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새겨지듯이
막상 말을 뱉고 생각해 보니 마법을 쓰지 않고 직접 씻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긴 했다. 가끔 그러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혼자서 납득해 갈 무렵 송하견이 변명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더워서.”
“아까는 안 더웠다면서요.”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고 말하면 될 텐데. 굳이 다른 이유를 덧붙이는 송하견을 보자 조그맣게 웃음이 새 나왔다.
“아무튼, 라엔한테는 가 봤어?”
“이제 가 보려고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리는 송하견에게 나도 장단을 맞추었다. 라엔에게 가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기도 했고.
“여기 옆 방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도 따라 들어갈 생각인지 라엔의 방문을 두드리는 내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부드럽게 열린 방문 틈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라엔의 모습이 보였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라엔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어난 줄 알았으면 바로 가 봤을 텐데. 지금은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보다시피 멀쩡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그걸 증명해 줄 송하견에게 슬쩍 눈짓했다. 나를 따라 시선을 돌린 라엔이 느긋하게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송하견을 바라보며 평소보다 날 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또 왜 들어오죠?”
“뭐가.”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한 분위기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둘을 번갈아 봤다.
그러나 송하견은 늘 그랬던 것처럼 덤덤한 표정이었고, 라엔은 원래부터가 눈꼬리가 올라가 있어서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기에 평소와 특별하게 다른 점을 더 읽어 낼 수는 없었다.
“싸운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내가 멀뚱하게 서 있자 라엔이 내 팔뚝을 사뿐히 잡아끌며 푹신한 침대 위에 앉혔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라엔의 팔에 손을 슬쩍 가져다 대서 치료하기 스킬을 쓰자, 라엔이 낭패라는 얼굴로 재빨리 손을 빼냈다.
“치료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처음부터 형을 치료하러 온 거였는걸요.”
“아.”
짧게 숨을 뱉은 라엔이 민망하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올려 웃었다. 그러고는 내 손이 닿았던 자기 팔뚝을 살짝 쓸며 말을 이었다.
“보고 싶어서 찾아온 줄 알았어요.”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그것도 맞아요.”
내가 웃으며 바로 대답하자마자 닫혔던 방문이 달칵, 하고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가자, 선이한.”
“방으로 돌아가자고요?”
“응.”
“이렇게 갑자기요?”
송하견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갑자기는 아닌데.’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본래 목적인 라엔의 치료는 해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서두를 줄은 몰랐다.
뭔가 바쁜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라엔이 내 어깨를 살포시 눌렀다.
“쉬어도 돼요.”
그러더니 자기가 앉아 있었던 나무 의자를 송하견 쪽으로 마법을 써서 밀어 보냈다.
“가든가 앉든가 해요.”
“…….”
느릿한 동작이긴 했으나 별말 없이 자리에 앉는 송하견의 모습을 보니, 내가 모르는 사이 둘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건 아닌 듯했다.
라엔이 내 옆의 침대에 풀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걱정 마요. 별건 아니고, 오늘 아침 댓바람부터 하견이 귀찮게 하고 가서요. 이한이 신경 쓸 만한 건 아니에요.”
“하견 형이요?”
“귀찮게 한 적 없어.”
송하견의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유리잔 하나가 공중에 띄워져서 내 앞으로 천천히 날아왔다. 고마워요, 하고 말하며 미지근한 온도의 찻물을 홀짝 마셨다.
라엔이 기가 차다는 듯한 목소리로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나하나 말해 줄까요?”
“아니.”
들려오는 단호한 대답에 라엔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얼굴로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내가 마시던 차를 라엔에게로 슬쩍 건네자 그가 고개를 젓고는 옅게 웃었다.
내 찻잔이 비어 갈 때 즈음 이제 가려는 것처럼 몸을 일으키는 라엔의 모습에 옷자락을 슬쩍 잡았다.
“골짜기로 이동할 건가요? 같이 가요.”
박율과 민주혁이 없는 걸 보니 그 둘은 이미 가 있는 듯했다. 라엔은 내게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그만두더니 송하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괜찮은 거 맞아요?”
“응. 밤에도 살폈었어.”
문득 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라엔은 나를 앞에 두고도 왜 내 몸 상태를 내가 아닌 송하견에게 묻는지, 송하견은 왜 또 거기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는지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냥 나한테 물어봐요, 형”
내 어깨에 사뿐히 손을 올린 라엔이 내게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받았다.
“무슨 대답을 할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 말은 못 믿나요?”
“믿어요.”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한이 언제나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라엔이 검지 손가락을 뻗어서 내 뺨에 가져다 대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것처럼 위로 살짝 움직였다.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서 웃음이 새 나왔다.
“그래서요.”
