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뭐가 중요해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바람이 훅 불어왔다.
탁.
박율이 나무 바닥에 발을 딛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습한 나무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보랏빛 새벽하늘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어느새 마을의 그 목조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박율은 나를 안은 채 마법으로 책상에 놓인 등불을 환하게 밝혔다. 연한 주황색의 불빛이 작은 방 안에 가득 들어찼다.
“텔레포트를, 막 써도 돼요…?”
고작 이런 일에? 텔레포트에 마나가 많이 들어간다는 걸 분명히 들었는데. 박율이 나를 침대 위로 사뿐히 앉혀 놓으며 한숨처럼 말을 받았다.
“막 쓰는 게 아니지. 네 상태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갑작스럽게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러는 게 맞다면 빨리 내려와야 해.”
“아니….”
산이 별로 높은 것도 아니었고, 그런 이유도 아니었다. 폐를 끼치기는 싫었는데. 내가 조금 침울해진 걸 알아챘는지 박율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거리도 가까워서 이 정도는 걱정할 만한 게 아니야. 그것보다 이한아, 언제부터 몸이 안 좋았어? 처음 갔을 때부터 좀 어지러웠어?”
내가 말없이 고개를 젓자 박율이 손을 살짝 흔들어서 송하견이 방 한구석에 쌓아 두었던 나무 가방 하나를 공중으로 띄워 왔다. 그 안에서 플라스크 몇 개를 꺼낸 박율이 유리잔에 액체를 조금씩 넣고 섞은 후 내 손에 쥐여 줬다.
“힘들어도 조금만 마셔 보자.”
“안 힘들어요.”
“천천히 삼키고.”
박율은 내가 유리잔 안에 담긴 약을 다 마시고 침대 머리맡에 가만히 기대어 있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속이 아까보다는 편해져서 참을 만했다. 이제 목소리도 못 낼 정도로 메스껍지는 않아서 바로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 괜찮아졌어요. 고마워요. 아까 속이 좀 안 좋긴 했는데, 그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잠깐 생각이 많아져서 그랬나 봐요.”
“무슨 생각?”
“그냥…. 그것보다 형. 여기 이렇게 있어도 괜찮나요? 이젠 괜찮으니까 다시 가도 돼요.”
박율은 조금 쓰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쓸었다.
“나중에 조금 정리가 되면, 무슨 생각이든 혼자 고민하지 말고 형한테 말해 줘.”
급하게 말을 돌린 것이 무색하게도 속내가 다 드러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운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고 대답을 뱉었다.
“알았어요.”
“그리고 여기 있어도 괜찮아. 아직 안색이 창백한 걸 보니까 더 쉬어야겠다.”
내가 나을 때까지는 크게 위험한 일이 없도록 주의할 테니까 나는 몸 상태를 회복하는 데 집중하라고 했다.
내가 아까 다들 위험하게 싸우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이야기를 조금 순화해서 말하자 박율이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한아. 지금 가장 치료가 필요한 건 너인데, 너는 너를 치료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네가 쉬어야 할 때야.”
“그래도….”
“우리는 부상이 있으면 바로 올 테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네에.”
조금의 불만족스러움을 담아 느릿하게 대답했으나, 박율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조금 안심되기는 했다. 박율은 거짓을 말하지는 않으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잠깐 웃음을 참는 듯하던 박율이 내 이마로 손을 뻗어서 식은땀을 닦아 내고는 내 등허리를 둥글게 매만졌다. 마법을 써 줬는지 축축하게 젖었던 옷이 보송하게 말랐다. 박율은 그렇게 한참을 더 반복하다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형은 라엔이랑 하견이에게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말을 전하고 와야 하거든. 그동안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당연히 혼자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박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내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박율이 가까이 다가오니까 연한 꽃향기가 났다.
귓가에 숨결이 닿자 간질간질해서 순간 메스꺼움을 잊을 정도로 몸이 살짝 굳는 듯했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사실 형이 계속 이한이 옆에서 상태를 지켜봐 주고 싶은데, 이한이가 생각이 많았다고 하니까 양보하는 거야.”
가벼운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무슨 양보를 말하는 건지 생각하는데 박율이 내게서 몸을 떨어뜨리고 눈짓으로 문 쪽을 살짝 가리켰다.
주혁이.
“아.”
내가 이해한 걸 확인한 박율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내게 다시 물어 왔다.
“많이 안 좋아? 잠깐도 혼자 못 있겠어?”
좋아. 이제 내가 대답만 잘하면 민주혁과 대화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속이 울렁거려서, 조금 힘….”
여기까지 말했는데 목소리가 더 나오지 않았다.
“힘들….”
힘들다고 말하는 건 싫었다. 억지로 말을 뱉으려고 했지만 목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힘들지 않으니까. 그렇구나. 이 말은 꺼내지 못하겠구나.
