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기다리지 말고
“뭐 때문에 좋아했는데?”
“인사드리면 맛있는 걸 손에 쥐여 주시곤 하셨어요.”
“아, 그렇지. 어렸을 때니까.”
그 나이대에는 그런 어른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지, 하고 반 정도 놀리듯이 말한 박율이 목소리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맛있는 걸로 사람이 좋아져?”
“일단 좋아한다는 의미부터 그때와 조금 달라졌을걸요.”
“그건 그렇겠다.”
그게 좋아하는 사람의 한 부분은 될 수 있어도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아니겠지.
“아무튼, 그 신관님이 와인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맛있어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투명하면서도 진한 색감과 코끝에 닿는 알싸하고 달콤한 향기. 약 올리듯이 내 코앞에 와인 잔을 가져다 대고 빙글 돌린 후에 한 모금도 맛보게 해 주지 않고 다시 거둬 가던 모습이 떠올라서 키득 웃었다.
“내가 나이가 차면, 꼭 같이 마셔 주겠다고 하셨었는데.”
의자에 앉았을 때 땅에 닿지 않던 발이 의자 끝까지 엉덩이를 붙여 앉고도 바닥에 닿게 되었을 때 즈음, 나는 그 신관님과 말을 나눠 본 일이 까마득해져 있었다. 그분뿐만 아니라 다른 신관님들과도 그랬고.
내가 신전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대강 들었던 박율은, 웃음을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히고는 계속 말하라는 것처럼 내게 시선을 맞췄다.
“그다음에 그분이 식사하실 때 맞은편에 앉은 적이 있어요. 접시 바로 옆에 놓인 와인 잔을 들었었는데, 관심조차 없다는 것처럼 눈길 하나 주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랬구나.”
나는 딱히 아무렇지 않은데도, 내 머리칼을 헝클이는 손길이 부드럽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져서 부러 활발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냥 다 마셔 버릴까 했거든요. 그랬을 것 같아요?”
“안 마셨을 것 같은데.”
“왜요? 사람이 좀 충동적일 때도 있고 그렇잖아요.”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었을 테니까.”
“…맞아요. 다시 내려놨어요.”
내가 바란 건 와인을 마시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신관님과 와인을 마시는 것이었다. 이제는 바라지 않게 되었지만.
“형은 나중에 꼭 같이 마셔 주세요.”
지금 내가 새로이 바라게 된 것이 있다고 슬쩍 말을 꺼냈다. 박율이 고개를 살짝 숙여서 한 손에 얼굴을 묻고는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한숨처럼 순식간에 숨을 내뱉고는 내 손을 잡아서 펼쳤다.
딱, 하고 손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내 손 안에 차가운 유리가 만져졌다. 내가 엉거주춤 와인 잔을 손에 쥐니 박율이 편하게 잡으라는 듯이 손가락을 슬쩍 움직여 줘서 안정적인 느낌으로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 없어.”
“어…. 그래서 지금 마시려고요?”
박율은 대답 없이 자기 손에도 와인 잔을 쥐고는 허공에 연한 색의 유리병을 만들어 냈다.
정말 와인일까 봐 긴장했으나 다행히 투명한 색의 음료가 두 개의 잔에 찰랑이며 담겼다. 귤처럼 생겼지만 겉이 녹색인 과일이 얇게 잘려 잔에 끼워졌다.
박율이 내게로 잔을 기울이자 유리가 맞부딪치는 쨍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차가운 음료에서 상큼하고 톡 쏘는 맛이 났다.
“원래는 알코올이 있는 음료야.”
“정말요? 이건 없어요?”
“없지. 이렇게도 많이 마시거든. 알코올이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여기서 그렇다고 말하면 같이 마실 생각인 건가? 그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아니요. 지금도 좋아요.”
“이것도 마음에 들면 그건 더 마음에 들 거야. 모히또,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마셔 봐.”
내가 모히또, 하고 이름을 한 번 더 입 안에서 굴려 보자 박율이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건 기다리지 말고 바로 말해. 할 수 있는 거라면 바로 하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은 이한이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손에 쥐고 있는 잔을 살짝 돌리다가 입에 가져다 댔다.
“내가 하고 싶은 건 형 옆에 있는 거니까. 형은 아니에요?”
가볍게 건넨 질문에 박율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이한아, 이거 술 아닌데.”
“네? 알아요.”
“취했나.”
“아닌데요.”
내 얼굴을 감싸서 이리저리 찬찬히 돌리는 박율에게 부루퉁한 표정을 하자, 그가 이제는 그만하겠다는 듯이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어깨를 끌어당겨서 자연스럽게 자기에게 기대게 했다.
긴장을 풀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그의 웃음이 작은 진동이 되어 닿아 있는 몸으로 전해져 왔다.
“놀리는 건가요.”
“아니, 좋아서.”
내 손에 들려 있던 빈 와인 잔이 박율의 손으로 옮겨 갔다. 허공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도 좋은데, 언젠가 진짜 술도 같이 마셔 줄래요?”
방금 마신 음료 때문인지 숨에 달콤한 향이 섞인 듯했다. 아직 단맛이 남은 입술을 살짝 핥았다.
대답이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박율이 긍정하는 것처럼 나와 시선을 맞췄다. 어쩐지 그거면 충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앞이 하나도 안 보이네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서 다다른 산의 정상은 짙은 안개 낀 날처럼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발아래서 얇은 나뭇가지가 밟혀서 딱,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가 내리쬐고 있는데도 시야가 차단된다는 것이 생각보다 긴장되는 일이었기에 손끝이 차게 식었다.
