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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78화 (78/150)
  • 078화.

    신경 쓰지 마요

    그다지 어려운 질문이 아닌데도 내 대답을 기다리는 민주혁의 모습이 진지해 보였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눈을 잠깐 굴리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데.”

    “어…?”

    “네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거야. 나는 억지로 버틴 적 없어. 그리고 저번에 네가 먼저 그랬잖아. 계속 같이 있어 주겠다고.”

    “…그랬지.”

    잠깐 망설이던 민주혁이 조금 가벼워진 표정으로 평소처럼 키득 웃더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민주혁은 손을 딱 튕겨서 방 안을 밝히던 빛을 조금 연하게 만들고 나를 침대에 도로 눕혔다.

    침대 옆의 의자에 걸터앉은 민주혁이 내 상체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서 제대로 덮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됐다. 옆에 있을게.”

    “지금도?”

    “어.”

    “지금 내가 잘 때까지 옆에서 있겠다고?”

    어쩐지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이 없어 보이긴 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고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민주혁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그것보다 더 오래.”

    “그러면 네가 잘 때까지…?”

    그거야말로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인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민주혁에게 고개를 돌리자 민주혁이 내 눈꺼풀 위로 손을 살짝 덮었다.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자라, 자.”

    내가 잠들기 전까지도 눈가에 선명한 온기가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메스꺼움 페널티가 끝나는 날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숙소에서만 지냈다. 나도 함께 가겠다고 강하게 주장했으나 내 상태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다시 데려가 주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뭐, 이제 새벽이 되면 괜찮아질 테니까.

    골짜기를 구역별로 나누는 마법을 걸어 둔 라엔과, 구역에서 변화되는 것이 있는지 살펴야 하는 송하견은 마법이 안정되기까지 필요한 며칠 정도는 골짜기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박율과 민주혁은 틈틈이 와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 주고, 온 김에 내 상태도 확인하는 듯했다. 나도 박율과 민주혁의 부상을 확인했으니, 서로서로 컨디션을 체크하는 묘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큰 부상이 없는 걸 보니 말했던 대로 조심하는 듯해 다행이었다. 민주혁도 이제 나를 평소처럼 대했다. 물론 민주혁의 후회 퀘스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지만.

    ‘혹시 이런 필수 퀘스트가 용사마다 하나씩 있는 건가.’

    잠깐 아찔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저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란 늘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기에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낮다.

    “이한아. 뭐라도 조금 먹어 볼래?”

    복잡한 생각 사이로 박율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푹신한 베개를 등에 대고 침대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박율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예 안 먹는 것도 좋지 않은데. 빈속에 약만 자주 먹는 것도 그렇고. 미음이라도 만들어 줄 테니까, 먹을 수 있으면 먹어 볼까?”

    지금 시간이 점심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저녁 식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중간을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안 먹긴 했지만 메스꺼움 페널티를 받는데 배고플 리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있었다.

    명치 부근은 세게 압박되는 것처럼 불편한데, 그 와중에 배는 고팠다. 피가 느릿하게 도는 것처럼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라엔 퀘스트 때는 사흘을 어떻게 버텼던 거지.’

    돌이켜 보니 내가 지금 이 상태인 건 박율의 책임이 컸다. 신전에 있을 때는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아서 며칠 안 먹는 것도 참을 만했으니까.

    그런데 여기 와서는 박율이 자꾸 식사 시간마다 뭔가를 만들어 줬다. 심지어 너무 맛있어서 열심히 먹다 보니 몸이 밥때를 지키는 것에 어느새 적응되어 있었다.

    페널티가 끝나기까지 조금만 더 버티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살짝 먹고 싶다고 말해 볼까 고민됐다. 박율이 내 표정을 보더니 다 알겠다는 듯이 말갛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만들어 올게. 무리하지 말고 괜찮을 것 같으면 먹어 보자.”

    박율이 금방 만들어 온 미음의 따끈하고 고소한 향을 맡자 지금까지의 고민이 무의미할 만큼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이제야 알았다. 박율이 음식을 가져온 이상 내가 먹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완전히 흰 미음이었는데도 맛있었다. 내가 뭘 먹는 게 오랜만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박율이 이런 음식조차 맛있게 만드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이거면 괜찮겠어? 더 못 먹겠어?”

    “네.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형.”

    나도 절제할 줄은 알았다. 이미 그릇에 담겨 있는 사분의 일 가량을 먹은 채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스푼을 놓기는 했다.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고 잠깐 앉아 있다가 박율이 주는 약을 먹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이제 푹 자고 일어날 때쯤이면 페널티가 끝나 있을 터였다.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아까 먹었던 미음이 하나도 소화되지 않고 목 끝까지 차올라 있는 듯한 기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것도 안 먹어야 하는 거야?’

    뭘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억울해하고 있을 시간도 아까워서 입을 틀어막고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안타깝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토기가 저절로 가라앉을 가능성은 없는 것 같았다.

    침착하자. 화장실로 가서, 뱉으면…. 그런데 여기서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서 욱, 하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몸을 돌려서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은 채로 침대보를 꾹 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떡하지? 클린 마법이 있다고 해도 여기서 토하는 건 싫었다.

    숨쉬기가 힘들고 눈앞이 어지러워서 상체가 저절로 구부려졌다. 그래도 밖이 조용한 걸 보니 박율과 민주혁은 여기 없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늘 이렇다.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나는 앞으로 뭔가를 섣불리 기대하거나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민주혁은 박율과 함께 숙소로 텔레포트해 돌아왔다.

    “이제 구역을 나눈 마법은 오늘로 얼추 안정화될 것 같습니다.”

