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좋아서요
어색한 말을 꺼내려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시선만 살짝 올려서 아무런 움직임 없는 송하견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히 말을 꺼냈다.
“옆에 누워 줄래요?”
“너….”
“안 돼요?”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괜찮아? 말 돌리지 말고, 지금 어디가 불편한데?”
“…네?”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속도로 빠르게 말을 뱉는 송하견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리는 듯했다. 아차 하는 마음에 자리에서 엉거주춤 상체를 세우는 나를 송하견이 조심히 받쳐 일으켰다. 그러고는 의자를 더 바짝 끌어와 앉아서 진지한 얼굴로 내 안색을 살폈다.
아무리 퀘스트를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도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됐는데. 송하견이 내 말의 어디에 초점을 맞춘 건지 알 것 같아서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잠깐만요, 정정할게요.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요.”
주춤거리는 나를 붙잡듯 송하견이 내 손등 위로 손을 겹쳐 올리며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아까 많이 안 좋았다는 얘기 들었어. 약은 먹었다고 했는데. 아직 토할 것 같아?”
한껏 민폐를 끼쳤던 일이 다시 떠올라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여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게 아니라….”
“응.”
송하견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에 다시 용기 내 말을 꺼냈다.
“정말로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무슨 얘기?”
“옆에서 같이 자 주세요.”
“…….”
“오늘만요.”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송하견은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지만 지금 내 말이 상당히 뜬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듬더듬 설명을 덧붙였다.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러우니까…. 아니, 내가 아프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지금 형이 같이 있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는데….”
미리 생각해 뒀던 변명이었다. 하지만 말을 이어 갈수록 문장의 조합이 두서없는 것 같아서 확신이 옅어져 갔다. 원래 생각이라는 게 혼자서 간직하고 있을 때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막상 꺼내고 나면 엉망인 경우가 많은데 지금이 딱 그랬다.
“고개 들어.”
얼굴을 가린 내 손을 감싸서 내리는 손길에 민망함을 꾹 참고 송하견을 마주했다. 송하견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더니 안심했다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얼굴도 빨갛고, 귀도 뜨겁고.”
긴장이 풀린 듯 옅게 웃음기 스민 송하견의 느릿한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어딘가 낯설게 들렸다. 간질간질한 기분이 드는 이유가 그 목소리 때문인지 내 귓바퀴를 찬찬히 훑는 손가락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누워.”
송하견이 방 안에 불을 완전히 없앴다. 한순간에 어둠이 들어차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인기척을 통해 송하견이 침대에 올라왔다는 걸 알았다.
나도 따라서 자리에 다시 누웠으나 머리에 닿은 것은 말랑한 베개가 아니라 송하견의 단단한 팔이었다.
“안 무거워요?”
“응.‘”
“그렇구나….”
내가 놀란 내색을 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침착하게 입을 다물었다가, 얼마 못 가서 다시 말을 꺼냈다.
“이렇게 하고 잘 거예요?”
“…싫어?”
“아니요.”
송하견이 내 옆에서 잠들기 전에 금방 가 버릴까 봐 걱정한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좋아서요.”
“…그래.”
내가 웃으면서 말을 잇자 송하견에게서도 느릿한 대답이 들려왔다.
방금 일어났기에 잠기운 하나 없이 또렷한 정신으로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송하견의 나른한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너를 혼자 둘 거라고 생각했어?”
“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말을 마치지 않고 입을 다문 송하견이 내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편한 자세를 찾다가 송하견 쪽으로 몸을 돌리자 내 등허리를 다독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렇게 안 해도, 항상 옆에 있었어.”
“고마워요.”
그럴 필요 없어, 하고 가볍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 더 부탁해도 돼요?”
“다 부탁해도 돼.”
“손도 잡아 줘요.”
“…….”
내 당당한 요구에 송하견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닿아 있는 몸에서 웃음을 참는 것처럼 살짝씩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형, 지금 웃는 거예요?”
“아니.”
대답이 바로 들려오니 오히려 확신이 생겼다. 내가 지금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 다 이유가 있는 건데 송하견의 반응이 이러니 괜히 부끄러웠다.
“…비장한 목소리여서.”
내 허리를 다독이던 손길이 멈추고 곧바로 내 손을 단단하게 감싸 쥐는 힘이 느껴졌다. 마주 잡는다기보다는 송하견의 손에 감싸인 듯한 느낌이었다. 스킬을 쓰기에 이 정도 접촉이면 충분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치료하기 게이지를 살짝 살펴보니 변화가 거의 없었다. 큰 부상이 있으면 돌아오겠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됐었는데,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다.
송하견이 말없이 내 손을 더 강하게 말아 쥐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라엔 형도….”
많이 안 다쳤죠? 하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송하견의 말이 더 빨랐다.
“더 말하지 마.”
눈을 반짝 뜨고 송하견을 바라봤다. 방 안이 어두웠기에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눈을 잘게 찡그리며 송하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송하견은 깜빡이는 내 눈 위로 손바닥을 덮어서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그냥 자.”