입꼬리를 끌어당기던 손길이 다시 내 어깨 위로 얹어졌다. 텔레포트로 이동할 때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언젠가 라엔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건 안 괜찮은 거라고. 그걸 깨달아야만 정말 괜찮아질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자기가 그걸 알려 주겠다고 말해 왔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는 듯했다. 첫인상이 이래서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에 시스템 때문에 엉망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고, 더 이상 내 말이 라엔에게는 말뜻 그대로 들리지 않을 테니 그냥 가만히 입을 닫았다.
◇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Ⅳ 실패!
페널티 ‘간헐적 코피’가 지속 시간 ‘2주’ 동안 유지됩니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전투에 몇 날이나 흘렀는지 체감이 되지 않았는데, 눈앞에 뜬 상태 창 덕분에 저번 퀘스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애써 좋은 점을 찾아내 보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페널티를 받는다는 게 달가워지지는 않아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진화하는 듯한 마물과 조금씩 변하는 상황에 등골이 오싹했던 일도 몇 있었다. 치료하기 게이지가 끝까지 차지 않도록 잘 비워 내 왔기에, 다행히 그들 앞에서 피를 토하는 일 없이 치료를 할 수 있었다.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Ⅴ
성공 시: 민주혁의 확신
실패 시: 간헐적 각혈 2개월 페널티
제한 시간: 2개월
새벽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나 더 겹쳐져 떠오른 파란 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잊을 만하면 눈앞에 보이는 걸 보니, 어쩌면 이 퀘스트는 내가 깨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보여 주는 것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매번 보고 있네, 이한아.”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레 들려온 박율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서 옆을 돌아봤다. 나는 나무에 매달린 텐트 입구에 걸터앉아 있었고, 박율은 그런 내 바로 옆에 있었다. 나와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침을 꼴깍 삼키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를 봐요?”
“저거. 아니야?”
먼 곳을 가리키는 박율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주욱 옮긴 후에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긴, 박율이 상태 창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신기해서요. 율이 형은 안 신기해요?”
대답은 없었으나 박율이 웃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몸을 뒤로 돌려서 텐트 안으로 손을 뻗어서 더듬었다. 원하는 물건이 더 안쪽에 있는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박율은 내가 뭘 찾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마법을 써 금세 내 손에 묵직한 걸 쥐여 줬다.
고마워요, 하고 작게 말하고 내 손에 들린 쌍안경을 눈에 가져다 댔다. 위쪽으로 천천히 들어 올리자 어둠 속에서도 저 멀리 새하얗게 뭉쳐져 있는 도톰한 구름 기둥이 또렷하게 보였다.
구름 기둥은 하늘 끝에서부터 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표가 나지 않지만, 쌍안경으로 보면 위쪽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찬찬히 흘러내리는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산 정상에는 마지막으로 갈 거라고 했죠.”
“그래. 그쪽은 시야 확보가 잘 안되니까.”
지금은 아래쪽 구역의 마물부터 처리하며 올라가는 중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정상에 올라서 시야 확보를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는 듯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인 거 같았다.
쌍안경을 무릎에 내려 두고 고개를 돌려서 박율을 바라봤다. 여름의 더운 바람이 나와 그의 사이를 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뒤쪽으로 연하게 밝혀 놓은 불빛이 박율의 옆모습에 어른거렸다.
“모든 게 언제쯤 끝날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박율도 이 모든 시간을 거쳐서 세상을 구하고 난 이후를 그려 봤을까.
“사실 끝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세상을 구하는 일이요. 그게 어렵다면 용사 임기라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나는 다음 대의 용사들과 함께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지만 그래도 당신들이 지금처럼 매일같이 몸을 갈아 넣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이 있는 게 싫어서?”
“아니요, 형들이 희생하는 게 싫어서요.”
박율은 내가 아니라고 할 걸 알면서도 물어본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랬기에 나도 마음 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대답을 마지막으로 잠깐 끊긴 대화에 소매를 구기다가 입을 열었다.
“용사 임기가 끝나면 같이 안 있어 줄 건가요?”
“같이 있어 줄 거야.”
바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묘하게 흔들린 것 같아서 박율을 돌아봤으나 그는 평소처럼 눈을 접으며 웃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박율에게서 더 깊은 답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평화가 찾아온 이후에 함께 보낼 시간이라거나, 조금 더 먼 미래의 계획이라거나, 그런 것들. 그러나 이건 굳이 꺼낼 필요 없는 생각이기에 금방 지워 버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신전에서 지낼 때, 내가 이만했을 때요.”
손을 내 무릎 즈음으로 가져다 대고 키를 재는 것처럼 휙휙 흔들었다. 박율이 웃음기 스민 목소리로 너무 작을 때인데, 하고 말했으나 내가 살짝 흘겨보자 계속 듣겠다는 것처럼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여전히 웃고 있긴 했지만.
뭐, 그건 봐 줄 만했다. 박율은 안 웃는 모습을 찾는 게 더 어려우니까. 잠깐, 내가 박율이 표정을 완전히 굳힌 모습을 본 적이 있긴 하던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던 신관님이 있었어요.”
박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