이어 도착한 송하견과 민주혁도 주변을 둘러보고는 상황을 파악했다. 송하견이 내 손목을 들어 올리더니 맥을 짚듯이 누르며 확인했다. 옆에서 민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봤다.
“야, 뭐야?”
“이렇게 원래대로 돌려놓는 걸 내가 할 수 있나 봐.”
“어떻게 한 건데?”
이상한 장소에 가서, 처음에 시스템이 내게 말해 줬던 문장을 떠올리고, 거기에 대답했더니 뒤틀렸던 지역이 정상으로 돌아왔어. 이렇게 연결 고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 답을 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너도 모르는구나.”
평소라면 아니라고 바로 반박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주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넘어갔다.
“그래도 신기하다. 신의 힘을 받았다더니 그거랑 관련된 건가.”
“이렇게 순식간에 해결될 문제일 줄 몰랐네요.”
“…다행인 거지.”
“알아요. 그런데 문제가 해결된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니까 그게 좀 걸리긴 하네요.”
라엔의 말이 끝나자 한순간에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고개를 재빨리 저으며 나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몸에 이상이 없긴 했어.”
송하견이 잠깐 고민하다가 한숨처럼 뱉은 느릿한 목소리 덕에 겨우 시선에서 벗어나게 되어 내심 안도했다.
라엔이 말한 명확한 이유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는데, 옆에서 아직도 나를 향해 있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무리하지는 말자.”
“알아요.”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건네는 목소리에 가볍게 대답하며 박율과 시선을 마주했다.
◇
시야가 트인 이후로 상황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우리는 계획대로 며칠에 걸쳐 마물들을 해치웠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박율이 마지막 남은 마물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균열이 닫히는 걸 확인한 박율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마법으로 사라지게 하고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여기는 완전히 정리됐어.”
“그러면 바로 떠나?”
“그게 나을 것 같네.”
박율의 대답을 들은 송하견이 허공에 지도를 펼쳐 두고 이동할 위치를 확인했다. 나도 옆에서 지도를 흘끔 바라봤으나 지역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지는 않았기에 어딘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요?”
“사막으로 가는 거야.”
여름이 거의 지나는 중이어서 곧 날이 선선해지겠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한동안 건조하고 더울 듯싶었다(것 같았다).
“덥겠네요.”
“낮에는 그런데, 밤에는 좀 쌀쌀할 거야.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야 할 텐데.”
박율이 내 옷의 두께를 확인하는 것처럼 소매를 살짝 쥐었다.
“가서 춥거나 더우면 형한테 말해.”
“네, 고마워요.”
“음…. 그래. 형도 잘 보고 있을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박율은 내 표정을 살피고는 내가 미덥지 못하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는 정말 말할 생각이었다. 온도 조절 같은 마법을 걸어 놓아도 내 마음대로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지금 갈 곳도 뒤틀린 장소인가요?”
“어, 맞아.”
민주혁에게서 곧장 대답이 들려왔다.
“어떤 부분이 뒤틀려 있는데?”
“그건 가 보면 알아.”
아니, 안 알려 줄 거면서 왜 자기가 말을 받은 거야.
“그렇게까지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는 거야? 듣는 거보다 보는 게 더 확실해서 그래.”
민주혁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며 손끝으로 내 미간을 살짝 눌렀다. 내가 그런 식으로 쳐다봤었나 싶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얼굴에서 드러났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밤이 되어야 볼 수 있긴 하지만. 뭐, 아무튼.”
이번에야말로 얼굴에 황당함을 다 드러내며 민주혁을 바라봤다.
“그러면 그냥 지금 알려 줘.”
“…밤이 되면 비가 와서.”
“아, 형님. 미리 알면 낭만이 없잖습니까.”
송하견이 느릿하게 말을 잇자 민주혁이 듣지 말라는 듯 양손으로 내 귀를 감쌌다. 내 의사를 묻는 것처럼 내게 시선을 맞추는 송하견을 향해 입을 열었다.
“궁금해요.”
“비가 오는데 땅에는 닿지 않으니까.”
송하견이 망설임 없이 민주혁의 손을 떼어 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끝이야.”
“들어도 모르겠어요.”
“봐, 내 말처럼 가서 보는 게 더 낫다니까.”
황당함보다 웃음이 먼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은연중에 예상했던 상황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라엔은 박율과 함께 지도를 살피다가 어느 정도 정리를 끝냈는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뭘 모르겠어요?”
“하견 형이 이제 갈 장소의 뒤틀린 부분을 얘기해 줬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해서요.”
“그거야… 충분한 설명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어디까지 들었는데요? 내가 알려 줄게요.”
라엔은 송하견의 말을 듣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확신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이내 지웠다. 평소의 송하견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내가 다 말했는데.”