“라엔 형도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안 괜찮으면?”
조금 불퉁하게 투덜거리는 것처럼 말을 꺼내다가, 송하견의 담담한 목소리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안 괜찮아요?”
“그러면 갈 거야?”
고개를 작게 끄덕이니 송하견이 다시금 물어 왔다.
“나는 옆에 있으라고 했으면서, 너는 가려고?”
“아.”
그게 그렇게 되나? 잘 생각해 보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인 것 같기도 한데, 송하견의 고저 없는 목소리 때문인지 어쩐지 진지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래도 다시 올 거니까요.”
“지금은 가지 마.”
송하견이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내 등을 끌어당겨 안고 입을 열었다.
“자고, 내일 가.”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요?”
송하견은 설명이 부족한 편이기는 하지만 이유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라엔이 있는 방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막는 이유가 뭘까.
고민하는 것처럼 한참을 말이 없던 송하견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라엔이 안 괜찮은 게 아니니까.”
“네?”
“괜찮다는 말이야.”
그건 나도 알았다. 굳이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줄 필요는 없는데.
“그리고 네가 아팠다는 걸 라엔도 아는데, 잠도 안 자고 새벽에 찾아가면 반길 리가.”
미리 준비한 것처럼 바로 이어지는 대답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라엔과 함께 있었던 송하견이 괜찮다고 말하는 걸 보면, 라엔에게 부상이 있더라도 내일 치료해도 될 만큼 가벼운 것일 터였다.
만약 내가 지금 간다면 라엔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는 내 상태에 대해 걱정을 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울먹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 주지 그랬어요.”
“그럴 걸 그랬네.”
내 등을 훑으며 느릿하게 올라간 큼직한 손이 이제는 내 뒷머리를 살살 쓸었다. 자연스레 몸을 바짝 붙이자 혼잣말처럼 멍한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듣고 싶었던 대답이 있었나 봐.”
“뭐였는데요?”
“글쎄.”
송하견 본인도 모른다는 건지, 아니면 내게 알려 주지 않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적이 길게 이어져서 나도 말없이 눈을 감았다. 내가 잠들려고 할 때쯤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전에서 혼자 지냈다고 했지. 아플 때는 어떻게 했어?”
“그냥….”
아픈 적 없어요, 하는 말을 제대로 뱉었는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평소에는?”
“평소에도요.”
“그래서 서러웠구나.”
“아닌데….”
“알아. 이제 괜찮아.”
송하견이 나를 완전히 옭아매듯이 안았다. 그게 답답하다기보다는 어쩐지 안정감이 들어서 송하견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
잠결에 고개가 살짝 들렸다가 다시 푹신한 베개 위에 놓이는 느낌에 정신이 얼핏 들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환한 빛이 느껴지는 걸 보니 날이 밝은 듯했다. 감은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인기척이 있는 쪽으로 손을 뻗으니 송하견의 옷이 잡혔다.
“형, 가요?”
“응.”
“어디로요? 가지 마요….”
“올 거야. 더 자.”
송하견이 내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퀘스트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내 이마를 쓸어 올리며 머리를 가만히 다독이는 손길에 다시 의식이 수면 아래로 잠겨 갔다.
다시 멀쩡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는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이미 곁에 송하견은 없었고, 그렇게 기다리던 퀘스트 창이 눈앞에 떠 있었다.
<돌발! 퀘스트> 함께 보내는 밤, 성공!
성공 보상으로 ‘용사님이 보낸 밤(1회)’를 획득하였습니다.
동시에 방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송하견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가 펄쩍 뛰듯이 안겼다.
“고마워요, 형.”
“뭐가?”
잘 잤냐는 안부 인사가 아닌 감사 인사를 받은 송하견은 꽤나 당황스러워 보였다.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이 퀘스트가 의외로 난도가 높아서 이번에야말로 페널티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성공했다는 알림을 보니 기쁜 마음이 너무 과했다.
페널티도 신경 쓰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안 될 것 같으면 더 매달리게 되는 것 같다.
“뭐가 고맙냐면… 음, 여름이라 더웠을 텐데 옆에서 같이 자 줘서요.”
“안 더웠어.”
나는 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났었는데. 그건 어쩌면 날이 더웠던 게 아니라 내가 송하견과 한 침대에서 자는 게 긴장됐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머쓱한 마음에 안고 있던 팔을 서서히 풀어내다가 송하견에게서 막 냉수로 씻고 나온 듯 찬 기운이 느껴진다는 걸 알아챘다. 다시 몸을 바짝 붙이자 송하견이 살짝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씻고 왔어요?”
단정히 묶어서 한쪽 어깨로 내려뜨린 기다란 머리칼을 손으로 살며시 매만졌다. 마법으로 제대로 말린 듯 물기가 전혀 없었음에도 여전히 냉기가 느껴졌다. 어지간히 찬물이었구나.
“클린 마법도 있을 텐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