생각해 보니 민주혁을 기다리겠다고 말한 건 나였다. 민주혁이 뭐라고 말하려던 걸 끝까지 듣지 못해서 그게 좀 궁금하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민주혁과 대화하는 건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 자리를 만들어 준 박율에게는 미안하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고 말을 맺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동시에 문이 세차게 열렸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몸을 파드득 떨며 그쪽을 바라보자 민주혁이 문고리를 꾹 말아 쥔 채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썹을 찡그린 채여서 화난 것 같기도 하고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박율이 부드럽게 웃더니 내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형은 가 볼게.”
박율이 방문을 나서며 민주혁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민주혁은 박율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바닥에 발이 붙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민주혁의 모습을 보니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민주혁.”
내 목소리를 들은 민주혁이 몸을 흠칫 떨었다. 민주혁이 저번처럼 어디론가 가 버리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말하긴 했는데 나는 기다릴 수 있어. 네가 계속 나를 피하지는 않을 거잖아. …맞지?”
조심스럽게 묻자 민주혁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네가 미안할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 왜?”
“지금 많이 안 좋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민주혁이 순식간에 다가와서 침대 바로 옆으로 우두커니 섰다. 그러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뭐가 중요해? 너는 너 말고 대체 뭐가 중요해?”
내가 뭐라고 대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민주혁이 말을 이었다.
“너, 지금 네 안색이 어떤지 모르지.”
“내 안색이 어떤지는 모르겠고, 네가 뭔가 얘기할 생각이 들었다면 지금은 너랑 얘기하는 게 더 중요해.”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뜬 민주혁이 곧 평소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었다. 그럼에도 왠지 조금 힘겨워 보이는 표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민주혁이 한 손을 들어서 내 볼을 살짝 늘리며 말을 이었다.
“반대네. 나는 네가 더 중요한데.”
침대에 걸터앉은 민주혁이 큼직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먹을 것처럼 감싸 쥐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흔들림 하나 없이 진지했다.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 마음고생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신경 썼다는 건 아는구나. 그렇다고 사과할 만한 일은 아니고.”
손이 조금 눌리는 느낌이 들어서 민주혁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움직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민주혁은 그 상태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너한테, 흉터….”
뜨거운 손이 내 어깨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옷 안으로 조심스럽게 파고들어 와서 까끌까끌한 흉터를 덧그리듯이 손끝으로 매만졌다.
발갛게 물들어 보이는 눈과 간절한 손길에 나도 덩달아 진지해지는 것 같아서 간지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민주혁이 잘게 떨리는 몸을 무너뜨리듯이 내게 기대 오며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는, 그냥 내가 다치게 내버려 둬. 그다음에 네가 치료해 주면 되잖아. 왜 네가 나서.”
내가 그걸 어떻게 내버려 둬.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냥 민주혁의 등을 차분하게 토닥였다.
이번에 기절한 건 퀘스트 때문이었지 다쳤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혁이 후회하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민주혁이 이렇게 걱정할 일도 없었을 텐데. 시기가 참 적절하지 못했다.
“선이한. 대답은?”
민주혁의 팔이 감긴 등허리에 잠깐 피가 통하지 않다가 도는 것 같은 저릿한 느낌이 났다. 어쩌면 이건 나를 지나치게 압박해서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몸을 긴장시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침을 꼴깍 삼켰다.
“화났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화를 내.”
민주혁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처럼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다시 내뱉었다. 그러고는 나를 껴안은 채로 내 등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끝까지 대답은 안 하네.”
“…….”
“알았어. 그러면 하나만 물어보자. 나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너도 솔직하게 말해.”
“어.”
민주혁이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동안 묵직한 정적이 텅 빈 방 안에 내려앉았다. 긴장되는 마음에 꾹 쥔 내 손 안에 민주혁의 옷자락이 말려 들어갈 때쯤에야 민주혁은 입을 열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
맥이 빠져서 꼿꼿하게 펴졌던 허리에 힘이 탁 풀렸다. 왜 한참 분위기를 잡아 놓고 이런 걸 묻는 거지.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갑자기 왜 그래?”
“그러면 너는 왜…. 혹시 쉬고 싶었어? 네가 힘들어서 쉬고 싶으면 그래도 돼. 억지로 버텨 가면서 같이 있으려고 하지 마.”
민주혁이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찡그린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묘한 표정으로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뒤로 물렸다.
“네가 가장 중요하니까.”
민주혁의 손을 잡아채서 내게로 끌어당겼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전부 아니야.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내가 언제….”
“꼭 신전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더라도 괜찮아. 네가 갈 곳이 신전만 있는 건 아니야.”
단호하게 말을 끊는 민주혁에게 순간 울컥해서 흔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갔으면 좋겠어?”
“어어,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야. 울지 말고. 너 몸도 안 좋은데 상태 더 나빠진다.”
우는 건 아니었지만 민주혁의 말은 타당했다. 여기서 흥분하면 정말 뭐라도 게워 낼지도 모른다.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민주혁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내가 무슨 마음으로 말하는 건지도 모르잖아.”
“네가 말을 안 하는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건… 그렇긴 하지.”
또 금방 수긍하는 모습이 민주혁답다 싶어서 살짝 웃자,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던 민주혁이 나를 따라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느릿한 목소리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너랑….”
“응.”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