“그렇지 않을걸요.”
“더 필요해?”
내게 건네는 송하견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뭐가 부족한지 모르겠다는 듯이 들려서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충분하진 않았지만 더 필요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이런 듬성듬성한 정보도 싫지 않았다.
“이대로도 좋아요.”
“이한, 애써서 받아 주지 마요.”
“진심이에요.”
라엔이 잠깐 생각에 빠진 것처럼 입을 닫았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는 다 알려 줄 수 있어요.”
“뭐를요?”
“뭐든지요. 내가 알고 있는 거라면 전부 이해시켜 줄 수 있어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싶었는데.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
“이한이는 다 좋다고 하는구나.”
“전부 좋아서요.”
박율이 내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갈까.”
텔레포트를 쓰기 위해 내 어깨를 감싸는 라엔의 손길이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러운 것 같았다. 가만히 올려다보니 라엔이 흠칫 놀라서 손을 떼어 내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아팠나요?”
“뭐가요? 아니요?”
라엔의 시선이 내 쇄골 바로 위쪽의 어깨를 샅샅이 훑었다. 한동안 내 흉터에 대해서 괜찮아하는가 싶더니, 전에 옷이 젖었을 때 다시 봐서 그런 듯했다.
“괜찮아요. 한참 전에 나았다는 거 형도 알잖아요.”
라엔의 손을 다시 잡아서 내 어깨 위로 올리자 그는 옅게 웃으며 손의 위치를 내 등 뒤로 슬쩍 옮겼다.
“갈게요.”
동시에 휙,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건조한 바람에 마른 흙냄새가 실려 왔다. 눈을 잠깐 떴다가 모래가 섞인 따끔한 바람에 재빨리 소매로 눈앞을 가렸다.
‘아니,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생각해 보니 아프지도 않은데 반사적으로 겁부터 먹은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빈 후 다시 뜨자 파란 상태 창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 오는 사막’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오류가 난 것처럼 깨어지던 상태 창이 이번에는 다음 창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골짜기에서처럼 뒤틀린 구역을 해제할 수 있는 키워드를 알려 주지 않을까 싶어서 모래가 들어간 듯 이물감이 느껴지는 눈을 다시금 부릅떴으나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을 삼키고 있을 때 박율이 내 양쪽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눈 비비지 말고 잠깐만 참아 보자.”
플라스크 안에서 액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하견이 내 고개를 살짝 돌려서 위로 향하게 하고는 모래를 씻겨 내듯이 내 눈 쪽으로 액체를 찬찬히 흘려보냈다.
“…괜찮아?”
허리를 살짝 숙인 송하견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아직 눈이 조금 빨간데.”
송하견이 약초 향이 밴 손수건으로 내 눈가에 흘러내린 액체를 닦았다. 고개를 숙인 채 보송해진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앞에서 아직도 내 손목을 쥐고 있던 박율이 나를 불렀다.
“여기 봐 봐.”
시선을 들어 올리자 눈 위로 뭔가가 씌워졌다. 앞이 잘 보이는 걸로 미루어 투명한 고글인 듯했다.
“잘 맞아?”
“딱 맞아요.”
“진작 씌워 줄 걸 그랬다. 앞으로도 모래바람이 심할 때는 쓰고 있자.”
고글의 크기를 확인한 박율이 내 얼굴에 잘 맞도록 위치를 조정해 줬다. 그러고는 거처를 만들기 위해서 미리 지도에서 봐 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원래 바람이 이렇게 심하지는 않아. 지금이 시기가 좀 안 좋았나 봐.”
민주혁이 얇은 스카프를 내 목에 두르며 입과 코를 살짝 가려 줬다. 숨쉬기가 한결 편해져서 고마워, 하고 말하려는 찰나 민주혁이 키득 웃으면서 스카프 매듭을 지었다.
“너 그러고 있으니까 원래 여기 살던 사람 같아.”
어떻게 한번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을까.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민주혁을 바라보자 그가 곧바로 말을 돌렸다.
“잘 어울린다는 말이었는데.”
“그렇구나.”
“칭찬이었어.”
민주혁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시무룩함과 억울함이 절반씩 섞여 있는 듯한 목소리에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표정을 풀었다.
“그래. 고마워.”
민주혁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내가 매번 속아 주니까 민주혁도 나를 놀릴 맛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옆에서 송하견이 내게 귀띔해 주듯이 입을 열었다.
“…칭찬 아니었을걸.”
“알고 있…. 형, 내가 지금 민주혁 말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야, 선이한. 내 바로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민주혁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흔들리는 시선으로 송하견을 바라봤지만 늘 담담한 표정이라 생각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설마 내가 정말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송하견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하견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