    “그래. 해가 질 때쯤이면 라엔이랑 하견이도 돌아오겠다.”

    2층으로 올라가서 문을 살짝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자고 있나 싶어서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리자 선이한의 모습이 보였다.

    선이한은 침대에서 몸을 틀어서 기대앉은 채 일어서려는 듯 침대 바깥으로 발을 내려놓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가에 손을 올린 모습이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박율 형님이 선이한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아서, 입가를 가린 그의 가느다란 손목을 감싸며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둥글게 휜 채로 옅게 떨리는 마른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선이한은 형님 쪽으로 고개를 돌릴 정신도 없는 듯 꾹 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 마….”

    “괜찮아. 고개 숙이고, 토할 것 같으면 억지로 참지 마.”

    거부하는 것처럼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작게 젓는 모습에 급하게 봉투를 소환해서 선이한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선이한이 눈을 찡그리며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식은땀에 젖은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자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형, …싫어요.”

    형님이 등을 토닥이는 규칙적인 진동이 울렁임을 부추기는 듯했다. 선이한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약하게 두들기는데도 그럴 정도면 그냥 게워 내는 게 나을 듯싶었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이러는 걸 보면 마음고생이 어지간히 심했던 듯했다. 많은 일이 있긴 했지만, 나 역시 선이한의 상태가 이렇게 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해서 속이 쓰렸다.

    동시에 선이한이 나를 그만큼 생각하고 마음 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날 내가 같이 있고 싶다고 말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럴 생각이었다고 대답했던 말간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선이한이 이해한 같이 있겠다는 말이 내 의도와는 달랐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그 대답만으로도 나는….

    “…욱, 흐으.”

    선이한의 울먹이는 듯한 신음이 정신을 깨웠다. …나는, 어떻게 지금 아픈 애 앞에서 고작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거지?

    속내를 잘 말하지 않는 선이한의 생각을 엇나간 방법으로 지레짐작한 것이 아닌가. 잠깐이라도 섣부른 편견을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어서 이를 깨물어 정신을 깨웠다.

    선이한의 뒤통수에 손을 대고 고개를 살짝 눌러서 봉투에 더 가까이 가져다 대 줬다. 곧 선이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하나도 소화되지 않은 것 같은 미음을 그대로 게워 냈다.

    자기 명치께의 옷자락을 말아 쥔 작은 손이 여리게 떨렸다. 위액까지 다 토해 내던 선이한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박율 형님이 선이한에게 물을 건네며 입 안을 헹구도록 했다.

    “조금 괜찮아?”

    선이한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힘없이 작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형아는, 죽나요? 형아가 쉬고 싶다고 했는데, 제가 도와 달라고 했어요. 죄송해요, 용사님.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용사님이 형아를 치료해 주면 안 되나요?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집을 나설 때, 내가 사탕을 손에 쥐여 주자 아이가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선이한이 자기를 치료해 주고 피를 쏟으며 제게 이것보다 몇 배는 커다란 사탕을 주고 갔다고.

    선이한이 쉬고 싶다는 말을 뱉는 모습을 상상해 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늘 괜찮다고 말하던 것과 같은 담담한 얼굴이었을지, 혹은 완전히 무너진 얼굴이었을지, 그것도 아니면 텅 빈 공허한 얼굴이었을지.

    어느 쪽이든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이한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힘들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목소리를.

    “미안해요….”

    이렇게 사과하는 건 말고. 선이한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채였다. 박율 형님이 손에 들려 준 약과 물을 삼키고 자리에 웅크려 누운 모습이 눈에 밟혔다.

    “미안할 일 아니야. 바로 누워도 괜찮겠어?”

    선이한이 괜찮아요, 하고 웅얼거리듯이 말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박율 형님이 이불을 다시 어깨까지 내려 주고 발개진 눈가를 쓸자 선이한이 몽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창문 열어 줄 수 있나요?”

    “이미 열려 있는데, 왜? 답답해?”

    “음….”

    선이한이 그게 아니라는 듯 망설이자 형님이 조금 어이없다는 것처럼 웃었다.

    무슨 의미의 말일까 생각하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클린 마법으로 다 정리했는데 선이한은 지금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걸까.

    “너한테서는 항상 포근한 향만 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선이한이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그러더니 금방 표정을 풀고 박율 형님이 제대로 말해 주기를 기대한다는 듯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형님이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선이한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처럼 눈을 꾹 감았다.

    “…잘래요.”

    “그래. 자, 이한아.”

    형님은 선이한을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모를 부드러운 웃음을 여전히 그린 채로 선이한이 약 기운에 금방 잠들 때까지 머리칼을 살살 쓸었다.

    선이한이 눈을 뜬 건 새벽이 내려앉은 무렵이었다.

    ‘이제야 페널티가 다 끝났네.’

    몸 상태가 완전히 괜찮아져 있었다. 왜 사람은 뼈저린 실패를 겪어야만 깨달음을 얻을까. 앞으로 메스꺼울 때는 절대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믿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리니 송하견이 내가 누운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서 앉아 있었다.

    “일어났네.”

    손에 들린 노트에 박혀 있던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지금은 좀 어때?”

    “나 때문에 지금까지 기다린 거예요?”

    “…아직 안 좋아?”

    그렇구나. 내 질문에 답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이제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어쩌면 송하견과 함께 자야 한다는 퀘스트를 깰 수 있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조심스레 운을 뗐다.

    “음, 아직 조금….”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으나 거짓을 말하려니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쥐어짜 내듯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진짜 조금,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하고 조그맣게 덧붙인 다음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형,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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