“선이한, 너는 이리 와 봐.”
“어?”
“거기에 잘 앉아 있어.”
나를 시야가 그나마 트이는 높은 곳의 나무 위로 올려 준 민주혁이 내게 방어 마법을 몇 겹 걸었다. 내 주위로 파란 막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금방 올 거니까, 저번처럼 또 혼자 피 토하고 있으면….”
“그러면?”
“뭘 또 그렇게 긴장해.”
“……”
민주혁의 손에 주욱 늘려진 볼 때문에 발음이 뭉개질 것이 명백해서 목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손을 떼어 냈다. 긴장한 게 아니라 치료하기 게이지를 슬쩍 확인한 거였다. 당분간은 괜찮을 듯싶었다.
“그러면 좀 속상할 것 같다고. 간다.”
민주혁이 다시 모두가 있는 아래로 향하고, 곧 화려하게 반짝이며 터지던 마법이 흐릿한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품에서 노트를 꺼내 들었다. 뒤틀린 구역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펜으로 의미 없는 선을 죽죽 긋고 있다가 발목에 느껴지는 이질감에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뱀처럼 기어 올라온 새하얀 기체가 내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뭐….”
말을 더 잇기도 전에 끌어당겨진 발목에 몸이 아래로 훅 가라앉았다. 몸이 붕 뜨는 듯한 기이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순백색의 공간 안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발아래는 뻥 뚫려서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처럼 보였으나, 눈을 찡그려 자세히 살피니 연한 격자무늬가 그어져 있는 듯 보였다.
쪼그려 앉아서 손끝으로 흐릿하게 그어진 선을 더듬어 보았으나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푹 내쉬고 다시 일어서서 허리를 폈다.
시야에 닿는 저 멀리에 선명한 연녹색의 잔디밭이 이질적인 모습으로 허공에 깔려 있었다. 그 장소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것처럼, 잔디가 깔린 곳을 제외한 위아래 주변은 모두 텅 빈 흰 바탕이었다.
“시스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늘 시스템과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불러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는, 심지어 걸음을 내딛는 내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목소리만이 작게 메아리쳐 울렸다.
하얀 바탕의 경계를 넘어가서 잔디를 밟으며 걸어 나가자, 곧 바닥에 놓인 각진 모양의 납작한 돌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까만 돌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손끝으로 매끈한 표면을 쓸었다.
“내가 뭘 해야 돼요?”
내 말에 반응하는 것처럼 시스템의 잔상 같은 파란 빛이 눈앞에서 깜빡였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뭔가에 방해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파직거리던 빛은 결국 지고 말았는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까 이 장소에 떨어질 때부터 놓치지 않고 잘 들고 있던 노트를 펼쳤다.
「일어서 줘.」
골짜기에 들어올 때 시스템이 내게 처음으로 보여 줬던 문장을 확인하고 다시 노트를 품에 넣었다. 긴장을 숨기려 주먹을 한 번 꾹 쥐었다 펴고 다시 돌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일어서 주세요.”
잠깐을 기다려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뭔가가, 혹은 누군가가 일어섰다면 적잖이 놀랐을 것 같다.
그대로 문장을 따라 말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이건 누군가 내게 전하고자 하는 문장인 건가.
각진 돌의 딱딱한 모서리를 손끝으로 누르다가 입을 열었다.
“일어설게요.”
순간 쨍강, 하고 두꺼운 유리가 깨지는 듯한 묵직한 파열음이 얼핏 들린 것 같았다.
실제로 뭔가가 깨지는 중인 건 맞았다. 주변의 흰 공간에 서서히 금이 가며 섬뜩한 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파열음에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참 요란하게도 내보내 주는구나, 하는 태평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내가 한가로운 마음가짐을 가질 때면 늘 그랬듯이 더욱 긴박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당연하게도 물음에 답해 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딛고 있는 바닥에도 커다란 금이 가는 걸 보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이제 여기서 나가는구나.’
바닥에 몸이 닿자마자, 차갑게 흐르는 물이 나를 적셔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한아, 정신 차려!”
“리더 형, 일단 이한을 데리고 여기서 벗어나요.”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순식간에 환해진 시야에 눈이 부셔서 물에 축축하게 젖은 소매로 눈을 비비고 다시 떴다. 나는 골짜기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였다.
시야를 가렸던 혼탁한 안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말라붙었던 골짜기에 옅게 흘러내리는 투명한 물이 내 옷에 스며들고 있었다.
“어?”
“괜찮아. 겁먹지 말고, 그대로 있어.”
눈을 깜빡인 찰나의 순간 내 가슴께를 꿰뚫으려는 듯이 쏟아져 내려오는 마물의 공격을 박율이 마법으로 쳐 냈다. 그가 누워 있는 나를 순식간에 일으켜 앉히고는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서 번쩍 들고 텔레포트를 써 그곳에서 벗어났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서 나를 바닥에 내려 준 박율이 내게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박율의 시선을 따라서 나도 내 아래쪽을 슬쩍 내려다봤다.
“앗.”
재빨리 상체를 조금 구부려서 팔로 허리께를 감쌌다. 얇은 옷감이 물에 젖어서 살갗이 비치고 있었다. 몸에 딱 달라붙은 옷 때문에 허리에 난 선명한 흉터까지 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